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해봐. 내가 왜 이 삶을 지켜야 하는 거야? 너는 그렇게 쉽게 도망쳐버리고, 왜 내가 이 집에 남아서 더러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건데? 나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가져본 기억이 없어. 가진 적이 없으니 잃어도 전혀 아쉽지가 않아. 트라이플래닛 같은 거 나한텐 필요 없단 말이야. 내가 원하는 건 그냥 살아남는 거야. 다시는 죽고 싶지 않아.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싶지 않아. 그는 눈을 감고 자신이 기억하는 단 하나뿐인 기억을 상상하고 또 상상했다. 뉴런 속에 새겨진 유일한 흔적에 집착적으로 매달렸다. 어쩌면 그 기억이야말로 자신의 유일한 정체성인지도 몰랐다. ‘아직 안 끝났어, 겁쟁아.‘ 분명 미진의 목소리였다. 기억 속에서 미진은 그의 가슴에칼을 찔러넣었다. 새하얀 피부 위로 독특하게 말려 올라가는 그흉측한 입꼬리. 푸른 눈동자. 검붉게 물든 입술, 매끄럽게 폐가갈라지는 예리한 통증, 마치 방금 전의 일인 것처럼 사소한 디테일까지 선명하게 떠올랐다. 칼날이 지나간 위치까지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그 다음엔? 더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명할 수 없는 서늘한 부재(不在感)에 다다른 순간, 섬뜩한 소름이 온몸을 관통했다. 그는 또 한번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다.
석미진. 네가 날 죽인 거지? - P118
"자, 한번 상상해보시오. 손가락이 잘려서 손가락을 기계로바꿨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팔을 바꿔도, 심장을 바꿔도 마찬가지요. 그렇게 하나씩 바꿔나간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이 되는일은 결코 없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변화‘라는 단어 안에는 이미 ‘동일성‘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는 것이오. 아무리 변화하더라도 그 안에 남아 바뀌지 않고 지속하는 본질은 분명 존재하오. 아무리 몸이 바뀌었어도 회장은 분명 지금도 회장이오. 뇌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소. 천억 개나 되는 뉴런 중 하나를 인공세포로 바꾼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소. 뉴런이란 그저 On, Off가 전환되는 단순한 스위치에 불과하니까. 하나를 바꿔서 문제가 없다면 두 개를 바꿔도 문제는 없을것이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간다면, 회장의 정신은 결코 변질되지도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오. 실리카 치료는 뇌를 전자칩으로 바꾸는 시술이 아니오. 회장의 마음을 복잡한 프로그램 코드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오." 교수가 설명을 마쳤지만, 진환은 아무 말이 없었다. - P120
어릴 적엔 명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으나, 지금은 안다. 그건 자신이 만들었던 배와 똑같은 배가 아니었다. 아버지에의해 바닥에 던져진 순간 그가 만든 배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도 그건 엄마가 만든 배일 뿐이었다. 너는 엄마가 만든 두 번째 배야. 그는 또 다른 자신을 향해비꼬듯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그 비아냥은 똑같이 자신에게도 날아와 꽂혔다. 그럼나는 첫 번째 배가 맞는 건가? 하나도 남김없이 모든 블록을 새것으로 바꿔 끼워버린 나는 여전히 똑같은 사람이 맞는 건가? - P124
오르가슴… 느껴볼래?" 그녀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가락이 그녀 눈 아래의 단자에 닿자 접촉 회선을 통해 전류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네 BMI큐브와 내 감각을 페어링 할 거야. 눈 감아." - P135
진환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는 여울의 몸속에서 눈을 떴다. 그녀가 느끼는 모든 감각이 온전히 전해졌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 코끝을 스치는 그녀의 호흡. 입안에 남은 커피의 잔향. 꿀꺽 삼킨 침을따라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습기. 음ㅡ 하고 허밍이 안쪽에서 울리는 소리. 입술을 핥는 혀의 미끄러움. 그녀의 피부가 티타늄몸체에 닿을 때의 소름 끼치는 차가움…그녀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검지와 중지를 들어 까딱거렸다. 진환은 수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천천히, 치마 안쪽 깊은 곳을 향했다. 손끝이 닿자 그의 입에서 옅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부끄러웠다. 그녀의 손길이 미끄러지는 곳마다 뜨거운 열기로 살갗이 녹아내렸다. 해방. 억눌러온 걱정이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마음을 다해 여울을 끌어안았다. "괜찮지? 어차피 망가진 몸이니까." 여울이 갑자기 옆구리의 패널을 뜯어내고 전선 다발 사이로쑥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진환은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조금 전까지 몸을 쓰다듬던 손이 그의 내부를 엉망진창으로 헤집기 시작했다. 감각 신호를 전달하는 회로가 뒤엉키며 온몸을망가뜨릴 정도로 강렬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솟구쳤다. 새로운자극에 눈을 뜬 진환은 부끄러움도 잊고 소리치며 몸을 떨었다. 한 몸으로 연결된 여울 또한 그가 느끼는 감각을 함께 느꼈다. 이제 그녀의 입에서도 흐느끼듯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흥분이 한껏 고조될 즈음, 그녀는 진환의 머리채를 붙잡아 거칠게 허벅지사이로 밀어 넣었다. 꼭 달라붙은 몸이 소파 위로 기울며 천천히 스러졌다. 누적된 긴장에 지친 탓인지, 그녀는 금세 잠이 들었다. 진환은 입고있던 재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주었다. - 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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