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무경이 고모의 진짜 딸은 아니다. 너는 내 딸이구나. 그 말은 고모의 귀족 의식을 보여준다. 고모가 그 말을 했을 때 목경은 자신이 대관식을 보고 있음을 알았다. 누구도 모르는 고모의 비밀원칙을 언니가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고모는 자신이 아니라 언니에게 왕관을 수여한 것이다. 내적 기준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고모의 비밀스러운 원칙을 알고 보면 고모의 가출은 다르게 보인다. 무경은 고작 열두 살의 나이에 그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더없이간명하게 표현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그것은 할 수 없는 일과 다르다. 할 수는 있다. 할 수는 있는데 정말 하기 싫다. 때려죽여도 하기 싫다. 그러나 정말 때려죽이려고 달려들면 할 수는 있는 일이다. 그것은 가능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 P308
그 일을 대신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목경과 무경의 부모가 밖으로 돌았을 때, 자식을 굶겨 죽일 만큼 정신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애들을 돌보기가 죽기보다 싫었을 때, 놓아지지 않는 정신이, 최소한의 양심이 저주처럼 느껴졌을 때, 차라리 불능이길 바랐을 때, 그럴 때 나타난다는 것이, 게다가 아무 설명없이 생색 없이 철없는 가출의 형식으로 나타나 상대가 가장 바라는 것을 해준다는 것이 고모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좋은 마음만은 아니었을 거라고, 목경은 생각했다. 메리 포핀스처럼 날아다니며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에 빠진 사람들앞에 짠, 나타나는 고모에게는 오만한 고약함도 있었다. 그러나 목경은 무수한 의도 중에서 실오라기 같은 악의를 건져올리려는 결벽증을 버린 지 오래였다. 고모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사람들은 시간을 벌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이 (결코 하고 싶어지지는 않겠지만) 그럭저럭 하기 싫은 일로 바뀔 때까지 숨 돌릴 틈을 얻었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