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365일 1
블란카 리핀스카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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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포인트는?

넷플릭스Netflix에서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영화의 원작-아주 많이 야하다는 감상평이 많다-이라고 하는데, 이런 문구보다도 심심찮게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E.L. 제임스 作)와 비교된다는 게 이 책이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알려주는게 아닐까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읽지 않아 두 소설이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유사한지를 비교할 수 없지만, 주요 내용이 ‘으른들’의 성적 판타지라는 건 비슷할거란 추측이 든다.


여자주인공인 ‘라우라’는 매우 매력적이고 자신의 일까지 잘 해내는 멋진 여성이며, 남자주인공인 ‘마시모’는 이탈리아의 한 지역을 관장하는 마피아의 젊은 수장이다. 뭐 젊은 사람들의 불꽃튀는 사랑까지는 어찌어찌 드라마틱하게 그려질 수 있지만 그 과정까지가 너무 격하고, 공격적인데다, 반인격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겠다. 애인,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있는데 혼란을 틈타 약으로 기절시킨 후 납치를 하고, 그 친구들에겐 먼저 돌아간다는 거짓 편지를 남긴 후 가족을 들먹이며 본인과 1년을 함께 있어야 한다는 건 쉽게 공감이 갈 만한 스토리 전개로는 어렵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소설-정확히는 먼저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영화-를 사람들이 좋아했다는 건 자극적인 소재와 더불어 이런 일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확신이 한 몫 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과정에 옳고 그름을 따지기 보다는 뒷부분에서는 무얼 보여줄지 궁금해지는 자극 그 자체를 따라가는게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게 아닐까 해서다. 사뭇 느낌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둘이서 서로를 자극하는 행위는 <외등>(박범신 作)의 미국 횡단 부분과 유사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다만 <외등>에서는 그들의 허무를 보여주기 위한거였다면, 이 <365일>에서는 그냥 말초신경의 자극을 위한 것이라는 거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소설에 흥미를 갖는 건 단순한 이야기 구조와 꽤 수위가 높은 자극 때문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없는 나쁜 놈이 조건없이 모든 걸 주는 사랑이라면 어떤이에겐 그동안 부족했던 격한 로맨스라고 여길 수도 있다는 건데, 특히 소설의 인물을 그대로 그려냈다는 영화 주인공과 비교해본다면 소재의 불편함에도 여성시청자들이 많았는지 일정 부분 이해가 되지는 않을까? 


소설의 시점은 처음 부분을 제외하면 대부분 ‘라우라’의 시점으로 보여지는데, 그래서 그런지 ‘라우라’의 철없음이나 답답함이 그대로 나타나 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은 듯 하다. 그런데 반대로 막나가지만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마시모’는 딱 주인공 느낌이긴 하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다는 말에 딱 맞춘듯이 너무나 필요한 상황에 잘 등장하니 해결사이면서 슈퍼맨이자 백마탄 왕자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아니 도대체 마피아 보스가 이렇게 시간이 많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포장하고, 그걸 꼭 말로 표현하니 더 ‘라우라’가 미약해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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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교활한 미소 역시 사라지더니,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마시모는 일어서서 다가와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들어 올리더니 날 세면대 옆 탁자에 앉혔다.

“지금 여기 보이는 것들은 전부 내 소유야.”

그는 내 머리를 잡아 거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분노 어린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보이는 것 전부 가. 그리고 내 것에 손대는 놈이 있다면 누구든 다 죽여버릴거야.”

P.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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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잠깐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의 사업가적 면모를 보이는 마피아 보스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남성성을 묘사하기에 좋은 듯 하다. 하지만 능력있는 커리어우먼으로써의 ‘라우라’의 모습이 너-무 적게 그려지고 단순히 의상이나 댄스 같은 것으로만 매력을 보이는 건 아쉽다. 게다가 후반부는 너무 ‘마시모’에게 의지하는데 앞서 보여주는 당찬 대사와는 너무 다르다. 어떤 이유로든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여성을 그린 거라면, 그와는 다르게 그녀가 다른 이에게 보여질 또 다른 매력도 훨씬 더 크다는 걸 보여주는 ‘오직 그녀의 삶’을 더 보여줬다면 좋았겠다. ‘마시모’는 쉽게 흥분하고, 쉽게 격해지며, 쉽게 공격적으로 변한다. 그런 걸 즐기려는 ‘라우라’의 생각이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가끔 당황스럽기도 하다.어찌 되었든 우리나라에서 표현해왔던 애정 표현보다는 확실히 직설적이고 디테일하다. 어찌보면 그런게 더욱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이유일 수는 있겠다. 


