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은 정말 쓰고 싶어서 선택한 건가요? 꿈을 이루지 못해 억지로 잡고 있는 미련은 아닌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날아오는 화살에 심장을 관통당한 새처럼 순간 정지했다. 마사지 시간이 끝났다.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려는데 그녀가 참지 못하고 내게 말했다.
"미련...... 맞는 것 같아요. 사실, 저 희곡을 쓸 때보다 샌드위치를 만들 때 더 즐거워요. 근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샌드위치가 꿈이 될 수는 없잖아요?" - P197

그녀가 내게 따듯한 종이봉투를 안겨주며 말했다.
"방금 만든 제 샌드위치예요."
내가 받은 것은 그녀의 새로운 꿈이었다. - P198

나의 새로운 장래희망은 한 떨기의 꽃이다. 비극을 양분으로 가장 단단한 뿌리를 뻗고, 비바람에도 결코 휘어지지 않는단단한 줄기를 하늘로 향해야지. 그리고 세상 가장 아름다운향기를 품은 꽃송이가 되어 기뻐하는 이의 품에, 슬퍼하는 이의 가슴에 안겨 함께 흔들려야지.
그 혹은 그녀가 내 향기를 맡고 잠시라도 위로를 받을 수있다면 내 비극의 끝은 사건의 지평선으로 남을 것이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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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유리 구두를 신긴 건 요정도 왕자도 거물도 아니고 ‘사람들‘이었다. 힘든 한 주를 보낸 금요일 밤, 조금은 홀가분하게 거실 텔레비전 앞에 앉는 평범한 사람들 말이다. - P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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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있는데도 어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심박수, 호흡, 신진대사, 면역 체계, 호르몬 등에 관여하는 뇌 활동이 증가한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밝혀졌다. 말이 식물은 몰라도 인간은 변화시키는 것이다. 폭언을 들으며 성장한 아동이 추후에 정신적 어려움을 겪을 확률이 높다면, 거꾸로도 가능하지 않을까. 어딘가 끊어졌거나 꼬여 있는 내 뇌에 나의 의지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주문을 읊는 일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주문은 미신도 비유도 아니다. 과학이다. - P280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뒷부분은 1997년 작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줄거리다. 잭 니컬슨이 강박장애를 겪는 베스트셀러 소설가로, 헬렌 헌트가 활기차고 너그러운 싱글맘 웨이트리스로 출연했다. 저 대사가 유명하다. 즐길 만한 로맨틱 코미디임에도 ‘괴팍하지만 본성은 선한 나를 그녀만이 알아보고 치유한다‘는 줄거리는 신뢰할 수 없다. 누구도 누구를 치유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은 마음의 상호확증파괴다. -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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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평양에서 두 정상은 악수를 나누었다. 컨츄리꼬꼬가 예능계를 정복하는 동안 다이나믹듀오는 핸들이 고장난 8톤 트럭이 되었고 유노윤호는 지상파 무대 위에서 최강창민의 생일을 축하했다. - P113

‘스물일곱 살 인생 평가 좀‘ 같은 제목의 글에 사람들이 쏟아놓는 댓글을 보면 가끔 뭘 잘못한 것 같기도 했다. 더 잘 살고 싶었다면 공부를 더 잘했어야 한다고. 솥뚜껑삼겹살도 즉석떡볶이도 먹지 말고 맥주도 마시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고 닥치고 공부해서 시험에 붙든 돈을 모으든 했어야 한다고. 남들 다 자리잡을 때 어리바리하고 게을렀던 우리가 ‘빡대가리‘라고. 두 사람은 이런 질문에 도달했다.
"우리가 그렇게 잘못 살았냐?" - P134

빨간 모자를 쓴 해병 병장은 네가 선택한 길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 했고 김정은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추노꾼 장혁이 오열하며 삶은 계란을 씹었고 개구리도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에 젖고 물만 맞는 여기는 아마존. 안 젖을 수 없는 여기는 아마아마 아마존. 편하고 쿨하고 섹시한미소를 짓는 옆 나라의 정치인. 인생이란 역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끄덕). 둘리가 답했다. 아이 싯팔. - P134

때로는 시시하고 때로는 끔찍했으며 결국에는 죄다 망해버린 연애들이 있었다. 초라하게 사라진 나라들조차 폐허 어딘가에는 영광을 남기는 것처럼 그 연애들에도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은 있었다. 연애가 망하더라도 사랑은 망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저렴한 각본으로 사랑하느니 다른 이름을 붙이고 싶었다. 어차피 첫 단추부터 이상했으니까.
차라리 이것은...... 딩동. 음식 도착을 알리는 초인종이 울렸다. 두 사람이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우리는 친한 사이야."
그 말은 두 사람만의 농담이 되었다. - P142

