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사실 불운은 늘 기분 나쁘게 도사리고 있었다. 잠시라도 잊으면 말도 안 되게 끔찍한 짓을 저질러 우리를 환기시키면서 아주 가까이에 있어. 이만큼 널 흔들어놓을 수 있어. 쉽게 죽일 수도 있어. 그런 식으로 난데없이 공격받으며 살아가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런 불운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삼팔선을 넘은 할아버지의 불운에서 태어난 것처럼. 나의 뿌리는 불운이요, 나를 키운 것도 불운이요, 내가 끝내 다다를 결말 역시 불운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적겠지만 말이다. - P130

개는 손으로 그리워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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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세대의 음악을 자연스레 함께 듣는 행운은 생각보다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국세청 모르게 젊은 부자들이 물려받는 유산과도 같다. - P44

폴과 린다,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눈에서 눈으로 사슬 같은 게 매달리지 않았나 싶게 이어져 있었다. 사랑스럽다면 사랑스럽고 끔찍하다면 끔찍할 정도의 연결선이었다. 폴 매카트니가 카메라 이쪽의 린다를 볼 때에, 지금의 우리까지 덜컹할 정도라면 실제로는 더했을 것이다.
린다와 폴이 아직 사랑에 빠지기 전의 사진들만 봐도 뒤의 일들을 예감할 수밖에 없다. 렌즈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찍은 지 삼십년, 사십년이 된 사진들인데도 그 모든 감정들이 훼손되지 않았다. 어두운 곳에 있는 폴, 빛을 받고 있는 폴, 멤버들과 있는 폴, 혼자 있는 폴, 무대 위의 폴, 휴가지의 폴, 턱수염을 기른 폴, 메이크업을 한 폴, 모자를 쓴 폴, 거품에 잠긴 폴, 가까운 폴, 원경의 폴, 그리고 두 사람의 아이들, 두꺼운 스웨터와 털북숭이 애완동물들.
뒤늦게 이해했다. 린다 매카트니가 1998년, 내가 주완이를 만나기 일년 전에 죽고 나서 폴 매카트니가 그녀를 닮은 여자들과 거듭 결혼해야 했던 이유를.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음에도 자녀들이 폴 매카트니를 계속 지지했던 이유를. 그들이 세계에 남기고 있는 흔적들을 두 사람과 같은 관계는 일생을 지배한다. 그런 사랑이 끝나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며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 P48

나도 요리를 싫어했었다.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이라 어설프게 흉내 낼 수 있을 뿐, 요리와 되도록 멀게 살고 싶었다. 불도 싫고 증기도 싫고 부엌 냄새도 싫었다. 마를 새 없는 물기 때문에 손등이 터지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충분히 싫어하면 그 삶이 나를 비켜갈 거라 마음먹고 늘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주들이 맛있게 먹었으므로 부지런히 식자재를 훔쳐 날랐고, 칼로 통통통 잔재주를 부리면서 두 사람을 홀렸으며, 불을 줄였다 올렸다 잘난 척을 했다. 포만감에서 비롯된 애정이라도 받고 싶었던 것이다. - P54

감독들과는 늘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쁘다는 건 아니고 애틋하지 않다는 의미에서다. 감독들이 대부분은 함께 지내기 매우 힘든 사람들이어서도 그렇지만, 내가 권위에 별로 반응하지 않는 타입인 게 더 컸다. 좋은 어른은 좀처럼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나쁜 어른은 내세울 권위가 없다. 그러니 원활히 작동하는 권위란 건 좀처럼 목격하기 어렵고 그런 의심으로 나는 어른을, 감독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나라의 수직적인 구조에서 감독들에 대한 나의 냉랭한 태도는 다른 스태프들에게 호감을 살 정도였다. 굽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실력으로만 승부하는 사람이다. 그런 평판을 얻었다. - P104

