미술관에 간 붓다 - 배트맨과 사천왕의 공통점에서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의 차이까지 명법 스님의 불교미학산책
명법 지음 / 나무를심는사람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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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좋고, 은은한 풍경 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조심스럽게 한발자국씩 내딛으며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절 사랑은 친외가 모두 불교신자인지라 어릴적부터 쌓아온 것이다. 어릴 적에 자주 가던 절이 있었는데,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대웅전 뒤를 돌며 탱화를 구경하곤 했다. 벽화 순서대로 보리수나무에서 태어난 아기 부처부터 열반에 들기 까지 부처님의 생애가 그려져 있었다. 말풍선 하나 없었지만, 그림 속에 스토리텔링이 있다는 점에서 절을 갈때마다 보고 또 봤던 것 같다.

불교미술을 좋아하고 친근하게 느꼈지만, 정작 잘 몰랐다. 하지만 더 알고 싶은 목마름이 있는 상태였다. 그때 눈에 들어온 '미술관에 간 붓다'는 해갈해 줄 것 같은 기대감이 생겼다.

명법 스님이 쓰신 이 책은 다양한 시선으로 불교미술을 바라본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반가사유상을 연결지어 보기도 하고, 사천왕과 배트맨을 연결지어 공통점을 도출해내기도 한다. 그러면서 동서양의 미학관점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또한, 불교 미술 속의 동자승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나, 불상의 수인 같은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한다. 불탑의 기원이나 사찰의 승방에 대한 새로운 사실들도 재밌었다. 그럼에도 내가 불교에 대한 상식이 적다보니 모르는 부분은 검색 찬스를 이용해 보충하며 읽기도 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동자승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3부에서 명부전과 동자승에 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데, 가히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흔히 동자승이라고 하면 천진하고 귀여운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명부전(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기능을 하는 전각) 속의 동자승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p149 이처럼 어린아이는 어른과 '같으면서도 다른'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아이들은 죽은자의 세계와 산 자의 세계를 매개하는 중간자 역할을 햇다. 고대 중국에서는 아이들을 희상제의 희생양으로 바치기도 했고 조상의 제사에 시동(尸童)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p151 전근대 동아시아사회의 어린아이들은 필립 아리에스가 연구했던 전근대 서양 아동들과 마찬가지로 어른들의 특별한 돌봄이나 관심을 받지 못했다. (…) 현실 세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명부전의 동자들은 노동하는 아이, 즉 시왕을 보좌하는 시동이다. 그들은 시왕이 필요로 할 때 바로 대령하기 위해 여러가지 지물을 들고 서 있는 것이다. 붓과 벼루는 시왕의 판결을 기록하는 도구이고, 아이들은 시왕의 명령을 받아 판결을 기록하고 보고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예전에는 아이들이 잘 죽었다. 그래서 오래 살라고 개똥이 같은 아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아이는 조상의 피를 이어받기도 했지만, 수명에 관한 문제로 중간자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명부전에 등장한 어린아이들은 그런 연원이 있던 것이다. 지금 불교 행사에서 종종 보이는 동자승들의 기원이 실은 그런 의미였다니. 보이는게 다가 아니구나 싶었다.  

 

 

 

 

그 밖에도 수인(手印)에 대해 알 수 있어 좋았다. 물론 수인을 안다는 것에 그치면 안된다는 저자의 일침이 있었지만, 지권인은 비로자나불,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 등을 알고난후 사찰에 가면 더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또한 탑의 기원이 인도의 스투파였다는 것. '나락으로 떨어다'의 나락도 '나라카'에서 왔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었다. 어릴적에 무척 좋아했던 사천왕에 대한 사실을 알 수 있어서도 좋았다. 이런 지식을 알게 되는 것도 책을 읽는 즐거움이지만, 마음을 흔드는 글귀를 읽는 것이야 말로 책을 읽는 기쁨이다. 관세음보살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좋았다. 불교 신자들이 자주 외는 '관세음보살'. 어릴 적에 꿈 속에서 무서운 일이 있으면 관세음보살을 외라는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 덕에 관세음보살은 내게 꽤 친숙하다. 자세히는 몰라도 언제든지 부르면 나타나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나온 관세음보살의 또 다른 이름 '수월(水月)'이 너무 멋지다. 뜻은 다음과 같다. '물속의 달'이란 의미로 하늘의 달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더라도 일시에 천개의 강에 나타나듯 보살의 청정한 법신이 온 세상에 가득하여 그 경계가 무한하고 보살의 자비가 온 세상을 고루 비추어 중생의 바람에 따라 제한 없이 평등하게 응함을 나타낸다. 감탄하게 만드는 멋진 의미와 이름이다.