정전을 계기로 앞집 부부와 배드민턴을 쳤다. 부부가 대접한 더운 나라의 음식이 입에 맞진 않았지만 접시를 비웠고, 그 집 꼬마가 리코더 연주를 뽐냈을 때 박수를 쳤다. 집에 돌아와 ‘우리 오늘 이웃이랑 친한 사이 해버림‘이라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미래는 여전히 닫힌 봉투 안에 있었고 몇몇 퇴근길에는 사는 게 형벌 같았다. 미미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워 담았고 그게 도움이 안 될 때는 불확실하지만 원대한 행복을 상상했다. 보일러를 아껴 트는 겨울.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는 서로의 등을 보면 봄날의 교무실이 떠올랐다. 어떤 예언은 엉뚱한 형태로 전해지고 아주 긴 시간이 지나서야 실현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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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37세의 삶에 신파를 그리워하다니 이것은 미성숙일까. 어쩌면 사랑은 새들보다 가깝고 빵보다 단단하며 조카보다 듬직한 무엇일지도. 퇴근하고 나니 비워져 있는 휴지통, 소화제를 먹을 때옆에서 따라주는 더운물 한 컵. 늙은 부모의 터무니없는 세계관을 함께 끄덕이며 흘려듣다가 주차장에 내려와 시동을 걸기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뱉는 안도의 한숨. 물티슈와 수세미, 파스와 보행기. 암 보험과 노령연금과 장례 토털 케어 서비스카탈로그를 함께 뒤적거리기. - P51

각오는 했지만 어떤 말들은 너무 부당했다. 사람들은 나이와 직업과 외모를 초월한 사랑이 더 진실하다 여기면서도 정말 그것들을 초월하려고 시도하면 자격을 물었다. 인생을 반도 안 산 사람에게 어떻게 ‘도태‘되었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지, 596명이나 거기에 추천을 누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의아했다.
맹희 자신도, 감자도 토마토도 양파도 그들이 비난하는 만큼 잘못한 건 아니었다. 어째서 이렇게나 많은 남자가 ‘좋은 사람만나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을, 무엇을 속이거나 팔아넘기겠다는 말로 번역해서 들을까. 맹희는 집요하고도 악랄한 댓글 228개 아래에 익명으로 슬쩍 썼다.
‘너네는 어쩌다 이렇게 좆같아졌어?‘ - P70

삼겹살이 다 익을 때까지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자면 결혼이란 적령기에 옆에 있던 사람과 하는 것이며, 돈을 모으려면 꼭해야 하지만 돈을 모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죽음만큼이나 미룰수록 좋지만 사람 구실을 하려면 하긴 해야 하며, 요새 젊은 친구들은 책임감이 없어서 어려운 일이지만, "시발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라며 분노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P90

그는 경험적 지식을 바탕으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존재를 추정해야 했다. 그건 천체물리학자나 발명가의 일과 같았다.
직업이라거나 재산, 가정환경 같은 조건을 나열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인간의 본질을 예고하는 구체적인 징후들은 따로 있으며,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뜨면 그것들을 포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다른 이들은 고개를 갸웃할 만한 것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열두번째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흰 바지를 입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을 상상하는 것과 찾아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 P92

"안에 있는 거, 꺼내봐."
그녀가 "어, 음, 응" 같은 소리를 내며 반지함을 꺼내들었다. 그를 보며 "설마?" 했고 그는 끄덕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 돼."
그는 아득해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지. 나뭇잎소리도, 풀벌레 소리도 멈춘 듯했다. 그녀가 반지함을 그에게 내밀며 말했다.
"당신 손으로 줘야 해."
그녀에게서 반지함을 받아들 때 그는 결정적인 열세번째 조건이,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깨닫기도 전에 충족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중요한 말을 또박또박 하려 했는데 목이 메었다.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반지가 조금 헐거운 것 같았다. 그녀가 말했다.
"자기 울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 P101

아내의 경력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는 남직원은 육아휴직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내 불문율을 깼다. 몇몇 상사가 빈정거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회사에는 그와 같은 직군으로 이백여 명이 근무했고 그중 한 명은 정확히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 어떤 무대에서도 그녀의 남편은 자신 하나뿐이었고 그 사실을 떠올리면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았다. - P106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작고 예쁜 풍경 속으로 걸어가 그의 아내와 아기의 곁에 앉았다. 아기가 무언가를 붙잡으려 허공에 팔을 뻗어 휘두르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아기의 이름을 부르며 "뭐가 재밌니, 응?" 하고 덩달아 웃었다. 그는 어떤 것들은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라고 생각하며 담대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는 촛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손뼉을 쳤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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