남녀간의 뜨거운 사랑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건 나름대로 성공적인 것 같지만, 주인공이 ‘마피아 보스’라면 조금 더 그 부분을 강조했으면 느와르적인 요소도 보여줄 수 있었을텐데 그게 아쉽다. 아마도 더 폭력적이었을 것이고, 그러기엔 두 사람이 보여줘야 할 상황이 부족해질 수 있었더라도 왜 ‘마시모’가 죽을 뻔 했는지, 그들이 하는 비즈니스란 건 무엇인지, ‘라우라’ 때문에 포기한 것, 지금 ‘마시모’가 조심하고 있는 또 다른 조직의 위협, 그들의 숨겨진 비밀 같은 걸 보여줬다면 이야기가 더 풍부해졌을 것이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보다 잘 쓰여진 작품일지, 아니면 그냥 자극적인 범작이 될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최소한 영화는 그보다 더 잘 만들어졌다고 하니 영화와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겠다. 책 역시 2권이 곧 나올 것 같은데, 1권에서 부족했던 부분들이 조금 더 채워질 수 있을지, 1권보다 더 자극적인 이야기들이 어떻게 펼쳐질지는 사뭇 궁금증이 든다. 


덧붙인다면?

1. 중간에 ‘라우라’가 ‘도메니코’와 친해지는 부분이 있는데 번역을 경어에서 갑자기 반말로 바꾼건 어색했다. 그냥 이름을 편하게 부르는 정도는 어땠을까? 


2. 등장인물이 꽤 많이 나오지만 중심 이야기를 위한 인물은 몇 안된다. 중반 이후 나오는 이름들은 굳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3. 꽤 자극적인 애정愛情소설, 또는 화제가 된 영화의 원작이 궁금하다면 추천, 굳이 영화로 본 이상 감춰진 다양한 이야기엔 관심 없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다산북스(다산책방)'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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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가, 나의 악마
조예 스테이지 지음, 이수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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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포인트는?

책을 읽기 전에 책 소개를 보면서는 스릴러나 오컬트, 또는 심령 미스터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책을 다 읽고 난 느낌은 ‘가족의 수난기’라는 거였다. 이전에 보지 못한 고약하고, 우악스러운데다 과하게 조숙한 소녀의 엄마 밀어내기, 그걸 온 몸으로 받아내는 독하지 못한 엄마와 무덤덤하고 사려깊지 못한 아빠의 부적응기 정도가 맞는 듯 하다. 자신이 전생에, 그리고 지금도 ‘마리엔 뒤포세’라는 화형당한 마녀라고 생각하는 ‘해나’는 엄마를 입을 열면 유리 파편으로 만든 이를 드러내며 아빠를 잡아먹을거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런 엄마를 괴롭힌다. 그것도 아빠가 눈에 띄지 않도록 둘이 있을 때만. 그리고 말을 못한다고 하지만 엄마와 있을 땐 인터넷에서 본 불어를 흉내내기까지 하며 조잘조잘 잘 떠들기까지 하는데, 당장 그것만 보면 진짜 전생의 무엇인가가 몸속에 기생하는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그건 ‘해나’의 생각일 뿐이다. 


