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말이죠… - 이 도시를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기억들
심상덕 지음, 윤근영 엮음, 이예리 그림 / 이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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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전당포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담보물 중 하나가 뭐였는지 아십니까? 크기가 사과상자만했던 미제 제니스 진공관 라디오였습니다. 진공관 라디오 한 대를 가지고 가면 아무리 까다로운 전당포 주인도 두말없이 급한 돈을 빌려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바로 재봉틀입니다. 진공관 라디오처럼 재봉틀도 두말없이 환영을 받았죠. 그 시절에 집의 재산목록 1호인 진공관 라디오나 재봉틀을 보자기에 싸들고 전당포에 찾아오는 사람들, 너나없이 그럴 만한 사연들이 있었습니다. 서울로 공부하러 간 자식 녀석의 학자금을 마련하느라 들고 나온 물건일 수도 있고, 지금처럼 의료보험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급히 병원에 가서 수술을 하기 위해 들고 나간 물건이기도 했죠. (p.34)

 

서울 사람들은 언제부터 양복을 입었을까요?
근대화를 주장하던 김옥균, 박영효, 홍영석이 민간인 중에선 가장 먼저 양복을 입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마치 연못에 고인물처럼 고리타분한 생각에서 벗어나 개화를 하자, 세상을 바꾸자고 주장한 사람들이니 그럴 만도 했죠. 바지저고리 한복보다 양복 차림이 더 활동적인 것은 사실이니까요. 한편에서는 어떻게 서양 오랑캐들의 옷을 몸에 걸치고 다니느냐며 반대도 심했습니다. 이렇게 옷차림이 바뀌는 과정에서 생겨난 유행어가 바로 ‘근사하다’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개화기 때, 다시 말해 한복에서 양복으로 바꿔 입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생겨났습니다. 양복 입은 꼴이 진짜 멋쟁이들과 비슷하다고 하여 가까운 근(近)에 닮을 사(似)를 써서 ‘근사 하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죠. (p.46)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나이 만 열일곱 살이 되면 주민등록증이 나오죠. 그런데 주민등록증 말고 혹시 ’시민증‘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시민증은 1950년 6·25 전쟁중이었던 10월, 서울시가 열네 살 이상의 남녀에게 ‘당신은 서울 시민입니다’라고 인정하며 발급한 증명서입니다. 길을 가다가 불심검문을 당하면 시민증을 제시해야 서울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죠. 시민증이 없으면 서울 시민으로 행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야간 통행 금지가 실시되고 있어서 불심검문을 하다가 시민증이 없으면 당장 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고향이 어디냐, 일가친척은 어디에 살고 있냐, 그 구두는 어디서 무슨 돈으로 사 신었냐” 등등 꼬치꼬치 캐묻는 바람에 얼마나 곤욕을 치렀는지 모릅니다. (p.60)

 

이제는 우유가 남아돌아서 걱정인 시대입니다. 예전에는 아침마다 대문 앞에 ‘병우유’가 하나씩 배달되는 집은 정말 부잣집이었습니다. 동네에 한두 집밖에 없었으니까요. 우유 종류도 예전에는 ‘흰 우유’ 하나뿐이었지만, 요즘에는 초코우유, 커피우유, 바나나우유, 딸기우유, 저지방우유, 칼슘우유 등 다양하더라고요. 예전의 우유광고에는 아주 환한 표정으로 밝게 웃는 꼬마아이가 맛있게 우유를 마시는 장면이 많이 나왔습니다. 우유를 다 마시고 난 다음 입술 주변에 우유 마신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 모습. 그 시절에는 매일매일 우유를 먹던 그 아이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예전에는 임금님이 후궁의 방에 들 때 몸보신으로 먹던 음식이 우유였다고 하잖아요. 이런 걸 보면 우유가 흔해진 지금이 얼마나 살기 좋은 시대인지요. (p.89)

 

어느 건축가는 자서전에서 “파고다 공원을 놀이터 삼아 놀던 시절 최대 희망은 삼일빌딩의 층수를 끝까지 다 세보는 것이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실제로 삼일빌딩이 완공된 뒤, 빌딩 건너편 도로에는 삼일빌딩의 층수를 세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지요. 여의도 63빌딩 완공 전까지 국내 최고층 건물의 지위를 지켜온 삼일빌딩은 근대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삼일빌딩이 서울에서 최고층 건물로 손꼽히던 게 불과 40여 년 전 이야기인데요. 앞으로 몇 년 안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123층짜리 건물이 생긴다고 하네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우리의 건축 기술이 앞으로 얼마나 발전할지 기대됩니다. 30년쯤 뒤에는 서울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아주 궁금합니다. (p.162)

 

 

 

 

 

 

 

지금 내가 기억하는 서울은 도로에는 차들이 가득 넘쳐나고 곳곳에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가는 도시다. 하늘은 내가 좋아하는 푸른색이 아닌 회색으로 물들 때가 많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멀리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며 새삼 여기가 서울이구나 하고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곳. 그래서 정감이 간다기보다는 가끔씩 발을 디딜 때마다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 그랬던 서울이었는데 이 책을 만나고 함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자 멀게만 느껴졌던 거리가 많이 가까워진 느낌이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봐서는 짐작 조차되지 않은 서울의 옛 모습에서는 곳곳에서 사람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지나온 과거를 추억하며 잠시 그 속으로 빠져들게 만들 것이고 그 시절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는 과거의 모습을 둘러보며 옛 서울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한마디로 과거로 시간여행?!  

이 책은 편집자인 며느리가 지금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살아 생전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방송작가로 활동하며 돌아가시기 전날까지 병상에서 방송 원고를 쓰셨다는 시아버님이 직접 녹음해 두신 라디오 원고를 바탕으로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한 번도 뵌 적은 없지만 녹음 테이프를 통한 음성을 듣고, 따뜻하고 정겹게 쓰신 글을 읽으며 저도 모르게 아버님을 그리워했다는 며느리. 그 시절을 살아보지 못한 그녀도 이 글을 읽으며 그때의 행복을 느낄 만큼 이 책에는 따뜻함이 가득하다. 지금은 거대하지만 한때는 따뜻하고 정겨움이 가득했던 옛 서울, 대도시에 이르기까지 서울이 점차 어떻게 변해왔는지 궁금하다면 이 책과 함께 잠시 과거로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신기한 옛날 이야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만큼 참 재미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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