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상하게도 낫기 위해 노력한다는 건 더 자주 끝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오히려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희망과 의지를 붙잡고 앞으로 걸어가고는 있지만 사실 끝에는 무엇도 없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확인하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예감. 이야기를 끝낸 후, 지우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누구 이야기 같아?" - P108
그때 나는 지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여자에 대해. 그 사람은 복수와 음모, 비밀과 거짓말, 실수와 자책을 계속 끌어모으는 중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계속 말하다 보면, 언젠가 그건 자신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어떤 용기도 낼 수 없을 때, 결정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 P109
나는 손을 바닥에 댔다. 일어나고 싶었다. 문득,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소리는 호수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 진동이 주변을 두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수면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어떤 얼굴의 형태들이, 그리고 목소리들이 물속에서 빠르게 모였다 흩어졌다. 더 가까이 내려갔다. 그제야 알았다. 이건 울음소리도 비명도 아니었다. 이건 누군가의 ‘말‘이었다. 모두가 한탄이나 흐느낌이라 생각하고 지나치던 순간에도 쉬지 않고 털어놓던 자신의 이야기. 스스로를 구할 자신의 무엇. - P110
그러니까 그냥 계속 찾지 뭐. 문득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찬물이 몸에 닿으며 나는 금세 잊었다. 서서히 몸의 체온이 식었다. 감각이 사라지며 차츰 통증도 사라져갔다. 나는 고개를 물속에 넣었다.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으로 수면을 더듬었다. 괜찮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고, 팔을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나는 앞을 향해 헤엄쳤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차가운 촉감만은 진짜였다. 지우를 만나면 이 이야기를 해줘야겠다. 그렇게 하고 싶다. - P111
나는 인물들의 마음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다. 그들의 슬픔과 분노가 진짜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마음껏 그들의 이야기에 심취할 수 있었다. - P135
돌이켜보면 놀랍다. 그러니까 ‘단숨에 쓰는 것’ 말이다. 내게 엄청 난재능이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던 그 체험. 이제는 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직조한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새 내면에 쌓여 있던 이야기가 그저 폭발하듯 풀려나왔던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내가 뭔가를 이해했고, 받아들이려 노력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 복수를 다짐하는 마음. 나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질투하고, 원하는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고 싶은 마음. 그때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다. - P137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그저 받아 적었을 뿐이다. 평생, 머릿속에 담아왔던 어떤 장면들, 데자뷰처럼 반복되던 어떤 순간들. 그래서 나는 계속 쓴다. 내가 죽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쓴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나를 죽이고, 또 죽여서 다시는 살 수 없게만든다. 그리고 그 아이를 살려낸다. 운명이 뒤집힌 그 이야기 속에서 글을 쓰는 건 내가 아니라 그녀다. 어딘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소녀, 엄마 친구, 할머니,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
나는 그들을 통해 살아 있다.
아직은 살아 있다. - P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