엄마인 ‘수제트’는 그저 임시방편으로는 치료조차 되지 않고 그저 낫길 기다려야 하는 만성 질환인 크론병을 앓았고, 아픈 몸과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너무나 외롭게 자라나서 가정에 대한 기본적인 모습에 굉장히 연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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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노릇은 힘들었다. 하지만 수제트는 자신의 어머니는 해주지 못했던 방식으로 부모의 의무를 수행하려 애썼다. 건강한 음식, 멋진 옷가지, 그리고 해나의 복지를 위한 부단한 투자, 수제트는 자신이 어릴 때 원했던 모근 것을 해줄 결의에 가득 차서 부모 노릇을 시작했더랬다. 하지만 해나는 수제트가 해줄 수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면 학교에 보낼 수만 있다면, 그리고 이 새롭게 등장한 이 괴상한 마녀 문에를 심리학자와 함께 풀 수 있다면.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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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마음가짐 때문인지 ‘해나’의 행동은 점점 더 심각해지는데, 이런 공격성은 본인의 이름은 ‘해나’가 아니라는 걸 ‘눈을 뒤집고’ 말하며, ‘프랑스 억양을 최대한 사용해’ 자신은 “마리엔 뒤포세”라고 하는 순간부터 점점 더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공감이 가지는 않지만 ‘수제트’의 어정쩡한 대응은 어쨌든 모성에서 나온거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런 모성이 알렉스의 무관심과 딸에 대한 일차원적인 애정 때문에 이상한 엄마, 심지어 딸을 나쁜 아이로 만드는 엄마로 보이게까지 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종일 밖에 있다 늦게 집에 와서 온갖 귀여움을 표현하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딸은 안타까우면서 사랑스러울 수 밖에 없을테니 아내가 이야기하는 건 그저 히스테리라고 생각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수제트’가 말하는 딸의 모습에 대해 의심도 하지 않는데다 심지어 학교 환경 탓까지 하는 걸 보면 애정보단 무관심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더 답답해진다. 사람마다 다를 수는 있겠지만 ‘해나’가 언제 ‘수제트’에 더 해악을 미칠까가 무서운 것보다 어느 순간 ‘수제트’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가는 게 아닐까 염려스러워 책장을 넘기는 사람도 있을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해나’에게 괴롭힘 당하는 ‘수제트’의 피로함을 따라가다 잠깐 잊게 되는데, ‘해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엄마 ‘수제트’를 괴롭힌다. 우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수줍은 소녀인 척 하는 건 시작일 뿐, 배고픔으로 기절한 척한다든지, 같은 반 아이를 괴롭히는 건 예사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해나’를 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장애를 가진걸로 의심하고, 심지어 집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의심하기까지 할 정도이다. 학교라는 제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 홈스쿨링이 더 도움되겠다고 말하는 아빠 ‘알렉스’는 과연 어떻게 보여야만 심각성을 알아차릴지 매 순간이 답답하다. 실제 행동에 옮길 줄 몰랐지만 ‘슈제트’가 잠들었을 때 몰래 가위로 머리를 자른 – 일부러 좌/우 균형을 맞지 않도록 – 건 이미 어린아이의 행동은 한참 벗어났는데도 ‘수제트’에게 어울린다는 말로 덮어버리는 건 무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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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좋아?”

“병원에 갔다 왔잖아.”

알렉스는 수제트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두피를 지압해 주기 시작했다. “좀 생각해 봤어? 이야기할 사람을 찾는 거 말이야.”

“내가 미친게 아니야. 해나가 정말…”

“외상 후 장애잖아. 그렇게 말하는 거 싫어. 누가 도움을 줄 수도 있잖아. 오늘 약은 먹었어?”

수제트가 알렉스를 밀쳤다.

“안 먹었엇어! 약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니야!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통증이 있으면 약을 먹어야지.”

“알렉스, 내 말 제대로 듣고 있는거야?”

부부는 잠시 꼼짝않고 서 있었다. 사냥꾼처럼 신중하게 혹은 총을 맞기 직전의 짐승처럼 경계하며.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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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책을 찾아 내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있는 그래도 이야기를 받아들이기만 해도 부부간의 대화는 윗 부분보다는 나아졌을 것 같다. 이미 ‘해나’의 행동이 어떤 계산된 결과라는 걸 알아차린 ‘수제트’는 딸의 영악함과 천재성에 놀랄 정도인데, 그런 교활함으로 학교에서 일부러 퇴학을 맞은 딸에게 학교가 맞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면서 후반부로 접어들며 분노가 수제트로 향하는 듯한 느낌은 앞서 보여준 무던함이 어떻게 변할지 긴장감이 들기도 한다.


