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미사는 우리 집의 전통이었지만, 이제 내게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닌 보물찾기에 가까운 일이 되었다. 뒤죽박죽인 단서들을 제대로 해석하기만 하면, 내면의 문이 열리며 지혜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지혜가 언젠가 양심을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내게 부여해줄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양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이라도. - P58

"비자는 어떻게 받을 건데?"
좋은 질문이었다. 태국에 있는 버마 대사관은 국제사회의제재에 대한 보복으로 학생 비자와 여행 비자의 발급을 전부중단한 상태였다. 하지만 군부는 돈벌이가 절실했기에, 적법한 증거만 제출하면 사업 비자는 내주고 있었다. 코 모에 티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우리 모르게 랑군에서 비밀 사업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아니. 하지만 그런 사람과 연이 닿을지도 몰라." 내가 대답했다.
대릴은 내가 고등학교 졸업 논문의 자료 조사 차, 자유 버마를 위한 컨퍼런스에 참석했을 때 알게 된 영국 남자로, 나이는 30대이며 기업 금융 전문가이자 아마추어 영화감독이었다. 그는 버마에 투자하는 일본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생계가 걸려 있으니 일을 그만둘 수는 없지만, 군부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는 생각에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다고 했다. - P66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영화 제작 기술을 이용해 자유 버마 운동을 돕고 있었다. 우리는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눴다. 그것도 벌써 1년이 다 된 이야기였다. 하지만 시도해볼 만한 가치는 있을 것 같았다.
민진이 정글 끄트머리에 있는 매솟이라는 작은 마을의 공중전화로 나를 데려가주었다. 나는 대릴에게 수신자 부담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는 기적처럼 요금 부담에 동의했다.
나는 내가 누군지 상기시켜준 다음, 이렇게 물었다. "2주간 휴가를 내고 태국으로 올 생각 없어요? 나랑 결혼한 척하고 당신의 사업 비자로 같이 버마에 들어가 현 정권의 실상을 촬영하는 거예요."
대릴은 좋다고 대답했고, 나의 영원한 신용을 얻었다.
나는 오두막 동지들과 함께 자전거를 타며 촬영할 수 있게가방을 개조했고, BIC 볼펜도 몇 자루 구입했다. 나중에 해체해서 필름을 숨겨 나오기 위한 용도였다. 대릴이 도착하자 우리는 방콕 공항에서 그를 맞이해서는, 달러 몇 장만 쥐여주면 뭐든 위조해주는 카오산 로드로 곧장 데려갔다. 그리고 거기서 만든 결혼 증명서로 버마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다. 심사대 직원 앞에서 우리는 일부러 다투는 척 연기했다. "출장 가는 김에 겸사겸사 허니문이라니, 이런 사람이 또 어디 있대요." 내가 투덜거렸다. - P67

대릴이 복도 끝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우리 가이드가 저녁 식사를 하실 거냐고 묻네." 그가 말했다. 나는 점점 더 대릴이 좋아졌다. 그는 냉소적이면서도 재미있고 용감했다. 고용주의 투자 선택을 자신의 사랑과 노력으로 만회할 필요성을 느끼는 은행 직원은 드물었다. 그러면서도 드러내놓고 자랑하지 않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주최 측이 아주 세심하네요. ABC 카페래요?"
그가 빙긋 웃었다. "달리 어디겠어?"
민진의 연락망에 빨리 메모를 남겨보고 싶었다. 이 나라에온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지슬슬 확인해볼 때가 됐다.
ABC 카페는 술레 파고다와 악명 높은 트레이더스 호텔에서 겨우 몇 블록 떨어진 마하 반둘라 거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군 장성들이 중국 마약상을 만나 싱가포르 슬링을홀짝거리는 곳으로 유명했다. 외관은 낡은 서양식 살롱처럼 - P73

