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마이다네크 혹은 아우슈비츠의 어느 소각로에서 태워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아직 인간적이었다..… 전쟁이 끝나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마당에서 연을 태웠다. 더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그 어린 집시 여자가 반짝이 종이로 장식했던 긴 연꼬리와 연출도 함께.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50년대에 내 지하실은 나치 문학에 파묻혀 있었다. 동일한 주제가 반복되는 수톤이나 되는 책과 팸플릿을 나는 열성을 다해 파기했다. 내 어린 집시 여자의 감미로운 소나타에 이끌려서 착란과 황홀경에 빠져 경례를 붙이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사진이 수백 쪽에 이르는 책장을 뒤덮고 있었다. 노인, 노동자, 농부, 친위대원, 군인,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열정적인 경례를 붙였다. 나는 해방된 그단스크로 입성하는히틀러와 그의 수행원들이 내 압축 속에서 사라지도록 온전히내 일에 몰입했다. 해방된 바르샤바와 해방된 파리, 빈과 프라하로 입성하는 히틀러, 혼자 있는 시간의 히틀러, 추수감사절의 히틀러, 히틀러와 그의 경호견, 전선의 군인들을 방문중인 히틀러, 대서양 장벽을 순찰중인 히틀러, 동유럽과 서유럽의 점령 도시로향하는 히틀러, 참모부에서 지도를 들여다보는 히틀러…… 나는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 P84
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이 일을 하면서 전능의 무한한 영역에 내던져졌음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희미한 전구 불빛이 지하실을 비추었고, 녹색이나 붉은색신호가 들어오면 압축판이 전진하거나 후진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해치울 차례였다. 고된 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러, 점토처럼 변해버린 종이 더미를 무릎을 이용해 삽으로 긁어모았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물질을 마지막으로 한 삽 퍼서 던지자니, 이 도시의 하수도 깊은 곳에 버려진 시궁창 밑바닥을 긁어내는 청소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 P75
폐지 더미 속에서 희귀한 서적의 책등과 표지를 발견하는 그 놀라운 순간이 내게는 언제나 축제나 다름없었는데 말이다. 그 즉시 책을 집어들지는 않았다. 플란넬 헝겊을 집어들고 우선 내 압축기의 굴대를 닦은 뒤 내 힘을 다스리며 종이 더미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그 멋진 책을 펼쳐 들면, 제대 앞에선 신부의 부케처럼 책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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