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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ㅣ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평점 :
작년에 서울의 모 대학교 앞을 지나다가 그 대학 청소부 아주머니들과 시민단체가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시위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지나가면서 스치듯 들었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현실이 참담하다는 사실은 다 들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고작 이 백 원 정도 ‘최저’ 임금을 인상해달라고 하기 위해 사용자인 대학에 맞서 시위를 결심한 청소부 아주머니들은 다들 장성한 자녀를 두고 있을 듯한, 어느 정도 연세가 있으신 분들로 보였다. 당시 최저임금은 4320원이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서야 260원이 올라 현재의 최저임금 4580원이 되었다. 다행이었지만 뭔가 께름칙하고 찝찝했다. 최저임금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지만 물가가 계속 오르는 시점에서는 필연적으로 그 취지가 무색해진다. 물가가 여전히 세다고 느껴지는 요즘 과연 4580원을 받고 생활고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쨌든 아주머니들의 시위를 목격한 이래로, 나나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 최저임금보다도 낮은 급여를 받으면 매우 불합리하다는 말로는 정말 부족하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다. 내가 만약 그 정도의 최저임금만 받고 장시간 일하면서 생활해야 한다면? 당연히 못할 짓이다.
<노동의 배신>은 저자인 바버라 에런라이크 ‘박사’가 최저임금 노동에 직접 뛰어들기 시작하면서 몇 년간 집필해온 ‘잠입’ 취재기이다. 잠입 취재라는 말이 표지의 소개글과 홍보글에도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박혀 있듯이, 이 책이 사회적 사건을 추적하는 르포르타주로 분류되어 있듯이, 박사학위를 딴 사람이 일부러 최저임금 노동자가 되었으니 잠입이라는 말은 충분히 어울리는 듯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 책은 죽음을 불사한 ‘잠입’ 수사기가 아니다.
거의 누구라도 내가 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일자리를 찾고, 그 일을 하고, 수입과 지출을 맞추고.
실제로 수백만 명의 미국인이 매일 그렇게 살고 있으며,
그걸 떠벌이지도 않고, 머뭇거리지도 않는다. (17p)
중산층이자 고학력자인 저자는 잠입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할 당시 자신의 ‘특별함’을 걱정했다.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면서 자신의 정체, 즉 교육을 잘 받은 똑똑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이는 종국엔 괜한 걱정으로 밝혀졌다. 그 누구도 저자의 진짜 모습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었고, 저자가 직접 밝히고 나서도 뜨뜻미지근한 반응만 돌아올 뿐이었다. 확실하게 잠입한 셈이었지만 결국 무의미한 것이었다. 저임금 노동자들과 같은 처지에서는 저자도 뼈빠지게 일만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취재기보다 수기에 가까워 더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실제로 저자는 다른 저임금 노동자들처럼 소위 ‘두 탕’을 뛰며 아침부터 밤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매일, 매달 수입과 지출을 맞출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즉 어느 정도의 임금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을 일해야 들어오는 돈과 나가는 돈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지 알아봐야 했는데, 결국 직접 일을 해보니 하루에 한 가지 일만 해서는 좀처럼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생계 유지는 물론이거니와 ‘생존’에 꼭 필요한 집세를 마련하기도 벅차 전전긍긍하고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저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런데 어디 저임금 노동자들이 겪어야 하는 수난이 생활고뿐이랴? 저임금 노동자들은 항상 무시당하게 마련이다. ‘단순 노동이니까 저임금을 받는 게 당연하지!’ 라는 무척이나 ‘합리적’인 생각이 만연해 있는 사회에서 그들은 모두 ‘고작 저임금이나 받는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무시당할 만한 사람들’이다. 돈을 기준으로 삼아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조차 지켜주지 않는 이 사회는 얼마나 냉정하고 잔혹한지, 또 얼마나 오만한지……. 그들은 게으르고 태만하게 일하는 것도 아니며, 신참이 아닌 이상 누구나 맡은 일에 숙련된 노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쉴 새 없이 일하다가 잠시 잠깐 맞이하는 짧디 짧은 휴식 시간조차, 잡담 시간 조차, 심지어는 화장실에 갈 시간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불평 없이 받아야 하는 그들의 처지는 자유를 뺏긴 노예와 마찬가지다. 또, 몸을 고되게 하는 일과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인해 매일같이 아파도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거나 처방전을 받을 돈이 없어 그저 진통제로 견디고 담배와 술로 마음을 달래다 보니, 결국 몸이 더 상하고 그 화를 고스란히 입게 된다.
학력이 높다고 해서 단순 노동이라면 무조건, 무엇이든지 잘 해낼까? 저자가 말하는 대로 단순 노동이라 불리는 것들이 절대 ‘단순’하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저임금 노동자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은 몸소 노동 현장에 뛰어든 저자와는 달리 이런 사고방식을 가져본 적도, 가져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이 2001년 미국에서 출간된 당시 그리도 열풍을 몰고 왔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 이 책도 거대한 사회 구조까지 바꿀 수는 없었다. 저자는 최근 후기를 통해 저임금 노동자들의 환경이 더 열악해졌다고 전한다. 임금은 너무 낮고 집세는 너무 높아 악순환이 계속되는 현실이 여전하다고 말이다. 저자가 저임금 노동자로 일했던 2000년 전후에는 미국 경제가 호황이었는데도 노동 현장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 10년이 흐른 지금 미국 경제는 전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휩쓸려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수많은 개인이 거대한 구조에 잠식된 채 홀로 생존할 길을 구해야 하는 이 처참한 현실은 언제쯤이나 나아질까. 어쩌면 기한 없는 기다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 사회 저임금 노동자들의 환경 또한 열악하다.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 최저임금을 받고서라도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을 듯싶다. 불합리할 정도로 힘들고, 수모와 모욕까지 당하는 이 부조리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고 견뎌야 하는 사람들에겐 긍정도 희망도 없을 듯싶다.
올해와 마찬가지로 내년에도 최저임금이 6%가 오른다고 한다. 그래도 오천 원이 안 넘는다. 요즘 오천 원만 가지고 한 끼 식사를 때울 데도 별로 없다는 실상을 감안하면, 저임금 노동자들의 생존과 생활 환경을 제대로 고려한 현실적인 인상안은 아닌 것이다. 이젠 좀더 실질적인 방안이 강구되어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