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영이의 거짓말
김민준 지음 / 자화상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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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은 자신이 언제나 조금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개념이 아니라, 어딘가 조금 현실과는 어긋나 있는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녀에게는 몇 가지 말 못 할 비밀들이 있다. 아마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러한 고민은 밖으로 꺼낸다고 해서 쉽게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어렸을 적에 선영의 아버지는 종종 말씀하셨다. 가능한 한 영영 비밀로 남겨둬야 그나마 평범한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부류의 근심들이 있다고. 그 비밀들을 켜켜이 쌓아 올리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보통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까. (p.12)

 

고민, 우리는 어째서 기꺼이 그것들에 자기 마음의 에너지를 할애하게 되는 걸까. 선영에게 그건 생각이라기보다는 향기 같은 부류처럼 느껴졌다. 숨을 쉬는 동안에는 자기 안으로 파고들 수밖에 없는, 하지만 이내 익숙해져버려서 스스로도 그것이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는. (p.50)

 

그녀는 마음이 복잡했다. 어떻게 그 정돈되지 않은 기분들을 제자리에 정리해둘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행복이라는 아주 추상적인 관념을 확고하게 사로잡으며 웃을 수가 있을지 전혀 아는 것이 없었다. 선영이 결국 서두르면 서두를 수록 자기만의 껍질 속으로 자꾸만 나약해지고 마는 스스로의 삶을 떠올렸을 때, 애석하게도 버스는 긴 터널을 지나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풍경을 투과해 갔다. 그 장면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것이 빚어낸 느낌은 그녀를 더욱 서운하게 만들곤 했다. 아름다운 것을 눈앞에 두고도 퓨즈가 나간 전등처럼 홀로 무표정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p.87)

 

어째서인지 선영은 그 말을 들으면서 삶이란 안정을 꿈꿀수록 참 고달픈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모두가 안정을 꿈꾼다. 그것도 참 성실하게, 그래서일까. 고달픈 순간들은 쳇바퀴를 돌듯 우리 일상에 어김없이 찾아오고, 결국 사람이란 아주 간신히 지켜내고 싶은 자신의 마지막 행복을 위해 그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는 없었다. (p.120)

 

 

 

 

다한증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는 손과 그 손끝으로 공기 방울을 만들고 빛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선영. 하지만 늘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는 손은 타인과 관계를 맺기 위해 손을 뻗으려는 그녀에게 커다란 걸림돌이 될 뿐이다. 공기 방울을 만들고 빛을 밝히는 능력 역시 취업이나 세상살이에는 하등의 쓸모도 없이 타인에게서 자신을 소외시키는 자질일 뿐이다. 그래서 선영은 이 능력으로 죽어가는 동물들에게 숨을 불어넣고 까만 어둠을 밝히면서도 자기 능력을 대단히 하찮게 여긴다. 그런 선영에게 자신의 능력을 내보일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 다한증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자신의 비밀을 공유하며, 스스로 외면하던 속내와 감정까지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면접장에서 자기소개를 능숙하게 하지 못해 매번 미끌어지는 취업준비생 선영과 밤이면 밤마다 아파트 재개발이 중단된 폐허에서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직장인 연준. 이 두 사람에게 필요한 건 진심 어린 위로와 응원. 슬픔과 상처로 점철된 고난의 시기를 지나 스스로 용기를 내는 과정에서 뭔지 모를 감정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홀로 고립되어 살아온 선영. 타인을 위로하는 듯 하지만, 결국 그 위로의 대상은 다름이 아닌 자기 자신. 선영은 그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속마음을 편하게 내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하지만 진심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안아주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 내면에 있는 슬픔 또한 마주할 수밖에 없다. 선영과 연준을 비롯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소년 민성과 청소기로 위층 골초를 후려친 405호 아주머니, 술과 담배로 외로움을 달래는 505호 아저씨 또한 저마다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내 조금씩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며 솔직하게 표현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사람들. “인생은 작은 한 걸음이 모여서 거대한 슬픔에 대항하는 일이다.” 작가는 말한다. 누구도 아직은 완전히 고장 나지 않았다고, 그러므로 삶의 박자를 잠시 놓쳤더라도 생의 기쁨을 주렁주렁 휘감고 내 마음에 솔직하게 매혹적인 스윙을 즐기듯 슬픔의 골목을 제대로 관통하여 그 너머의 세계로 걸음을 옮기자고. 늦어도 괜찮다. 천천히 그렇게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가면 되니까. 언제나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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