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적인 공무원‘이 영혼 없는 책상의 일부처럼 보일지라도 사무적이란 단어는 공무원을 지켜준다. 복잡한 법과 절차에 골머리를 썩이면서도 민원을 해결하는 힘이 된다. 막말을 들으면서도 버틸 수 있게 만든다. 은은한 비누 향기를 풍기는 사람이건 땀 냄새가 나는 사람이건 누구든 공평하게 대할 수 있게 한다. 방금 다녀간 민원인의 복잡한 가정사에 호들갑을 떨지 않게 하고, 진상 민원인의 욕설과 폭력에 경찰이 출동하는 소동이 벌어져도 멈추지 않고 벨을 누르면서 다음 민원을 처리하게 한다.
사무적으로 일하는 데 성공한 날은 감정 소모가 덜하고덜 지쳤다. 애석하게도 나는 자주 미소 짓고, 꽤 친절했으며, 툭하면 마음이 아팠다. 잠깐 스치는 사람들의 삶이 궁금했고 그들이 흘리고 간 인생의 작은 조각들을 오래 기억했다. 그래서 공무원 생활 내내 더 사무적이려고 노력해야 했다. - P21
신기하게도 사무적인 시간은 대부분 마음에 남지 않고 곧바로 사라졌다.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들은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들이다. 집이 어딘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주민센터에 가면 집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던 치매 할아버지의 아이같이 맑은 눈빛. 꼬부랑글씨가 부끄럽다며 볼펜을 쥔 손에 힘을 주고 한 자 한 자 정성껏 이름을 써 내려가는 할머니의 필체.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첫 부임지인 동네성당에 전입신고를 하러 온 젊은 신부님의 투명한 얼굴. 긴 시간 병석에 누워 있는 남편의 서류를 대신 발급받으며 삶의 고단함에 한숨짓던 아주머니의 깊은 주름. ‘사무적‘이라는 방패를 내려놓은 채 걱정하고 응원하며 마음을 내어주었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기억의 선명도로만 시간의 가치와 의미를 따진다면 사무적이지 못했던 시간이야말로 제대로 살았다고 할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내가 그 시절의 나에게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사무적으로 일해, 더 철저하게 사무적으로!" -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