사실 그건 여차하면 그만두고 엄마랑 할머니 밑에 기어들어야지 하는 건성의 마음 때문이었지 실력이랑은 별로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화 해서 나오는 돈은 너무 적어서 뒤늦게나마 받을 때마다 코웃음이 나왔다. 떼이지만 않으면 다행인 그런 돈 때문에 안 그래도 매머드만한 감독들의 에고를 더 키워주긴 싫었다. 한 사람쯤 아부를 안 해줘야 덜 쿵쾅거린다.
거짓된 평판이란 건 거품을 끼고 데굴데굴 몸을 키워 서어느새 경력이 된다. 남들도 다 그렇게 지내는 것 같아서 나도 가만있었다. 정말로 실력파인 것처럼.
언젠가는 함께 작업한 감독에게 이런 얘기를 들은 적도있다.
"추악한 것에서 눈을 피하지 않는 그런 느낌이 있어. 자기가 해놓은 걸 보면 말이야. 누구한테 배웠어?"
당신으로부터.
세계로부터.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말았다. 감독들이 못나봤자 더 나쁜 악당들은 따로 있었다. 당신이나 나나 이 진창에 같이 있지, 생각하며 말을 줄였다. - P105

나 : (내레이션) 정말로 놀라운 건, 종종 내 친구들과 똑같은 얼굴의 아이들과 마주친다는 것이다. 친척도 아니고 아무도 아니다. 아무 관계도 없이 그렇게나 똑같은 얼굴로 태어난다. 누군가 이 세계에 같은 얼굴들을 계속 채워넣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두려운 것은 그 닮은 얼굴 뒤의 거의 다르지 않을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유일하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대체된다. 모두가 그 사실에 치를 떨면서.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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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전철 좌석에 앉은 사람들이 어딘지 태평하고 한가로워 보일 때가 있는데, 아마도 ‘이동하는 중‘이라는 안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이동하지 않아도 제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안도, 그러니까 속 편하게 휴대폰을 보거나 잘 수 있다. 대기실 같은 곳도 그렇다. 햇살조차 차가운 방에서 코트를 껴입고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에는 때때로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따스한 다정함이 있다. 만약 우리 집 소파였다면, 내 체온과 냄새가 스며든 담요 속이라면 달라진다. 게임을 하거나 낮잠을자더라도 해가 저물 때까지 걸리는 시간만큼 마음 어딘가에 새까만 초조함이 달라붙는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무언가를 하는 것보다 괴롭기도 하다. - P83

한숨은 먼지처럼 거실에 쌓이고, 훌쩍이는 울음은 마룻바닥 틈이나 장롱 표면에 스며들었다. 난폭하게 잡아끈 의자나 문 여닫는 소리가 퇴적되고 이 가는 소리나 잔소리가 축축하게 계속 떨어지면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생기며 집은 조금씩 낡아가는지도 모른다. 균형이 깨지기 시작한 집은 오히려 붕괴를 갈망한다. 할머니의 부고는 바로 그럴 때 들렸다. - P85

최애는 내가 살기 위한 수단이었다. 생업이었다. - P116

최애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나를 불러 일깨운다. 포기하고 놓아버린 무언가, 평소에는 생활을 위해 내버려둔 무언가, 눌려 찌부러진 무언가를 최애가 끄집어낸다. 그래서 최애를 해석하고 최애를 알려고 했다. 그 존재를 생생하게 느낌으로써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끼려고 했다. 최애의 약동하는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필사적으로 쫓으려고 춤추는 내 영혼이 사랑스러웠다. 외쳐, 외쳐, 최애가 온몸으로 말을 건다. 나는 외친다. 소용돌이치던 무언가가 갑자기 풀려나 주변 모든 것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성가신 내 목숨의 무게를 통째로 짓뭉개려는 것처럼 외친다. - P117

그래도 좀 더 깊은 곳에서 그 사실과 내가 연결됐다는 생각도 든다. 그가 그 눈동자에 억눌렀던 힘을 분출해 공적인 장소임을 잊고 처음으로 무언가를 파괴하려고 한 순간이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내 몸에 가득 차올랐다. - P130

항상 최애의 그림자가 겹쳐져 있는 나는 이인분의 체온과 호흡과 충동을 느껴왔다. 개에게 그림자를 물려 울던 열두 살 소년이 생각났다. 줄곧, 태어나서지금까지 내 살이 무겁고 성가셨다. 이제는 살이 전율하는 대로 내가 나를 부수려고 했다. 엉망진창이 됐다고 생각하기 싫으니까 내가 엉망진창을 만들고 싶었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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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홍대까지의 길은 어찌나 멀었는지, 한번 나가려면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주차장길에 노브레인 멤버들이 늘 서성이고 있었다. - P16

