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전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어딘지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일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동하는 중‘이라는 안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이동하지 않아도 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안도, 그러니까 속 편하게 휴대폰을 보거나 잘 수 있다. 대기실 같은 곳도 그렇다. 햇살조차 차가운 방에서 코트를 껴입고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에는 때때로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따스한 다정함이 있다. 만약 우리 집 소파였다면, 내 체온과 냄새가 스며든 담요 속이라면 달라진다.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자더라도 해가 저물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마음 어딘가에 새까만 초조함이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 - P83

한숨은 먼지처럼 거실에 쌓이고, 훌쩍이는 울음은 마룻바닥 틈이나 장롱 표면에 스며들었다. 난폭하게 잡아끈 의자나 문 여닫는 소리가 퇴적되고 이 가는 소리나 잔소리가 축축하게 계속 떨어지면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생기며 집은 조금씩 낡아가는지도 모른다.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집은 오히려 붕괴를 갈망한다. 할머니의 부고는 바로 그럴 때 들렸다. - P85

최애는 내가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업이었다. - P116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최애의 약동하는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쫓으려고 춤추는 내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외쳐, 외쳐, 최애가 온몸으로 말을 건다. 나는 외친다. 소용돌이치던 무언가가 갑자기 풀려나 주변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가신 내 목숨의 무게를 통째로 짓뭉개려는 것처럼 외친다. - P117

그래도 좀 더 깊은 곳에서 그 사실과 내가 연결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그 눈동자에 억눌렀던 힘을 분출해 공적인 장소임을 잊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려고 한 순간이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내 몸에 가득 차올랐다. - P130

항상 최애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는 나는 이인분의 체온과 호흡과 충동을 느껴왔다. 개에게 그림자를 물려 울던 열두 살 소년이 생각났다. 줄곧, 태어나서지금까지 내 살이 무겁고 성가셨다. 이제는 살이 전율하는 대로 내가 나를 부수려고 했다.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내가 엉망진창을 만들고 싶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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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홍대까지의 길은 어찌나 멀었는지, 한번 나가려면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주차장길에 노브레인 멤버들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 P16

안온하고 좁은 세계에서 성장은 유예되고 만다. - P30

여하튼 사랑할 수 없는 가족들을 사랑할 필요 없다는 새로운 지침은 수미에게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어떤 해방감을 느낀 수미는 해방된 모든 사랑을 다 민웅이에게 쏟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울 만도 했을 텐데, 민웅이는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랬을 것이, 그 무렵엔 누구나 민웅이를 사랑했다. 민웅이는 아무 방어도하지 않고누구에게나 곁을 쉽게 주었고, 그래서 그 곁은 360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의 골든 보이였다. 나나 송이조차도 가끔 민웅이랑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걸 좀 과시하고싶어질 때가 있었다. 때 탄 초록 줄 버스가 파주 왕자의 마차였다. - P31

"하지만 왠지 책꽂이가 하나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의 머릿속은 건강할 거 같아."
주연이가 말도 안 되는 부러움을 표했을 때 처음에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했고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주연이나 나나 머릿속 건강은 무리한 바람이 되어버렸다. 주연이는 책꽂이 사이에서 태어났고 책꽂이 사이에서 죽을 것이다. 벗어나기는 애초에 불가능했고 출판사에 취직한 후로는 더더욱 물 건너갔다. 증식하는 책들을 보면 월급 대신 책을 받는 게 분명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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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는 빛났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계속 몰아붙인 사람만이 지니는 빛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어른들만 있으니까 안색을 살펴야 했고, 강제로 연예계에 들어왔을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시기도 있었는데, 열여덟 살 때였나, 아이돌로서 무대에 처음 섰을 때 은색 테이프가 이렇게 터지는 거예요. 공연장은 환성으로 가득한데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더니,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건 하고야 말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언젠가 이렇게 말한 그 순간부터 최애는 분명 스스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P67

