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이 모두 정리되면 넌 누구를 택할 거지?
아주 짧은 순간, 그녀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타이핑을 이어갔다.
-글쎄. 난 아직 석진환이라는 사람과 다시 시작할지도 결정 못 했는데.
-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왜 그걸 나한테 물어? 애초에 날 떠난 건 너희였는데.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당황한진환은 허겁지겁 변명을 찾아야 했다.
- 그때 그랬던 건…날 위해 떠났다거나, 놓아준 거라거나 그런 소릴 할 거면 그냥 입 닫아. 진부한 연애 이야기로 흘러가는 건 딱 질색이니까.
그는 하려던 말을 집어넣었다.
-그냥 이것 하나만 알아줬으면 해. 우리 사이에서 있었던일들, 그때의 감정들, 우리 관계를 가장 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라는 거.
여울은 그 말을 읽자마자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 깔깔거린 후에야 호흡을 되찾은 그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무슨 선거 출마하니?" - P2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느낌, 너무 그리웠어."
"당신이 그 명함의 주인인가요?"
그가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크게 실망한듯,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일렁였다. 나는대체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었지? 왜 내 눈앞에 찾아와서 그런표정을 짓는 거야?
"우리가 대체 무슨 사이인 거죠?"
"그걸 지금부터 확인하려고."
여울이 그의 몸에 완전히 올라앉아 입술로 입술을 덮었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그녀에게 진환은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다. 그가 몸을 움직이려 할 때마다 그녀는 그의 어깨를 억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가만 좀 있어. 네가 뭘 하려고 할 때마다 걔가 아니라 딴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그는 마치 장난감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에게 전부를 맡겼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그녀에게 맞춰주고 있는지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떼고 말했다.
"역시 느낌이 달라."
"뭐가 어떻게 다르단 겁니까?" - P166

"네가 좋은 선생님을 붙여줘서 말이지."
"그래? 좋겠어, 아주."
푹. 미진이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넣었다. 익숙한 위치에서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익숙한 각도로 칼날을 비틀며 그에게 속삭였다.
"그거 알아? 지금까지 내가 널 몇 번이나 죽이고 살렸는지다 세지도 못한다는 거."
역시 너였구나.
칼날이 빠르게 미끄러지는 순간, 진환은 비로소 자신의 기억이 무엇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사고 이전의 기억도, 사고 당시의 기억도 아니었다. 미진은 배양수조로 그를 살려내고 죽이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분이 풀릴 때까지 그의 폐를 도려내고 또 도려냈다. 기억이 또렷이 새겨질 정도로, 찔린횟수와 위치마저 기억할 정도로.
도대체 나는 몇 번째 석진환이었을까.
"이 새끼 저녁 때까지 살려 놔. 다시 죽여버릴 거니까."
미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정장들이 쓰러진 그의 몸을검은색 시체 가방에 집어넣었다. 천천히 지퍼가 닫히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전부 계획대로였다. - P1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해봐. 내가 왜 이 삶을 지켜야 하는 거야? 너는 그렇게 쉽게 도망쳐버리고, 왜 내가 이 집에 남아서 더러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건데? 나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져본 기억이 없어. 가진 적이 없으니 잃어도 전혀 아쉽지가 않아. 트라이플래닛 같은 거 나한텐 필요 없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살아남는 거야.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싶지 않아.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기억하는 단 하나뿐인 기억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뉴런 속에 새겨진 유일한 흔적에 집착적으로 매달렸다. 어쩌면 그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인지도 몰랐다.
‘아직 안 끝났어, 겁쟁아.‘
분명 미진의 목소리였다. 기억 속에서 미진은 그의 가슴에칼을 찔러넣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독특하게 말려 올라가는 그흉측한 입꼬리. 푸른 눈동자. 검붉게 물든 입술, 매끄럽게 폐가갈라지는 예리한 통증, 마치 방금 전의 일인 것처럼 사소한 디테일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칼날이 지나간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다음엔?
더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부재(不在感)에 다다른 순간, 섬뜩한 소름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는 또 한번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석미진. 네가 날 죽인 거지? - P118