‘해나’의 자신에 대한 공격적인 행동과 말들을 남편에게 무던히 알리려고 하고, 다행스럽게 가족이 아닌 주변 사람들이 ‘수제트’를 간접적으로 도우려 하는 건 그나마 이 소설을 답답하게 만들지 않는 요소인데, 그럼에도 남편 외의 사람(특히 알렉스의 어머니. 즉 시어머니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도움을 거절하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전문가와 상담하는 건 조심스러울 수 있지만, 가족에게만큼은 먼저 도움을 청할 수 있지 않을까 했는데 본인의 불완전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또 다른 가족의 시선이 싫어서인지는 몰라도 ‘수제트’ 자신을 더 힘들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이런 걸 보면 자신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른 누군가 먼저 알아채고 다가와 ‘당신 딸에게 문제가 있군요’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려 그걸 위안삼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등골이 오싹한 서스펜스나 오르락내리락하는 미스터리가 있지는 않지만, 아이가 단지 아이가 아닌 지금, 우리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는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걸 참고 견뎌내기에 그 안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서로간의 불신은 언제든 위험으로 변할 수 있겠다는 것이다. 다만 요즘같은 여러 IT기기를 사용하는 시대에, 괴상한 딸의 말을 핸드폰으로 녹음한다든지, 이상항 행동을 몰래 CCTV로 녹화한다든지 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쓸 생각조차 안하는 건 말에만 의지하며 결정적 장면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느낌이 들어 아쉽다.


덧붙인다면?

1. 처음엔 배경이 좀 과거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인스타그램’이 등장하므로 여러모로 극적 장치들이 풍부하지 못한 건 안타깝다. 


2. 혹시 ‘해나’가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가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발현 시점이나 계획적인 것, 공격 대상이 지극히 부분적인 것을 보면 그건 아닌 듯 하다.


3. 상세한 심리 묘사, 질릴정도로 누군가를 괴롭히는 극한 상황을 느끼고 싶다면 추천,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는 스릴러나 전생 미스터리 같은 걸 원한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RHK)'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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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람
최제순 지음 / 바른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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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요 포인트는?

책 내용 중 “고향을 떠나 있던 놈이 와서 두서없이 설레발 깠으니”라는 부분이 있는데, 정말 내용을 잘 표현한 부분이어서 기억이 난다. ‘신안 증도’라는 섬에 오랜만에 돌아온 인물이 친구들을 만나 하나하나 꺼내놓는 이야기를 생각나는대로 나누는 느낌이다. 육지에서 떨어져 있던 섬이 어느 날 다리가 놓여 육지화 되었다는 건 거길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도, 원래 주민들에게도 큰 변화였겠지만 다리가 놓였다고 완전한 육지가 되는 건 아니듯이 그들 역시 육지에 사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오고가는 이야기-로 대변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의 많은 부분이 그로 인해 있을 수 있는 것들이다.


​사실 처음에 읽으면서는 방식이 낯설어서 어떤 마음으로 읽어나가야 하는지 자리가 잡히지 않았던데다,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대화의 주제가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러다 동네 유지들의 이야기나 ‘수정다방’이야기쯤에서는 드디어 강력사건이 벌어지는건가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일은 소설 전체에 걸쳐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그 섬에 전해내려오던 전설부터, 일제시대-6.25 한국전쟁을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말 고향 어르신들이 술자리에서 나누는 ‘들어본 건 알고, 못들은건 모르는 이야기들’ 같다랄까.


지리적으로 전라도가조선 시대 형벌이던 유배나 귀양을 보내기에 적당했던게 지금까지 이어졌다든지, 서울만 가면 다 성공할 줄 알고 소도 팔고, 돼지도 팔아 옷보다리 하나 들고라도 서울로 갔다는 것부터, ‘꿈다방’이라는 데서 일했던 아가씨가 누구랑 바람이 나서 도망을 갔다든가, 기술이라는 친구가 동네 순자라는 여자아이를 만나려 하루종일 기다렸다는 첫사랑 얘기, 누구네 할머니가 이를 잡아주던 모습, 동네 잔치에 돼지를 잡는 자세한 묘사까지 요즘 말로 TMI같은 이야기가 툭툭 끊어지지만 계속 이어지는게 신기할 따름이다. 하지만 모든 이야기가 가벼운 추억팔이만은 아니다. 누군가는 사무치기도 할 것이고 누군가에겐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사실이었을 수도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작은 섬에서 끝나는 게 아닌 ‘전라도’라는 지역적 선입견으로 받았을 설움과 정치인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호소도 곳곳에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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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빨갱이도 있었고, 왜놈의 앞잡이도 있었다. 이제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당신의 조상은 친일파였어! 너희 아버지는 빨갱이였고, 너희 집안은 양반, 아니 상놈 집안! 너는 고향이 전라도여! 너 학교 어디 나왔어! 초등학교는, 대학교는, 어디서 살았고! 어디서 태어났어!