최애는 반짝반짝 빛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면도 있다.
단정 짓는 말투여서 오해를 사는 일이 많은 것. 분위기를 맞추느라 입술을 올리고 있을 때가 많지만 정말로 기쁠 때는 얼굴 안쪽에서부터 억누르지 못하고 웃는 것. 토크쇼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예능 방송에서 말하는 건 어색한지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 한번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페트병의 뚜껑을 안 열고 물을 마시려고 한 뒤로 허당 캐릭터에 조금씩 재미를 붙인 것. 셀카는 절망적인 각도에서 찍으면서(얼굴이 잘생겨서 그래도 괜찮지만) 사물은 잘 찍는 것. 최애의 전부가 사랑스러웠다. 최애라면 모든 걸 바치고 싶다. 모든 걸 바치겠다니,
유치한 연애 드라마 대사 같지만 나는 어디엔가 최애가 존재하고 그 최애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이를테면 가쓰 씨나 사치요 씨가 하는 ‘현실에 있는남자를 봐야지‘ 같은 말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 P67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 P69

문득 나는 이 괴로움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서히, 일부러 육체를 몰아붙여 깎아내려고 기를 쓰는 자신, 괴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체력과 돈과 시간, 내가 지닌 것을 잘라버리며 무언가에 파고든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정화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괴로움과 맞바꿔 나 자신을 무언가에 계속 쏟아붓다 보니 거기에 내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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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이에요, 정확히?" 그녀가 물었다.
"서른넷." 그가 대답했다. "그게 문제가 되나?"
그가 그녀 옆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됐어. 당신한테 이 얘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어서." 그가 몸을 돌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그녀는 민달팽이가 되어 그가 소금을 부어대는 바람에 그의 입맞춤으로 흐물흐물 해체되어버리는 기분이었다. - P49

그녀는 스물네 시간 동안 잤다. 그러고는 일어나 식당에 가서 와플을 먹었고 넷플릭스에서 탐정물을 몰아서보았으며 그녀가 뭔가 하지 않아도 그가 사라져버릴 희망적인 가능성, 어떻게든 그가 사라지기를 바랄 수 있는희망적인 가능성을 그려보려 애썼다. 저녁식사를 막 마쳤을 때 그에게서 다시 문자메시지가 왔고 내용은 레드바인스에 관한 악의 없는 농담이었다. 그 어떤 일을 놓고 봐도 너무 지나친 감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살갗에 뭔가스멀스멀 기어가는 듯한 혐오감이 밀려와 바로 메시지를지워버렸다. 그녀는 그에게 적어도 이별 통보 메시지 정도는 보내줘야 한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적절하지않으며 유치하고 잔인한 짓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또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경우 그가 알아차릴 때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문자메시지가오고 또 올 것이며 아마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 P49

다음 날이 지날 때까지 그녀는 자신이 자꾸 뭔가를 그리워하며 회색의 몽롱한 기분에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녀가 그리워하는 것이 로버트라는 것을, 실재하는 로버트가 아니라 휴가 기간 동안 주고받은 그 모든 문자메시지의 저편에 있다고 상상했던 그 로버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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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먼저 느낀 것은 통증이었다. 순간적으로 깊이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 그다음엔 밀쳐졌을 때 오는 충격과도 비슷한 통증. 창틀에 손을 올린 소년이 방 안으로 몰래 들어와 짧은 부츠를 신은 발끝을 달랑달랑 흔들었을때, 그의 작고 뾰족한 부츠 끝이 내 심장을 파고들더니 무심하게 걷어쳤다. - P15

심하게 걷어찼다. 그 통증이라면 잘 알고 있다. 고등학교1학년 때의 나에게 통증이란 이미 오랜 세월 동안 내 살속에 익숙하게 웅크리고 있다가 이따금 생각났다는듯이저릿저릿할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넘어지기만 해도 자연히 눈물이 나던 네 살 때처럼 아팠다. 하나의 통점으로부터 쫙 퍼지듯이 육체가 감각을 되찾았고, 조악한 영상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으로 세상이 선명해졌다. 초록색의 자그마한 몸이 여자아이가 누운 침대로 팔랑팔랑달려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흔든다. 얘, 하는 사랑스럽고 맑은 목소리가 꿰뚫고 지나가자 피터 팬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분명 그날 내 머리 위를 날아다닌 그 남자아이였다. - P16

피터 팬은 시큰둥하고 건방져 보이는 눈을 반짝반짝빛내며 매번 열의를 담아 호소하듯이 대사를 외쳤다. 어떤 대사든 똑같이 발음했다. 억양도 없고 동작도 과장됐지만, 숨을 들이마시고 오로지 목소리를 내는 데만 열중하는 그처럼 나도 똑같이 숨을 들이마시고 거칠게 내뱉었다. 그와 하나가 되고 싶어 하는 나를 깨달았다. - P16

