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김비.박조건형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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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휘청거리는 새벽의 공항 대합실을 같이 걸으며, 나는 가만히 신랑의 손을 끌어 쥐었다. 그를 처음 만난 날, 그의 온기를 처음 느꼈던 것도 그의 손이었다. 내가 손잡는 것을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그는 단 한 번도 나의 손을 뿌리친 적이 없다. 아무리 힘겨워도, 그의 손 안에 내 손을 밀어 넣으면 그 역시 가만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여행을 떠나는 자에게 가장 든든한 준비, 그건 바로 사랑. (p.21)

 

바토무슈의 마지막 지점인 금빛 에펠탑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를 꼬옥 끌어안았다.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광경이었고 꿈조차 꾸지 않았던 순간이었다. 여행하는 시간 자체가 온통 선물이구나. 파리는 우리 두 사람을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고, 사랑에 빠지게 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든, 어떤 궁지로부터 도망쳐 왔든 상관없었다. 서로 다른 빛깔과 무게로 우리를 감싸고 있던 그 모든 시간의 숨결 하나하나가 우리를 축복하는 것만 같았다. 여행의 포근한 품속이었다. (p.46)

 

여행을 하다 보면 온통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뿐이란 걸 깨닫게 된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쉬워도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기억하고 기록하며, 지나온 시간들을 딛고서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위한 찬사를 준비해야 할 뿐. (p.136)

 

우리 눈앞의 하늘은 순식간에 붉은빛으로 일렁이며 불타오르는 바다가 되었다. 긴장했던 마음속이 방망이질했다. 노을로 뒤덮이는 하늘을 보고는 신랑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이 뜨거웠다. 카를교 위를 걷던 모든 사람이 하늘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렇게 빨간 하늘도 난생처음이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고, 사람들의 탄성을 듣고 있기라도 한듯 하늘은 더욱 빨개졌다. 기다렸다는 듯 프라하성 쪽에서부터 하나둘씩 오렌지 빛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 위로 온 하늘이 빨갛게 일렁이고 있었다. (p.176)

 

 

 

 

 

최악은, 이따금 예기치 않은 선물을 가져다준다. 궁지에 몰릴수록 평범한 일상은 그리워진다. 여행이 그들을 찾아온 순간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울증, 뇌종양, 비자발적 퇴직···. 어느 것 하나 지독하지 않은 구석이 없었지만, 신랑과 그녀는 오히려 평온했다. 오히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싶어 곧바로 항공권을 사고, 리스 차량까지 예약했다. 계획한 대로 맞추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대로 맞추어갔다. 앞뒤가 바뀌어도 한참이나 바뀐 셈이었지만, 신랑과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의 흐름을 역행하는 그들의 삶에 아주 잘 어울리는 일 같아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순리를 거슬러 앞뒤가 뒤바뀐, 그들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 손잡은 지 10년, 동거인이 된 지 5년, 법적 보호자가 된 지 3년, 부부 작가가 된 지 2년. 일상 드로잉 작가 박조건형과 소설가 김비. 이들 부부가 함께한 유럽 여행 <길을 잃어, 여행 갑니다>. 책은 여행을 떠나기 전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프랑스, 록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 체코,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스위스> 이렇게 10개국 15개 도시를 함께 여행한 부부의 경험담이 각 파트별로 나누어져 있으며 이에 에필로그와 유럽 여행 비하인드를 더하여 이야기를 보다 풍성하고 실감나게 표현해놓았다. 특히 책 속 곳곳에는 사진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일상 드로잉이 사진과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알록달록한 색감과 꼼꼼한 드로잉 솜씨는 그것은 보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상당히 아름답고 멋스럽다. “우리 이 순간을 잊지 말아요, 잊지 말고 살아갑시다.” 진한 우울증이 찾아와도 끝까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여행. 여느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여주는 해피엔딩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을 찡하게 만들 만큼 감동적이었던 건,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이들 부부의 굳건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 아무리 힘들고 지쳐도 서로에게 화풀이하지 않을 것. 마지막 힘까지 다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것.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우리지만 서로를 향한 변치 않는 믿음과 배려. 이 모든 것이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여행이었다. ‘행복합니까?’ ‘행복합니다.’ ‘아름답습니까?’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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