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인열전 1 (반양장) -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유홍준 지음 / 역사비평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그림'은 평면 위에 펼쳐지는 2차원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 이상의 차원이 느껴지는 예술이다. 내 삶에서 미술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소통했으며 성장했다. 지금은 벗으로 삼으며 국내외 그림을 감상하거나 관련 서적을 읽으며 깊이를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림을 접하면 접할수록 인문학적 깊이가 더해지는 기분이 든다. 단순히 내 삶의 멋 중의 하나였던 그림이, 이제는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도움을 주는 조력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림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있다보니, 요즘 읽는 책도 그림에 관련 된 것이 많았다. '한 눈에 반한 우리 미술관', '손 안의 박물관' 등 특히 우리 미술에 대한 책을 접해왔다. 그러다보니 좀 더 깊이있는 책을 탐독하고 싶어졌다. 화인열전! 순간 책 제목이 머리 속에 스쳤다. 우리집 책꽂이에 오랫동안 꽂혀있던 책이다.

 

 

책을 집어 들어 서문을 보니, 참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우리는 '반고흐'나 '피카소'보다 우리 화가를 모르고 있지 않느냐고. 나 역시 그러하다. 오히려 플라톤이니 소크라테스니 서양철학은 많이 접하면서도 정작 우리 철학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독서에 임하게 되었다.

 

 

화인열전은 총 8명의 화인을 소개한다. 제1권에서는 연담 김명국,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겸재 정선의 전기를 담았다. 겸재 정선에 대한 이야기의 양은 제1권의 절반에 해당한다. 사실 정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저자는 밝혔는데, 그 만큼 심도 있게 채우려 노력한 듯 하다.

잘 몰랐지만 최근에 접하게 된 연담,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 역시 최근에 접한 관아재 그리고 유명한 겸재. 남아있는 기록에 근거해서 그들의 일대기를 소개해준다. 이들은 문인화가이기 때문에 어디에서 벼슬을 지냈는지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 있어 추적(?)이 가능한 것이다. 나이듦에 따라, 인생의 굴곡에 따라 변하는 그림의 깊이를 살펴볼 수 있어서 좋다.

 

 

조선시대 때는 다양한 선비들이 서로 뜻을 함께하여 우정을 나눴다. 조영석과 정선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마음을 나누었던 흔적을 소개해준다. 그런 점이 참 재밌다. 서로 그림을 그려고 보여주고 그 그림에 맞게 시도 짓는다. 벗이 먼 곳으로 부임하기 위해 떠날 때에는 그림을 그려주고, 또 그려주길 청한다. 참 낭만적이지 않은가? 난 이런 것을 프로그램에 녹여서 기획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화인들의 일대기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삶을 다하고 떠날 때에 다다러서야 명작을 그린 것이다. 지금 수명으로 본다면 내가 명작을 그릴 수 있을 때는 아직 한참 멀었구나 싶은 것이다. 내게 타고난 천재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하늘에서 재능을 내려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 걸음씩 걸어가며 쌓은 세월을 녹여야만이 명작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급한 마음이 어느 정도 가신다. 빨리 원하는 것을 하고 싶고, 빨리 원하는 것이 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지금의 내가 사실은 당연한 것이라고 위로가 된다. 하지만 모든 것을 시간의 흐름에 맡기기엔 내 시간은 정해져 있고, 또 욕심도 놓아지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선인들의 이야기를 접하며 시간이 가져다주는 깨달음을 앞당기려는 노력뿐이다.

 

 

또 하나. 화인들의 그림에서 이들의 그림이 아닌 것 같은데 이들의 그림인게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정선이 본인 스타일이 아닌 그림인데, 시도해 보았던 그림. 물론 미술학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다른 그림에 비해 평가가 떨어지는 그림이기는 하나, 그런 그림을 그림으로써 본인의 스타일을 더 풍성하게 하고 굳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잘못 된 길을 들어선 것이 인생의 오점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길로 갈 수 있던 발판이라는 것. 분명한 것은 다른 스타일을 시도하고 공부함으로써, 그 다음에는 더 좋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참 멋지지 않은가?

 

 

이번 화인열전을 통해 정말 많은 그림을 접했다. 교과서에 나오는 명작부터, 화인들의 초기 그림까지. 교과서에는 그 화인 인생의 최대 명작 한 점만이 실리지만, 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그림이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명작만을 기억하지 않는가? 사실 물리적 한계로 교과서 등지에서 여러 작품을 실을 수 없다는 점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 제한되는 점도 있다. 그러나 명작 뒤에는 반드시 수 많은 습작들이 있다는 것이 큰 가르침이다. 내 인생에서 아직은 습작을 그리는 단계인 것 같다. 그런데 벌써부터 나는 명작에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닐까?

 

 

아! 다른 책을 볼 때 궁금증을 가졌던 것이 해결이 되었다. 문인화가들 중에는 환쟁이라 불리는 것이 꺼려져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겸재 정선은 그런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자유롭게 그렸지만, 관아재 조영석의 경우에는 그런 사태를 염두해서 그림을 자제했고, 심지어왕명에도 불구하고 붓을 들지 아니했다. 대체 왜 그럴까 싶었다. 속내(?)는 이러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화원 출신의 화가들은 '중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인화가인 양반과는 신분이 다르다. 환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양반이 중인이 하는 그림을 그린다고 비아냥댄 것이다.

 

 

이 책에는 안 나왔고, 제 2권에도 안 나왔지만 '이징'이라는 인물이 궁금해졌다. 내가 느끼기로는 그림 그리는 기술은 뛰어나지만 그 속에 혼이라든가 정신을 담지 못했던 화가로 평가되었던 것 같다. 이전에 봤던 책에서도 그림은 참 화려했는데, 동시대 비평가들에게는 아주 참혹한 평을 들은 것이다. 나 역시 그 평을 봐서 그런지 그림이 화려하게는 느껴지나 어떤 호감은 느끼지 못했다. '이징'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봐야겠다.

 

 

책을 읽으면서 참 즐거웠다. 잘 몰랐던 화인 네 명을 만나는 계기도 되었지만, 무엇보다 깊이 있는 자료들에 감탄했다. 그런 자료들 덕에 정말이지 화인들의 숨결이 느껴졌다. 남긴 그림의 색깔이 저마다 다른 만큼, 화인들의 성격 또한 달랐다. 기록 하나 하나에 또 행간에 숨어있는 해석을 통해 인간 김명국, 윤두서, 조영석 그리고 정선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화인들에 향한 애정어린 저자의 시각이 잘 느껴져 역시 즐거움을 더 했다. 나의 숙원사업(?) 중 하나인 한국판 닥터후를 만든다면, 이 책에서 만난 화인들을 영상으로 그려내보고 싶다. 이제 제2권을 통해 다른 네 명의 화인을 만나보아야겠다. 그림이 단순히 2차원이 아닌 이유는 바로 그것에 있다. 획 하나에, 농담 하나에, 여백에도 화인의 혼이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미술은 그 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에 고차원의 예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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