그가 마구 뛰자 운동 부족인 내 새하얀 허벅지가 안쪽에서부터 경련했다. 개가 그림자를 물어뜯었다고 우는 그를 보자 내게 전염된 슬픔까지 끌어안고 싶었다. 유연함을 되찾기 시작한 심장은 흐르는 피를 무겁게 밀어내어 굽이치며 뜨거운 기운이 돌게 했다. 밖으로 채 발산하지 못한열기가 움켜쥔 손이나 오므린 허벅지에 고였다. 그가 무턱대고 가는 칼을 휘두르고, 궁지에 몰리고, 그의 옆구리에 상대방의 무기가 스칠 때마다 내 장기에 섬뜩하게 칼날이 닿는 기분이었다. 배 끄트머리에서 그가 후크 선장을 바다로 떠밀고 고개를 든 순간, 어린아이답지 않은 그 냉정한 시선에 흥분해 떨림이 등줄기를 타고 내달렸다.
우아아, 얼빠진 혼잣말이 나왔다. 미쳤다. 대박이다, 일부러 머릿속으로 말해봤다. 이 아이라면 틀림없이 선장의 왼손을 잘라 악어에게 먹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쳤다, 대박이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큰 소리로 뱉었다. 들떠서 "네버랜드에 가고 싶다"라고 말했더니 나도 모르게 진심이 됐다. - P17

푸른 하늘과 구름과 파스텔 톤 무지개가 있는꿈속 같은 세트로 끌려갔는데, 어른들이 돌아다니는 곳은 어두웠고, 새까만 촬영 장비들 너머에서 물떼새 무늬원피스를 입은 어머니가 이렇게...... 손을 가슴 앞에서흔들었어요. 겨우 5미터 거리였지만 꼭 작별 인사 같아서울 뻔했는데 곰 인형이 이렇게, 아세요?"
"아, 슈왓치* 말이죠. 라디오니까 몸은 그만 움직일래요?"
"그러네.(웃음) 아무튼 곰 인형이 그렇게 하면서 반짝이는 새까만 두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거예요. 나는 울고 싶었는데 웃었어요. 곰 인형 눈에 비친 내 웃는 얼굴은 그야말로 완벽해서, 그때부터 매번 그 곰 인형이 같은동작으로 나를 웃겨줬어요. 그때 깨달았죠. 아, 만들어낸웃음인 걸 아무도 모르는구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하나도 전달되지 않는구나." - P25

"아니, 가끔 있어요. 언제부터 좋아했다거나 몇 년 전부터 응원했다거나 근황 보고 같은 자기 이야기만 잔뜩 적은 편지를 보내는 팬이요. 기뻐요, 기쁘긴 한데 왠지 심리적인 거리가...."
"그야 팬이 어떻게 알겠어요. 항상 우에노 씨를 보고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고 곁에 있는 사람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죠. 대화하다가도, 지금 이 녀석 내가 하는 말이 뭔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네 싶어요."
"앗, 설마 나도 그럽니까?"
"그게 아니라...... 아니, 모르겠네. 이마무라 씨는 적당히 칭찬하는 습관이 있잖아요."
"심한데? 나는 진심이라고요, 언제나.(웃음)"
"죄송, 죄송합니다.(웃음) 아니, 그러니까 가사를 쓰는지도 모르겠어요. 어쩌면 누구 한 사람쯤은 알아줄지도 모르니까, 뭔가 간파해줄 지도 모르니까요. 안그러면 못 버텨요, 무대에 서는 거요." - P26

눈을 떴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비로 인해 회색빛으로 자욱했다. 어두운 구름은 해변 가까이 서 있는 집들을 감추었다. 최애의 세계에 닿으면 보이는 세상도 달라진다. 나는 창문에 비친 어둡고 따뜻해 보이는 나의 입속 건조한 혀를 보며 소리 없이 가사를 흥얼거렸다. 이러면귀에서 흐르는 최애의 목소리가 내 입술에서 흘러나오는기분이 든다. 내 목소리에 최애의 목소리가 겹치고, 내 눈에 최애의 눈이 겹친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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