전라도 새끼들은 다 그래! 그러는 경생도 새끼들은! 충정도는 어떻고, 강원도는 또 어떻고.

하여튼 우리 대한민국은 나누기 천국이야!

그런데 정치하는 놈들! 국민의 이 불편한 마음 잘 이용하지! 잘 사는 동네와 못 사는 동네로 나누고, 젊음과 늙음으로 나누고, 사상으로도 나누고, 학술로도 나누고, 나누기 잘하는 정치집단의 천국, 대한민국이지!

P.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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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한탄과 불만도 있지만 그것이 ‘정치인’이라는 부류 때문만은 아니라는 건 당연하다. 이건 일부일 뿐, 결국 얄팍한 민족의 정통성, 배신을 밥먹듯이 한 민족성, 빨생이나 친일보다 우리 이웃을 먼저 선보려는 간사한 민족성 때문이었다는 것이고, 과연 왜 지역과 이념으로 치열하게 싸웠는지, 대한민국 내부에서가 아닌 북한, 일본 같은 나라에 대해서도 그만큼 힘을 빼가며 싸웠는지를 여러 입을 빌려 지적하고 있어 단지 고향 땅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농담으로만 느껴지진 않는다. 이런 무거운 이야기 와중에, 동네에 한마리 뿐이던 교미용 수퇘지 얘기에 그 교미하는 값을 암퇘지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키울 때까지 기다리다 쌀값으로 받았다는 이웃간의 믿음, 그런 수퇘지에게 사람도 먹기 힘든 상괭이고기 – 몰랐지만 고래고기를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 를 꼬박꼬박 먹였다는 건 낯설지만 어느 시절 농촌의 풍경같아 새롭고 웃으며 읽을 수 있었다. 


​인상깊은 부분은?

처음에 잠깐 등장할 줄 알았던 정치나 나랏일 하는 사람(공무원) 이야기가 간간히 등장한다. 동네 유지들을 꿰고 있었다는 산림감시원은 왜 단속할 걸 안하고 세금 받아낼 궁리나 하면서 정기적으로 마을을 방문했는지, 제도같은 걸 들먹이면서 위정자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하면서 고통을 주고 거짓말을 밥먹듯이 하는지 그들의 얼굴은 두껍고 양심에 털이 났다는 건 아마도 어린 시절 부모님의 부모님부터 전해지던 이야기들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또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우리 사회 계급은 노예제와 봉건적 사고를 거쳐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었지만 자유와 책임을 구분하지 못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모습이 된 건 결국 권력이고 배고픈 민족의 습성이 만들어냈다는 되새김은 어느 학자의 표현처럼 ‘학습된 복종’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이 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칠 수는 없긴 하지만, 이런 것까지 모두 공감하기는 쉽지 않을 뿐더러 너무 자주 언급되는 건 고향의 고즈넉한 느낌과는 결이 너무 달라 좀 당황스럽긴 하다. ​아무튼 이런 공통으로 느껴지는 적을 적나라하게 얘기한만큼 같이 사는 사람들의 공동체 의식은 아주 굳건하고 유구하다. 아주 오래전이겠지만 한 때였던 그 시절의 사람들, 지금은 그와는 달라진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섬 사람들끼리는 행복했고 믿어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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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마을의 아름다운 전설까지도 사라져 가고 있어! 구설이라도 이어가며 명맥을 유지하며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사람이 줄어들고 있지! 아이가 없고 젊은, 사람도 없고, 분명 얼마가지 않아 동네 경로당도 필요 없을거야!

마을마다 살아 이어져 내려오는 구설도 사실 말싸움 정도에 그치지. 마치 지나가는 소낙비처럼 말이다. 그러니 일하다 힘들어서 하는 푸념과 양념이지 양념!

