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로운 자연이 공포를 열어 보이는 순간, 그때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모든 것이 자취를 감춘다.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 고통보다 더 끔찍한 공포가 인간을 덮친다. 이 모두가 나를 망연자실하게 만들었다. 그렇게나 시끄러운 내 고독 속에서 이 모든 걸 온몸과 마음으로 보고 경험했는데도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니, 문득 스스로가 대견하고 성스럽게 느껴졌다. 이 일을 하면서 전능의 무한한 영역에 내던져졌음을 깨닫고는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희미한 전구 불빛이 지하실을 비추었고, 녹색이나 붉은색 신호가 들어오면 압축판이 전진하거나 후진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것을 해치울 차례였다. 고된 작업도 막바지에 이르러, 점토처럼 변해버린 종이 더미를 무릎을 이용해 삽으로 긁어모았다. 축축하고 끈적거리는 물질을 마지막으로 한 삽 퍼서 던지자니, 이 도시의 하수도 깊은 곳에 버려진 시궁창 밑바닥을 긁어내는 청소부라도 된 기분이었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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