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다미레 지음 / 루비레드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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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홀리듯 마주한 한율의 눈빛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 밤, 풋풋한 연인들이 얼마만큼 뜨겁게 피어오르고 달아올라 내달렸는지.

청산도의 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반짝이는 별들을 전부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한율의 호흡과 몸짓은 절박하고 아득했다. 시퍼런 관능과 비정상적인 소유욕은 여린 내벽을 부실듯이 내리 누르며 찍어 댔고.

2일 내내 섬에 유배된 것도 모자라 위리안치 된 이들처럼 오로지 서로만을 위해 욕망하고 소유하며 존재했었다.

마치 또 다른 완벽한 세상을 만나고 만든, 그런 기분을 매 순간 느꼈었다.

그 기적 같은 환희와 함몰. 고통스런 정염으로 인한 피폐의 시간이 지나고 가평으로 돌아왔을 땐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정확히는 이주의 세상이 아닌 한율의 믿음 가득한 세상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연인들의 사이를 가르고 남보다 못한 타인으로 떨어져 지낼 일이고 배신인지.
결코 동의하지 못하기에 지금, 한율과 이주는 외딴 섬처럼 지냈다. (p.32-3)

“사랑해.”

주이주가 사랑한단다. 이 말은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말이었다. 천우의 숲처럼.

“난 김한율을 내 소유물로 갖고 싶지 모두가 공평하게 가져야 하는 숲을 갖고 싶은 게 아니야.”

“······.”​

“그러니까 선택해.”

제법 단호해 힘 있는 톤.

“주이준지 아님 저 얼어 죽을 숲인지.”

선택할 수 없었다. 주이주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자신이 사랑하며 따라야하는 오직 한 사람일 뿐.

숲과 한선화 회장님을 닮고 싶은 김한율을 이처럼 그 다울 수 있게 이끌어 줄 유일한 희망의 끈.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의미를 가진 꼬맹아, 네가 선택해 줘. 나의 영원한 숲, 그대가. (p.197)​


​3년 만이었다. 주이주가 연락 없이 이 집, 그들의 공간에 나타난 게.

오래 전 이주는 붉어진 눈을 하고 물었다. 두 사람의 사랑과 이별에 어른들의 역사와 그늘, 상처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도 가끔 이주처럼 말하고 지를 수 있는 입장이고 상황이면 싶었다.​ 싫은 건 싫다고 자르며 의지는 물론 뜻과도 상이하다며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입장과 처지가. 이주와 시작과 가족. 상황이 절대 같을 수 없듯 한율은 천우 조경의 선대 회장님의 유지를,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무거운 부채감과 가혹한 절망을 안겨 준 주하나 교수님의 유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누군가에겐 쉽사리 지워 내고 비워 낼 수 있는 선택이고 용단이라 할지라도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주이주없이 살면서 매 순간 주이주를 품고 사는 남자 김한율.

그런 그를 애틋하게 만드는, 김한율에게는 신앙이자 이번 생의 전부이자 오직 한 사람인 여자 주이주.

이 둘은 마치 마약에 중독된 이들처럼 지독하고 아늑하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과 상태, 기분과 마음을 읽고 추측할 수 있는 사이. 단 하나의 사람이고 사랑이기에 어렵지 않게 서로를 읽을 수 있었다.

지독하리만큼 힘겨운 상황에서도 결코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이들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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