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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지구 벙커X - 강영숙 장편소설
강영숙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주요 포인트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인지 최근 자연재해나 전쟁, 질병 이후 Apocalypse를 다룬 소설들이 꽤 많은 듯 하다. 전쟁, 질병, 그리고 단수 등 그 종류도 많고 그와 동시에 배경도 다양한데, 이번 소설도 그 중 '지진' 이후의 도시, 그리고 거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며, 배경은 가상의 지역이긴 하지만 나라는 '한국'이다.
이 소설에 중요한 것은 인물과 배경인 것 같다. 사건 자체는 엄중하지도 결말에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큰 '지진'이라는 재해 이후 그에 따른 미세먼지와 탁한 공기, 잿빛 가득한 풍경과 번창했던 도시가 이제 무너진 잔해만 남은 모습 자체가 인물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두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세상에서 삶의 모습이 열악해지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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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타운에서 채소 가게를 했던, 나와 좀 가까운 사이였던 한 여자가 생리대가 없어서 흰 셔츠 한장을 조각조각 잘라 사용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P. 18
우리는 작은 플라스틱 수저를 들고 철가루를 먹었다. 진짜 철가루는 아니었지만 부림지구에서만 팔았다. 철가루 색깔의 과자를 곱게 갈아 파우더 형태로 유리병에 담아둔, 부림지구인간들만의 간식이었다. 부림지구에서는 철가루를 먹으면 귀신을 쫓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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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만으로 봐선 귀신조차 피해가고 싶은 엉망이 된 도시 그 어느 아래에 망가진 버스로 만든 임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그려지기 때문에 밖의 상황만큼 내부의 모습도 그리 안정적이지 않아 더 절망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가 모두 이런 절망 또는 멸망을 겪는 것은 아니다. 정체를 정확히 파악할 순 없지만 어디선가엔 정부가 존재하고, 그 정부에서는 이런 거주자들에 대한 이주를 권유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조건이라는 건 몸에 칩을 이식하고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후엔 N시로 떠나보낸다고 하는데 소설에서는 그것까진 정확하게 그리지 않아 그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세계로 보내버리기 위한 감언이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로서는 한번쯤 흔들릴만한 제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후반부에 이 부림지구의 벙커X에 방호복을 입은 요원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끌고 가기도 하고 거기 살던 사람들이 도망을 가기도 하는데, 이런 상반된 사회의 모습을 보면서 전에 본 '알리타: 배틀 엔젤(2018,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이 떠오르긴 했다. 물론 그 영화도 '총몽'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원작으로 한 것이지만, 거기서도 고철 쓰레기와 범죄가 들끓는 고철도시와 바로 위에 떠있는 공중도시 '자렘'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런 배경적 이분법에 대해서는 다른 영화나 소설에서도 다룬 부분이기도 했다. 신체에 칩을 넣고 국가의 관리를 받는 생활도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벙커에서의 열악한 삶을 읽다 보면 어떻게든 그걸 벗어나는게 먼저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N시로의 이주가 지금보다는 나은 삶이어야 바란다는 전제가 깔려 있긴 하지만.
많이 다뤄온 것이지만 위생적인 것 외에 인간이 사는데 더 힘든 건 먹을게 아닌가 한다. 그에 대해선 상상도 하기 싫지만, 언젠가 등장할 거라고 생각한 그 모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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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대피소에 식량 지급이 뜸해졌다. 며칠이 지나자 결국 벌레를 먹게 됐다. 흰 플라스틱 통에 넣어둔 벌레들은 서로의 몸 안으로 파고들면서 비슷한 무늬의 동선을 계속 퍼뜨렸다. 손 위에 놓인 벌레는 따뜻했다. 촉수로 피부를 빨아들인다거나 하는 불쾌감은 전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부터 벌레를 잘 먹기는 쉽지 않았다.
P.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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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런 먹을거리, 입을거리 같은 것에서부터 지금 이 벙커의 삶이 오래되었고, 피폐하며, 절박한 것인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심지어 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유진'이라는 인물조차 본인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가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의 모습과 말들로 ㄱ걸 설명할 정도이니 위에서 말한 벌레를 먹는 것은 어쩌면 지금보다 더 열악하게 변할 벙커내 삶의 시작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앞에서부터 이어온 치열한 삶의 연장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인상깊은 부분은?
