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네가 읽은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었을 거야. 기대할 거라고는 한 가지도 없는. 저 밑바닥 아래가 더 궁금해지지도 않을 그런."
재은은 대답이 없었다. 그게 부정을 의미하지 않음은 선우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들어서 씁쓸해질 대답을 자비롭게 생략해주는 거라 생각했다.
"그게 늘 무서웠거든. 나는."
상대방에게 형편없는 나를 들키는 일이.
김선우는 보이는 것만큼 다정하지도, 견고하지도 않은 인간인것을. 그런데 그런 약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꿰뚫어 보고 말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라니,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는 한 예정된 실패였다. - P391

‘너는 날 사랑한 적이 없었을 테니, 이 이별이 그렇게 아픈 건아닐 거야‘라는 말을 그 전에 이미 한 차례 들었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반복이었다. - P391

"그리고 네 안부라면 언제든지 물어도 괜찮다고 했어."
첨언도 평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섞여 있었다.
언제든지.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은 영원에 가까운 단어가 그 느슨한 시간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선언할 수 있는.
자신을 위한, 이보다 더 상냥하고도 담대한 변호는 없을 것 같았다.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선우는 오늘 정의하지 못했던 제 마음의 표지를 깨달아 읽었다. 두려움과 경계심은 아니지만 내내 사라질 줄은 몰랐던 긴장, 그리고 초조함.
그건 다시는 한재은을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었다. - P39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속에 아버지가 있었다. 행방불명인 아버지가 내 속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 P20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많은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이 점차 크게 그리고 현실적으로들리기 시작했다. 그 옛날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목숨 건 경연을 벌였던 콜로세움이 이런 분위기였을까? - P78

수만 명이 모여 출연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려 애쓰는, 단두대와 같은 무대에 오르는 일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 P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이 빈 자루는 제대로 설 수가 없는 법이지." - P14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펄롱으로 하여금 자기가 더 나은 혈통 출신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서, 그 세월 내내 펄롱의 곁에서 변함없이 지켜보았던 네드의 행동이, 바로 나날의 은총이 아니었나. 펄롱의 구두를 닦아주고 구두끈을 매주고 첫 면도기를 사주고 면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던 사람이다. 왜 가장 가까이 있는 게 가장 보기 어려운 걸까? - P111

모든 게 펄롱이 두려워하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다만 아이가 이번에는 펄롱의 외투를 순순히 받아 들었고 기꺼이 부축을 받고 밖으로 나왔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 P116

"이제 거의 다 왔어." 펄롱이 기운을 돋웠다. "조금만 가면 집이야."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펄롱은 자신의 어떤 부분이, 그걸 뭐라고 부르든-거기 무슨 이름이 있나?- 밖으로 마구 나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 P120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P120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이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 P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무적인 공무원‘이 영혼 없는 책상의 일부처럼 보일지라도 사무적이란 단어는 공무원을 지켜준다. 복잡한 법과 절차에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민원을 해결하는 힘이 된다. 막말을 들으면서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은은한 비누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건 땀 냄새가 나는 사람이건 누구든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게 한다. 방금 다녀간 민원인의 복잡한 가정사에 호들갑을 떨지 않게 하고, 진상 민원인의 욕설과 폭력에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고 벨을 누르면서 다음 민원을 처리하게 한다.
사무적으로 일하는 데 성공한 날은 감정 소모가 덜하고덜 지쳤다. 애석하게도 나는 자주 미소 짓고, 꽤 친절했으며, 툭하면 마음이 아팠다. 잠깐 스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고 그들이 흘리고 간 인생의 작은 조각들을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 공무원 생활 내내 더 사무적이려고 노력해야 했다. - P21

신기하게도 사무적인 시간은 대부분 마음에 남지 않고 곧바로 사라졌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들은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들이다. 집이 어딘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주민센터에 가면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던 치매 할아버지의 아이같이 맑은 눈빛. 꼬부랑글씨가 부끄럽다며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이름을 써 내려가는 할머니의 필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첫 부임지인 동네성당에 전입신고를 하러 온 젊은 신부님의 투명한 얼굴. 긴 시간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서류를 대신 발급받으며 삶의 고단함에 한숨짓던 아주머니의 깊은 주름. ‘사무적‘이라는 방패를 내려놓은 채 걱정하고 응원하며 마음을 내어주었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기억의 선명도로만 시간의 가치와 의미를 따진다면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이야말로 제대로 살았다고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그 시절의 나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무적으로 일해, 더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 P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