"자, 한번 상상해보시오. 손가락이 잘려서 손가락을 기계로바꿨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팔을 바꿔도, 심장을 바꿔도 마찬가지요. 그렇게 하나씩 바꿔나간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일은 결코 없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변화‘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동일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오.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그 안에 남아 바뀌지 않고 지속하는 본질은 분명 존재하오. 아무리 몸이 바뀌었어도 회장은 분명 지금도 회장이오.
뇌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소. 천억 개나 되는 뉴런 중 하나를 인공세포로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뉴런이란 그저 On, Off가 전환되는 단순한 스위치에 불과하니까. 하나를 바꿔서 문제가 없다면 두 개를 바꿔도 문제는 없을것이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간다면,
회장의 정신은 결코 변질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오. 실리카 치료는 뇌를 전자칩으로 바꾸는 시술이 아니오. 회장의 마음을 복잡한 프로그램 코드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교수가 설명을 마쳤지만, 진환은 아무 말이 없었다. - P120

어릴 적엔 명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안다.
그건 자신이 만들었던 배와 똑같은 배가 아니었다. 아버지에의해 바닥에 던져진 순간 그가 만든 배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그건 엄마가 만든 배일 뿐이었다.
너는 엄마가 만든 두 번째 배야. 그는 또 다른 자신을 향해비꼬듯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비아냥은 똑같이 자신에게도 날아와 꽂혔다. 그럼나는 첫 번째 배가 맞는 건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블록을 새것으로 바꿔 끼워버린 나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 P124

오르가슴… 느껴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그녀 눈 아래의 단자에 닿자 접촉 회선을 통해 전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BMI큐브와 내 감각을 페어링 할 거야. 눈 감아." - P135

진환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여울의 몸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온전히 전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호흡. 입안에 남은 커피의 잔향. 꿀꺽 삼킨 침을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습기. 음ㅡ 하고 허밍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 입술을 핥는 혀의 미끄러움. 그녀의 피부가 티타늄몸체에 닿을 때의 소름 끼치는 차가움…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검지와 중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진환은 수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치마 안쪽 깊은 곳을 향했다. 손끝이 닿자 그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부끄러웠다. 그녀의 손길이 미끄러지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로 살갗이 녹아내렸다. 해방. 억눌러온 걱정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마음을 다해 여울을 끌어안았다.
"괜찮지? 어차피 망가진 몸이니까."
여울이 갑자기 옆구리의 패널을 뜯어내고 전선 다발 사이로쑥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진환은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금 전까지 몸을 쓰다듬던 손이 그의 내부를 엉망진창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감각 신호를 전달하는 회로가 뒤엉키며 온몸을망가뜨릴 정도로 강렬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새로운자극에 눈을 뜬 진환은 부끄러움도 잊고 소리치며 몸을 떨었다.
한 몸으로 연결된 여울 또한 그가 느끼는 감각을 함께 느꼈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도 흐느끼듯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흥분이 한껏 고조될 즈음, 그녀는 진환의 머리채를 붙잡아 거칠게 허벅지사이로 밀어 넣었다.
꼭 달라붙은 몸이 소파 위로 기울며 천천히 스러졌다. 누적된 긴장에 지친 탓인지, 그녀는 금세 잠이 들었다. 진환은 입고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불규칙한 물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때 그 순댓국집에서 아줌마가 노래한 없어지고와 사라지고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사라진다는 것은부재하는 대상의 강력한 능동이 감지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매기는 지금 내 곁에서 사라지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저 욕실의 자락자락한 물소리가 여전히 매기를 좀 전에 끝난 우리의 섹스를 사랑해, 라는 말과 시간을 간신히 환기하고있는데도. - P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크릿 허즈밴드
김류현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하는 싱글녀, 유부녀, 워킹맘들을 위로하는 완벽한 판타지. 우리집에 이런 남자 하나 들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