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네가 읽은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었을 거야. 기대할 거라고는 한 가지도 없는. 저 밑바닥 아래가 더 궁금해지지도 않을 그런."
재은은 대답이 없었다. 그게 부정을 의미하지 않음은 선우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들어서 씁쓸해질 대답을 자비롭게 생략해주는 거라 생각했다.
"그게 늘 무서웠거든. 나는."
상대방에게 형편없는 나를 들키는 일이.
김선우는 보이는 것만큼 다정하지도, 견고하지도 않은 인간인것을. 그런데 그런 약점을 누구보다 빠르게 꿰뚫어 보고 말 사람을 곁에 두는 일이라니, 두려움을 버리지 못하는 한 예정된 실패였다. - P391

‘너는 날 사랑한 적이 없었을 테니, 이 이별이 그렇게 아픈 건아닐 거야‘라는 말을 그 전에 이미 한 차례 들었어도 변하는 건 없었다. 반복이었다. - P391

"그리고 네 안부라면 언제든지 물어도 괜찮다고 했어."
첨언도 평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평범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섞여 있었다.
언제든지.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은 영원에 가까운 단어가 그 느슨한 시간을 감당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선언할 수 있는.
자신을 위한, 이보다 더 상냥하고도 담대한 변호는 없을 것 같았다.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선우는 오늘 정의하지 못했던 제 마음의 표지를 깨달아 읽었다. 두려움과 경계심은 아니지만 내내 사라질 줄은 몰랐던 긴장, 그리고 초조함.
그건 다시는 한재은을 잃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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