이야기의 주 화자인 '유진'조차 나이를 속이고, 직업을 속이며, 심지어 중간중간 어떤 야릇한 아르바이트를 했다는 것을 언급할 만큼 벙커X안의 사람들도 다양하긴 하다. 세련된 노부부와, 젊은 청년, 주인공을 따르는 소녀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런 끈질긴 삶을 이어 나간다고 봤을 때, 이 안에서 더 큰 사고가 나지 않는 건 등장인물이 적어서 일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각자가 가진 이야기는 있긴 하다. 노부부가 왜 이 지역까지 오게 되었는지, 이전에 신문기자였던 사람은 왜 배급 일을 하고 있는지, 벙커 안의 사람들의 사연을 하나하나 모으는 사람까지 읽다보면 어디서 이런 사람들을 모았을까 싶기도 하다.
등장인물이 많고 그만큼 다수의 사람들의 속고 속이는 음모나 거기서의 계급끼리의 싸움 같은 갈등이 무리를 지어 폭발한다면 더욱 규모가 커지는 극적 스토리가 나올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조심할 것은 외부(특히 이 사람들을 이주시키려는 정부)일 뿐 이 사람들은 살짝살짝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있을지언정 아주 나쁜 사람은 없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래서 이 소설이 짧아지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개인들의 사연을 다 털어놓기에도 분량이 적고, 그나마 외부인들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다 보니 영화에서 보아오던 멸망과 같은 스토리가 없기 때문에 더 극적인 뒷부분을 기대한다면 좀 실망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소설에서는 인물과 배경을 중점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런 헐리우드 영화 같은 어마어마한 사건이나 무리지어 싸우는 장면을 기대는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야기도 다 진실이 아닐 수는 있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은, 아는 사람이 겪은 이야기라고 본다면 그것 역시 지금의 공포스럽고 제한된 삶을 묘사한 것이니 다른 시각으로는 진실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어두운 현실에서도 어머니의 기억, 특히 딸이 많은 집에서 아들 대신 낳은 딸의 이름을 남자 이름으로 지었고, 그래서 엄마가 남자 이름이었다는 이전 시대의 상황적인 모습, 부림지구가 제철단지로 큰 변영을 누리던 시절, 거기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아버지의 기억-자면서도 일했고, 그 당시 제철단지는 철이 녹아 쇳물이 될 때까지, 쇳물이 쇠가 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하던-까지 그런 것들 역시 재난 이전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말을 이야기할 순 없지만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가진 않는다. 강인한 삶의 모습,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다분히 현실적인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인격체라는 생각은 들어도 지금의 삶이 충분히 나아지지 않은 상황, 또 다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 결말이 그들을 위한 최선인가라는 생각은 계속 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진'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죽음까지 늘 생각하고 있는 건 안타깝다.
책을 읽으면서 워낙 현실적인 배경과 주변의 모습에 우울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면 조금 더 생각해보면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미래의 어떤 암울한 모습이 거기 투영되기 때문에 더 한 것 같다. 최근의 코로나 바이러스 COVID-19, 미세먼지, 갑자기 늘어난 지진 등 이런 국가적 재난 이후 우리의 삶이 과연 지금과 같은 것인가에 대해선 무섭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을 것 같으니 이런 소설의 묘사가 더 와닿는 건 아닐까?
덧붙인다면?
1. 짐작이긴 하지만 포항, 광양, 창원을 배경으로 한 것 같다. 도시의 주력 산업, 도시의 모습, 번화가의 모습들의 묘사가 비슷한 느낌이다.
2. 몇 가지 정확하게 끝맺지 못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주인공 '유진'의 진짜 과거라든가, 중간에 사람들이 털어 놓는 이야기가 사실인지, 노부부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등등 소소한 이야기들의 진실이 궁금하다.
3. 재난 이후 갇힌 사람들이 살아가는 리얼한 삶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추천, '설국열차'같은 계급간의 싸움이나 드라마틱한 반전을 원한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창비'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