또 누구도 대대로 살아온 이웃에게 상처가 될 말은 가능하면 하지 않았으며, 만약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말을 했다면 바로 사과하는 그런 자세도 가지고 있었어!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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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파람의 사전적 의미는 <남쪽 또는 앞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지만, 저자는 그 섬에서의 기억, 즐거움, 아쉬움, 슬픔 모두를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상징이다. 동네 풍경을 이야기하다, 다방 얘기도 하다, 정치인 얘기도 잠시 거들고, 돼지 얘기와, 선대묘가 있는 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얘기를 거쳐 삼국시대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금의 행정구역이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펼쳐지면 사실 어느 에피소드에 더 집중할지 헷갈리기도 한다. 소설로 분류되어 있기도 하지만 읽고 나면 지극히 에세이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에세이라고 하기엔 전부 본인이 겪은 것도 아니고, 전부 사실일 수도 없으며, 역사서에 정확히 기재된 것이 아닌 역사 들까지 있다보니 굳이 소설이라는 틀에서 나눌 수 밖에 없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외진 섬과 전라도라는 지역적인 특성이 주는 자조섞인 불만까지도 결국은 섬에서 느꼈던 감정의 하나였을 것이다. 쉬운 책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토리의 줄기를 찾기보다 ‘그 섬에선 그 때 그렇게 살았대’라는 생각으로 읽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덧붙인다면?

1. 대사임이 분명하지만 대부분을 따옴표나 다른 특수기호로 구분하지 않는다. ‘박범신’작가의 <외등>(2001)이 그랬던 것 같은데, 이런 구성이 처음 읽을 땐 굉장히 어렵게 느껴질 수 밖에 없겠다.


2. 전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 스토리가 없는 건 아쉽다.


​3. 고향의 이야기, 한 때 일상을 같이 한 사람들이 경험과 주워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하다면 추천, 자극이 있는 스토리의 부재와 고향의 투박한 무용담 전개가 별로라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바른북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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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 현대 편 - 대공황의 판자촌에서IS의 출현까지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
빌 포셋 외 지음, 김정혜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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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포인트는?

하나의 주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가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를 설명하는 건 무리가 있다. 책 소개에서도 볼 수 있는 것 처럼 선택, 특히 매우 잘못된 선택에 대한 짤막한 에피소드이다 보니 짧은 건 2 page분량부터 긴 내용은 10 page가 넘는 것도 있는데, chapter 하나 기준으로 좀 긴 인터넷 신문 기사만큼부터 잡지 책 특집 기사 분량이라고 생각하면 쉬울 듯 하다. ​


익히 알려진 ‘진주만 공격과 미국의 참전’과 ‘베트남전과 미국의 저항문화’ 같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어도 장황하지 않게 설명해주는 간단 명료함이 있어서 좋았고, ‘로널드 레이건이 <카사블랑카>에 출연했다면?’처럼 미국 대통령, 그리고 그에 따른 미국의 역사가 바뀌었을지도 몰랐을거라는 것이나 ‘배관공 요원들을 만들어낸 닉슨의 두려움’같은 대체 역사에 관한 상상을 그려볼 수도 있는 내용들은 전혀 몰랐던 것이기도 해서 더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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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그는 로맨스 영화에서 주인공을 연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가트와 계약하기 전에 물망에 올랐던 또 다른 배우가 있었다. 워너브라더스의 전속 배우였는데, 누구나 들어 봤음직한 이름이다. 1942년 1월 7일 워너브라더스 산하 할리우드 뉴스프레스 서비스가 다음과 같은 성명문을 발표했다. “앤 셰리든 Ann Sheridan과 로널드 레이건 Ronald Reagan이 영화 ‘카사블랑카’에 풀연할 예정이며, 이는 그들이 워너브라더스에서 세 번째로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다.

P.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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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편 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의 내용이 2000년 이전의 내용들이다. 물론 이 책의 원서가 쓰여진 시점에 따른 것이기도 하고,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주제만 골라내다보면 제한적이었을 수도 있다. 또 그 시점에 결정된 어떤 사건으로 지금 결과가 달라진 기업 - 대표적으로 넷플릭스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 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여기에 2010년 이후에 대한 이야기가 덧붙여졌다면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혹시 모르지만 <최근>편으로 한권정도 더 나오는 걸 기대해도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나다보니 신선함은 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인상깊은 부분은?