안온하고 좁은 세계에서 성장은 유예되고 만다. - P30

여하튼 사랑할 수 없는 가족들을 사랑할 필요 없다는 새로운 지침은 수미에게 꽤 충격이었던 것 같다. 어떤 해방감을 느낀 수미는 해방된 모든 사랑을 다 민웅이에게 쏟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울 만도 했을 텐데, 민웅이는 전혀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도 그랬을 것이, 그 무렵엔 누구나 민웅이를 사랑했다. 민웅이는 아무 방어도하지 않고누구에게나 곁을 쉽게 주었고, 그래서 그 곁은 360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의 골든 보이였다. 나나 송이조차도 가끔 민웅이랑 같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는 걸 좀 과시하고싶어질 때가 있었다. 때 탄 초록 줄 버스가 파주 왕자의 마차였다. - P31

"하지만 왠지 책꽂이가 하나 있는 집에서 자란 사람의 머릿속은 건강할 거 같아."
주연이가 말도 안 되는 부러움을 표했을 때 처음에는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했고 나중에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 주연이나 나나 머릿속 건강은 무리한 바람이 되어버렸다. 주연이는 책꽂이 사이에서 태어났고 책꽂이 사이에서 죽을 것이다. 벗어나기는 애초에 불가능했고 출판사에 취직한 후로는 더더욱 물 건너갔다. 증식하는 책들을 보면 월급 대신 책을 받는 게 분명했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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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는 빛났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이십 년 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계속 몰아붙인 사람만이 지니는 빛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에 어른들만 있으니까 안색을 살펴야 했고, 강제로 연예계에 들어왔을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시기도 있었는데, 열여덟 살 때였나, 아이돌로서 무대에 처음 섰을 때 은색 테이프가 이렇게 터지는 거예요. 공연장은 환성으로 가득한데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더니,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한 건 하고야 말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언젠가 이렇게 말한 그 순간부터 최애는 분명 스스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 P67

최애는 반짝반짝 빛나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면도 있다.
단정 짓는 말투여서 오해를 사는 일이 많은 것. 분위기를 맞추느라 입술을 올리고 있을 때가 많지만 정말로 기쁠 때는 얼굴 안쪽에서부터 억누르지 못하고 웃는 것. 토크쇼에서는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 예능 방송에서 말하는 건 어색한지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 한번은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페트병의 뚜껑을 안 열고 물을 마시려고 한 뒤로 허당 캐릭터에 조금씩 재미를 붙인 것. 셀카는 절망적인 각도에서 찍으면서(얼굴이 잘생겨서 그래도 괜찮지만) 사물은 잘 찍는 것. 최애의 전부가 사랑스러웠다. 최애라면 모든 걸 바치고 싶다. 모든 걸 바치겠다니,
유치한 연애 드라마 대사 같지만 나는 어디엔가 최애가 존재하고 그 최애를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아서, 이를테면 가쓰 씨나 사치요 씨가 하는 ‘현실에 있는남자를 봐야지‘ 같은 말은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다. - P67

휴대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혹은 무대와 객석에는그 간격만큼의 다정함이 있다. 상대와 대화하느라 거리가가까워지지도 않고 내가 뭔가 저질러서 관계가 무너지지도 않는, 일정한 간격이 있는 곳에서 누군가의 존재를 끝없이 느끼는 것이 평온함을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최애를 응원할 때, 나라는 모든 것을 걸고서 빠져들 때, 일방적이라도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충족된다. - P69

문득 나는 이 괴로움을 원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서히, 일부러 육체를 몰아붙여 깎아내려고 기를 쓰는 자신, 괴로움을 추구하는 자신을 느끼고 있었다.
체력과 돈과 시간, 내가 지닌 것을 잘라버리며 무언가에 파고든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을 정화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괴로움과 맞바꿔 나 자신을 무언가에 계속 쏟아붓다 보니 거기에 내 존재가치가 있다고 여기게 됐다.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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