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리 항해의 객이란 하는 일 없이 혼곤할 뿐이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눈을 뜨니, 갑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죽은 자가 관 속에서 몇 년 만에 눈을 뜨면 같은 기분일까? 막막함에 울음이 복받쳐올랐지만 꾹 눌렀다. - P19

먹보랏빛 허공을 바라보고 있자니, 죽은 자들이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은 자은이 서늘한 손으로 살아 있는 자은의 손등을 두드려주는 것만 같았다. 원래 말이 많은 형제는 아니었다. 우리가 정말로 거의 같았어? 한쪽은 차분했고 한쪽은 나무칼을 쥔 채 외쳤는데 우리가 거의 같을 리가 있었어? 죽은 형제는 대답이 없었다. - P30

산아가 지닌 모란 같은 화려함은 다른 사람의 색까지 빨아들이곤 하니까. 자은은 만약 여인의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앉았더라면, 물론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오히려 마음이 잔잔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흐드러진 꽃 같은 사람의 그늘에서 누구의 눈길도 끌지 않으며 편하게 숨을 쉬었을 것이다.
눈길을 끌고 싶은 욕구 따위는 늘 없었다. 거기까지 이르니,
산아는 얼마나 매일이 쉽지 않을지 헤아리게 되었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은 어떤 종류의 포기일지도 몰랐다. 볼 테면 보시오, 무늬 비단을 감상하듯 보시오, 하는 속마음이 비친 게 아닐까?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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