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밥 한 숟갈을 퍼먹고 열무김치를 우적우적 씹을 때도 담이 생각이 났다. 저무는 낮의 노란 햇살을 봐도, 깊은 밤 골목에서 자박자박 울리는 발소리를 들어도, 느닷없이 자지가 단단해지는 밤과 새벽에도 담이 생각이 났다. 매일 밤 일기를 쓰듯 담이ㅍ집으로 갔다. 대문 앞에 서서 마음으로 담아 담아 불렀다. 골목에 발로 쓰는 나의 일기는 온통 담으로 채워졌다.

담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나.
내 생각을 한다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나를 모를 리 없는데. - P53

하지만 담은 몰랐다. 그 밤 중 단 한 번도 문을 열고 나오지않았다.

담이는 내 생각을 하지 않는가보다.
내 생각을 하지 않고 자나보다.
잠이 잘 오는가보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담이 잘 자는 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다. 역시나는 내 마음을 똑바로 알 수 없었다. 담이라면 말해줄 텐데. 자기 마음을 얘기하는 방법으로 내 마음을 말해줄 텐데.

봄밤을 그렇게 통째로 날려버렸다. 서성이며 망설이며 돌아서며, 돋아난 꽃이 피고 지고 밟히는 것을 보았다. 꽃향기를 지우는 장마가 시작되던 날, 담이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는 것을보았다. 꼭 지난밤의 나처럼 서 있었다. 문을 마주하고 선 담이 속으로 어떤 말을 하고 있을지 잘 알았기에, 다행스럽기도 서운하기도 했다. - P54

죽으면 정말 만날 수 있나. 그렇다면 나는 얼마든지 죽겠다. 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것이 되자고 했다. - P80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다만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가장 가까운 감정, 우리 몸에도 마음에도 그것이 들러붙어 있었고 그것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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