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밤, 인곤과 길을 걸었다. 사방이 온통 번성하고 있어 빛과 차오르는 것들로 가득한 밤이었다. 그 무엇도 사그라들거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길 밖 흐린 어둠에 묻힌 것들은 머지않아 잊히고 말 것이었다. - P173

"한 명쯤은 기억하고 있어도 좋을 뻔했어."
인곤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엇을?"
"이 융성한 날들을 위해 누가 죽어야 했는지. 어떤 싸움을 했는지. 한 명쯤은 계속 곱씹고 있어도, 사로잡혀 있어도 좋지 않았겠는가? 천년왕국을 고대하며, 그것이 무엇 위에 세워지는지 이 흥청망청한 거리는 다 잊은 것 같군."
"천년이라……… 이다음 천년이라."
자은은 사람들이 잊고 잊고 또 잊는다 해도 이 활기와 온기로 가득한 거리 위로 어둠이 드리워지지 않기를 기원했다. 누구에게 기원하는지도 정하지 않은 채.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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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철 부인은 칭찬을 정확히 해서 직공들의 사기를 높여준다고 했다. 자은은 흉내를 내어볼까 했다.
"자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큰일날 뻔 했군. 자네의 눈이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자네의 손이 내가 빚지 못하는 것을 빚을 수 있어 든든하게 여기고 있네. 서라벌이든 어디든 자네가 완전히 뿌리내릴 수 있는 곳을 찾을 때까지 편히 곁에 있어주면 좋겠어."
그런데 인곤은 자은의 칭찬을 반기지 않고 뜨악해했다.
"으………… 어울리지 않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나는 설자은이 데면데면해서 마음에 드는 것이네. 잘 보관한 멥쌀처럼 습기가 없는 게 좋아. 제발 다시는 그러지 말게." - P198

"… 자네에겐 그런 사람이 있나? 그렇게 어긋난 일도하게 만들 만한 이가?"
자은이 기대하며 묻는 것 같아, 인곤은 바로 떠오른 답을 전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런 이가 있는 자가 부러움을 살 자인지, 없는 자가 두려움을 살 자인지 모르겠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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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벤 적군이....… 항상 적군은 아니었다는 것이네....."
자은과 인곤이 그 말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쟁 시기에 삼한에 없었던 그들도 그 복잡함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 함께 싸웠던 이들과 갑자기 창끝을 맞대고, 이이제이를 위해 직접 망하게 한 나라의 남은 군사를 은근히 지원하기도 했다. 더러운 전쟁이었다. 혼전 중의 혼전이었고, 엄하고 도리를 아는 사람일수록 안쪽이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는 나날이었을 것이다. 엎치락뒤치락 없이 명분이 틀림없는 싸움을, 하나의 적과 했더라면, 싸웠던 이들도 지금보다는 평안에 이를 수 있지 않았을까?
"지옥에서, 지옥으로……………" - P143

"후회는 없으십니까? 저희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하고요."
밝히지 않는 것이 나았을 수 있었다. 업화를 불가해하고 불가역적인 것으로 두고, 묻고 지나갔다면.
"잃은 것을 잃은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괴롭지요. 무엇을 잃었는지 아는 쪽이 낫습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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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리 항해의 객이란 하는 일 없이 혼곤할 뿐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니,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은 자가 관 속에서 몇 년 만에 눈을 뜨면 같은 기분일까? 막막함에 울음이 복받쳐올랐지만 꾹 눌렀다. - P19

먹보랏빛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죽은 자들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은이 서늘한 손으로 살아 있는 자은의 손등을 두드려주는 것만 같았다. 원래 말이 많은 형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로 거의 같았어? 한쪽은 차분했고 한쪽은 나무칼을 쥔 채 외쳤는데 우리가 거의 같을 리가 있었어? 죽은 형제는 대답이 없었다. - P30

산아가 지닌 모란 같은 화려함은 다른 사람의 색까지 빨아들이곤 하니까. 자은은 만약 여인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았더라면, 물론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마음이 잔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드러진 꽃 같은 사람의 그늘에서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으며 편하게 숨을 쉬었을 것이다.
눈길을 끌고 싶은 욕구 따위는 늘 없었다. 거기까지 이르니,
산아는 얼마나 매일이 쉽지 않을지 헤아리게 되었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은 어떤 종류의 포기일지도 몰랐다. 볼 테면 보시오, 무늬 비단을 감상하듯 보시오, 하는 속마음이 비친 게 아닐까?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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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물론 문제는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았으며, 얘기를 끝낸 시점에서도 어쩌면 사태는 똑같을지도 모른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요양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기 요양을 위한 사소한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P10

적어도 내가 여기서 하는 얘기는 현재의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덧붙일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도 생각하고 있다. 잘만 되면 먼 훗날에, 몇 년이나 몇십년 뒤에 구원받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코끼리는 평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더 아름다운 말로 세계를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이다. - P11

만약 당신이 진정한 예술이나 문학을 원한다면 그리스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 된다. 참다운 예술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노예 제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가 밭을 갈고 식사를 준비하고 배를 젓는 동안, 시민은 지중해의 태양 아래서 시작에 전념하고 수학과 씨름했다. 예술이란 그런 것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 시에 부엌의 냉장고를 뒤지는 사람은 이 정도의 글밖에는 쓸 수 없다.
그게 바로 나다. - P15

"생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 물론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약간의 머리가 필요하지만, 계속 부자로 있기 위해서는 아무것도필요하지 않아. 말하자면 인공위성에 휘발유가 필요 없는 것과같은 논리지, 빙글빙글 같은 곳을 돌기만 하면 되는 거야. 하지만 나나 너는 그렇지가 않지. 살아가기 위해서는 계속 생각해야하거든. 내일 날씨에서부터 욕조의 마개 사이즈까지 말이야. 안그래?" - P19

"하지만 자동차는 이제 못 쓰게 됐어."
"신경 쓸 것 없다니까. 자동차는 다시 돈 주고 사면 되지만 행운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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