p187 소리가 고통인 것은 소리 자체의 운명이 아니다. 거기에 얽혀 있는 자기가 소리를 괴로움으로 만든다. 소리가 자기 소리인 한 그것은 고통의 표현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리에 소리로써 대답하는 것은 괴로움에 대하여 괴로움으로 대답하는 것이며 자기와 또 다른 자기가 대립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소리는 대립과 투쟁의 산물이며 마음을 혼탁하게 할 뿐이다. 소리를 맑히려면, 그리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자기 소리가 끼어들면 안 된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추호도 자기소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참 멋진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의 뜻을 감히 어찌 알겠냐만은 조금이나마 마음이 동한다.

이렇듯 한층 더 깊은 시선으로 불교미술을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 될 것 같다. 나처럼 관심은 있으나 잘 모르는 입문자에게 좋은 책이 아닌가 싶다. 특히 사진자료가 충실하게 쓰인 점이 마음에 든다. 미술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미술이기도 하다. 특히 종교 예술은 그런 의미가 더욱 강한 것 같다. 이 책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잘 볼 수 있었으면 한다.

 

- 다음은 밑줄긋기

p8 가상과 진상의 경계를 뒤섞여 버린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웃지만 현대인들 역시 대중음악,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컴퓨터 게임 등 또 다른 이미지로 스스로 속이며 살고 있다. 현대인들은 예전에 비해 더욱 현란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들에 매달려 한 걸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의 현실적인 요구를 뛰어넘어 다른 차원으로의 비상을 꿈꾸지도 못한다. 그들은 시적 상상력을 잃어버리고 날로 정교해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이미지 조작에 자신을 내맡긴 채 시시각각 변하는 이미지들 속에서 감각의 황폐화를 경험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환영에 먹혀 버린 자는 인도의 마술사가 아니라 현대인 자신들이다.

p87 놀랍게도 동서양미술에 공통적으로 죽음은 나체로 묘사되어 있다. "올 때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고 갈 때 한 물건도 가지고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죽음이란 살아생전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이 무의미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전근대 사회에서 옷은 그 사람으 신분과 직위, 재산 따위를 표시한다. 죽음 앞에서 살아생전 누렸던 신분도, 재산도, 명예도 모두 의미가 없다. 이 근원적인 사건 앞에서 우리는 각자 벌거숭이의 자신을 만나지 않을 수 없다. 동서양에서 죽음을 나체로 표현한 것에는 이와 같은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다.

p107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예술작품의 비평기준은 "대상을 얼마나 닮게 그리느냐"였다. 예술작품과 그 원본이 된 실제 사물 사이의 관계를 서양에서는 `미메시스`라고 부르며 동양세어는 `사似(닮음)`라고 했다. 그러나 이 개념들의 차이는 크다. 무엇보다 동양에서는 대상의 외관을 유사하게 그린 것을 형사(形似)라고 하고 대상의 정신성이나 기운을 생동적으로 그려낸 것을 신사(神似)라고 구별한다. 그리고 전자보다 후자를 높이 평가하는데 서양 미학에는 이러한 구별이 없다.

p116 예술작품에서 `사실`은 궁극적으로 가짜 현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다 더 진실하다"고 말했던 까닭은 시가 실제 사건보다 더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그럴듯함`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실제라고 믿는 우리의 믿음이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다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p277 랑시에르가 지적하듯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한 장소를 할애하는 것은 공간 및 존재 방식의 분배에 감성적인 단절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닫힌 공간은 고독한 가운데 내면을 바라보기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적 삶을 통한 탁마를 위해 열린 공간 또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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