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너 때문에 내가 알코올 중독자가 된다면 너는 술병을 치우는 대신 내 술잔에 술을 따라 줘야 해. 우린 그렇게라도 같이 있어야 해. - P152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어. - P156

아이는 물건에도 인격을 부여하지만 어른은 인간도 물건 취급한다. - P163

담아.
이 멍청아.
이젠 됐어. 넌 다 했어. 이 장례를 끝내야지. 끝내고 살아야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너도 여기 있고 나도 여기 있다. 네가 여기 있어야 나도 여기있어.
밖을 봐. 네가 밖을 봐야 나도 밖을 본다.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담아.
이 바보야. - P17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담에게 들을 과거가 없었다. 함께 겪었으니까. 겪을 때마다 감정을 공유했으니까. 그때 우리 열한 살 여름에 개천에서 같이 피라미 잡다가, 라고 담이 얘기를 꺼내면, 너 신발 한짝 떠내려가서 그거 잡는다고 우리 둘 다 죽을 뻔했을 때? 라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설명 없이도 대화는 성큼성큼 나아갔고 감정은 절로 드러나 꾸밀 필요 없었다. 침묵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았다. - 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흰밥 한 숟갈을 퍼먹고 열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을 때도 담이 생각이 났다. 저무는 낮의 노란 햇살을 봐도, 깊은 밤 골목에서 자박자박 울리는 발소리를 들어도, 느닷없이 자지가 단단해지는 밤과 새벽에도 담이 생각이 났다. 매일 밤 일기를 쓰듯 담이ㅍ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 서서 마음으로 담아 담아 불렀다. 골목에 발로 쓰는 나의 일기는 온통 담으로 채워졌다.

담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나.
내 생각을 한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나를 모를 리 없는데. - P53

하지만 담은 몰랐다. 그 밤 중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오지않았다.

담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가보다.
내 생각을 하지 않고 자나보다.
잠이 잘 오는가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담이 잘 자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역시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알 수 없었다. 담이라면 말해줄 텐데. 자기 마음을 얘기하는 방법으로 내 마음을 말해줄 텐데.

봄밤을 그렇게 통째로 날려버렸다. 서성이며 망설이며 돌아서며, 돋아난 꽃이 피고 지고 밟히는 것을 보았다. 꽃향기를 지우는 장마가 시작되던 날, 담이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을보았다. 꼭 지난밤의 나처럼 서 있었다. 문을 마주하고 선 담이 속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잘 알았기에, 다행스럽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 P54

죽으면 정말 만날 수 있나. 그렇다면 나는 얼마든지 죽겠다. 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것이 되자고 했다. - P80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 P20

언젠가는 말해줄 작정이었겠지만, 당신도 당신이 그리 느닷없이 죽어버릴 줄은 몰랐겠지.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 P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론 무경이 고모의 진짜 딸은 아니다. 너는 내 딸이구나. 그 말은 고모의 귀족 의식을 보여준다. 고모가 그 말을 했을 때 목경은 자신이 대관식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누구도 모르는 고모의 비밀원칙을 언니가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고모는 자신이 아니라 언니에게 왕관을 수여한 것이다. 내적 기준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고모의 비밀스러운 원칙을 알고 보면 고모의 가출은 다르게 보인다. 무경은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그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더없이간명하게 표현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그것은 할 수 없는 일과 다르다. 할 수는 있다. 할 수는 있는데 정말 하기 싫다. 때려죽여도 하기 싫다. 그러나 정말 때려죽이려고 달려들면 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가능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 P308

그 일을 대신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목경과 무경의 부모가 밖으로 돌았을 때, 자식을 굶겨 죽일 만큼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애들을 돌보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때, 놓아지지 않는 정신이, 최소한의 양심이 저주처럼 느껴졌을 때, 차라리 불능이길 바랐을 때, 그럴 때 나타난다는 것이, 게다가 아무 설명없이 생색 없이 철없는 가출의 형식으로 나타나 상대가 가장 바라는 것을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좋은 마음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목경은 생각했다. 메리 포핀스처럼 날아다니며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에 빠진 사람들앞에 짠, 나타나는 고모에게는 오만한 고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목경은 무수한 의도 중에서 실오라기 같은 악의를 건져올리려는 결벽증을 버린 지 오래였다. 고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사람들은 시간을 벌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이 (결코 하고 싶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로 바뀔 때까지 숨 돌릴 틈을 얻었다. - P3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