생겨서 보는 즉시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나는 대릴에게 말했다. 그는 우리가 앉을 테이블을 찾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진은 화장실변기의 물탱크에 메모를 남기라고 했다. 나는 종이 타월을 한장 뽑아서 몇 줄 끼적였다. 혹시라도 중간에 가로채일 경우에대비해 신분이 드러날 만한 정보는 적지 않았다. 그냥 우리는잘 있으며, 배관에 문제가 없는지 알고 싶으니 답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도자기로 된 물탱크 뚜껑을 들어 올리자, 이미 테이프로 붙여놓은 종이가 보였고,
겉면에 아마릴리스 꽃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펴서 읽어보았다.
‘감자튀김을 주문해.‘
마치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그가 가느다란 필치로 이곳에함께 있었다. 그만의 독특한 유머가 느껴졌다. 그는 자기 자신을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본격적인혁명 운동을 하는 와중에도 말이다.
우리는 지시에 따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잠시 후 한쪽에핫소스가 뿌려진 접시가 젓가락과 함께 서빙되었다. 웨이터가 나와 대릴을 번갈아 바라보며 "두 분 모두 환영합니다."라고 말해주자, 이 나라에 발을 디딘 이래 처음으로 정말 환영받는 기분이 들었다. 민 진은 이런 비밀 결사대의 안전한 기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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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다음날, 엄마가 내 옆에 와서 앉더니 로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로라네 가족이 탄 팬암 항공기가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상공에서 리비아인들에게 폭탄테러를 당했다. 할머니부터 갓난아기인 남동생까지 로라의 일가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때 나는 8살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말없이 지냈다. 머릿속이 솜뭉치로 가득 찬것만 같았다. 졸리고, 멍하고, 정신이 아득했다. 결국 보다 못한 아버지는 내게 런던 타임스를 읽어보라고 권했다. "네 친구를 빼앗아간 세력의 정체를 너도 알아둬야 해. 그럼 지금보다덜 무서울 거다." 그러자 카드보드 유령의 집에 있던 얼굴 없는 괴물이 떠올랐고, 나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는 걸 직감했다. - P33

그렇게 서서히 내 세계는 새로운 캐릭터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카다피와 대처,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이국적인 동화속의 등장인물들, 머나먼 마법 숲에 사는 마녀와 마법사, 나무꾼 같은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현실 세계로, 나의 세계로 흘러나와 내 친구를 하늘에서 잡아채갔다. 그러니 신경 써서 지켜봐야 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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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 흘러넘치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그 안에서, 나는 뜨거운 딤섬을 차마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그대로 머금고 있었다. - P240

두벌자식이 더 곱다더니 옛말이 맞다며 시부는 아이를 품에서 떼놓지 않았다. - P252

서진이 일곱살 때였나. 아이가 떡을 먹고 탈이 나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날따라 응급 환자가 많아 한시간 넘게 기다려도 차례가 오지 않았다. 창백하게 질린 아이를 품에 안고 언제 진료를 볼 수 있냐 채근하다 언성이 높아졌다. 그런 내게 부끄러우니 그만하라던 남편과 대기실 의자에 앉아 손을 모으고 기도만 하던 시모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 막막한 상황에서 홀로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는데 저 멀리서 누가 나보다 더 큰 소리로 고래고래 악을 지르며 응급실 안으로 들어왔다.
누구야! 누가 내 새끼를 기다리게 해!
의사 나오라며 포악을 부리는 시부 옆에서 나 역시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 애 죽을지도 모른다고! 빨리 들여보내줘! - P288

학을 떼고 기겁하던 남편도, 슬며시 자리를 피하던 시모도, 웅성대는 구경꾼들도 그 순간엔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시부도 나처럼 바닥에 주저앉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내 새끼 다 죽어간다, 니들 때문에 내 새끼죽는다. 미친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런 일도 있었지. 또 이런 일도 있었는데, 그리고 또...... 몽롱한 의식을 부여잡으며 시부와 내가 한편이었던 순간들을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기억이라는 건 쉽게 미화되고 변질되며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건드려 여지를 만든다는 것을, 그 가능성을 믿고 다가갔다간 금세 후회한다는 것을 일전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시부는 몇마디 말에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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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모노
성해나 지음 / 창비 / 2025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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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아니더라도 후일에는 제자에게 오욕을 뒤집어씌운 스승이라 낙인찍힐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여재화는 대장에 구보승의 이름을 적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니었으니까. 이 끔찍한 공간에 자신의 의도가 담기지 않았다고 여재화는 믿고 싶었다. 대장에 구보승의 이름을 새긴 건 그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야만이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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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한점 없이 다린 장삼, 흰 고깔, 밤새 숫돌로 날카롭게 벼린 신칼과 쌍작두. - P149

삼십년 박수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었던가. 누구를 위해 살을 풀고 명을 비는 것은 이제 중요치 않다. 명예도, 젊음도, 시기도, 반목도, 진짜와 가짜까지도.
가벼워진다. 모든 것에서 놓여나듯. 이제야 진짜 가짜가 된 듯.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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