제목에서 보듯이 원래 101가지 이야기를 썼는데, 굳이 분권을 하는 바람에 <현대>편은51번째 chapter부터부터 시작을 한다. 만약 현대(정확히는 1930년대) 이전의 이야기들이 궁금하다면 <고대~근대>편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많은 주제가 전쟁에 관해 다루고 있는데, 이 전쟁이라는 게 얼마나 많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갖고 있으며, 평범한 사람이 특별한 인물이 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의 히틀러나 몽고메리 장군, 후세인에 관한 내용들까지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건 새로운 시각도 많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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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는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경고하는 소문과 보고서가 이어지는데도 깡그리 무시했다. 마치 중국이 개입하는 것은 천지가 개벽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중공군의 움지김이 포착되자 정보 소식통들은 대대적인 위협이 임박했다고 갈수록 단호한 어조로 경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1일 중공군이 미국 육군의 연대 하나를 공격했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결국 11월 25일 중국이 약 30만명의 엄청난 병력을 앞세운 인해전술로 공격했을 때에야 비로소 맥아더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P.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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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카리스마와 결정력으로 한국전쟁 승리에 큰 영향을 준 영웅이지만, 최근 여러가지 채널을 통해 그 이면엔 우리가 몰랐던 사실들이 있다고 회자되는 맥아더 장군에 대한 내용도 있으니 읽어보면 또 다른 생각도 들 것이다.(이상하게 읽는 순간에도 영화 <인천상륙작전>(2016, 이재한 감독)에서의 ‘리암 니슨’이 자꾸 떠오르긴 한다)

저자가 여러사람인 만큼 한권에51개의 각각의 이야기가 실려 있으므로, 독자도 다양하게 관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를 보고 관심이 가는 주제가 있다면, 그리고 그와 더불어 다른 이야기들도 읽어봐도 좋겠다는 마음이라면 썩 괜찮은 선택인데 예를 들어, 친구들과 커피 한잔 하는 자리에서 ‘초코칩 쿠키’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이야기를 나눈다면 아주 흥미로운 topic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사람들과의 모임에서 한번쯤 떠올릴만한 이야기를 알아간다고 보면 꽤 유익한 책이 될 것이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이 전쟁과 관련된 내용이 과반을 넘기는 건 좀 아쉽다.


덧붙인다면?

1. 긴 호흡이 아닌 짧은 시간에 한 chapter씩 읽어 나가기 좋으므로 머리맡에 두고 읽기 좋은 책인데, 굳이 분권할게 아니라 좀 두꺼운 한권으로 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2. 주 저자중 한명인 ‘빌 포셋’은 이런 비슷한 책을 이전에도 냈으니 관심이 있다면 더 찾아서 보는 재미도 있겠다. 


3. 역사 속 이야기를 가볍게 주제별로 나누어 읽는 잔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 인물이면 인물, 사건이면 사건 한 가지에 집중하는 역사서를 원한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다산북스(다산호당)'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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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미터O
이준영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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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포인트는?

이 SF는 배경에 대한 것만 ‘전 지구적’일 뿐 이야기는 굉장히 단조롭다. 등장인물에 비해 전반부의 너무 많은 정보가 ‘조슈’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소비된다는 건 극적인 변화가 없어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게 단점일 수도 있고, 전체적인 이야기를 속도감있게 읽어나가는 데는 장점일 수 있다.


우선 엔지니어라는 직업을 고려하더라도 시설 안에서 들리는 안내 목소리가 엄마 목소리라는 것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 전체가 '조슈'(물론 엘라도 함께 하긴 하지만 그냥 관찰자다)를 통해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른 상상이 대입되기가 어렵기는 하다. 또 다른 단점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리고 갈등관계에 있어서 시설에 문제-특히 외부적인-가 발생하는게 생존의 다툼이고, 원래 그 시설의 존재 목적이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 저장소-인간 수정을 포함한다-였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봤을 때 현재 거기에서 삶을 유지하는 인간들이 먼저인가, 아니면 다음 생을 위한 씨앗 저장소가 먼저인가 윤리적으로 따져봐야 하는 걸 너무 빨리 지나쳐 버리고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게 '조슈'의 몫이라는 게 단조롭다는 것이다. 다만 장점의 시각으로 보자면, 후반부를 위한 중요한 발견이 있기까지 다른 이야기에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줄곧 ‘조슈’의 시선으로 인물들과 배경을 보기 때문에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복잡한 상황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오로지 초반부의 배경 설명에 집중하고, 이브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조금씩 어떤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날지만 생각하면 되는데, 외부와 단절된 소사회小社會라는 유사 배경임에 비추어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Under the dome, 2011)이라는 소설을 읽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고 관계를 기억하며 읽어야 하는지 처음 읽으며 느낀 피로감을 생각해보면 이 소설의 장점이 쉽게 와닿는다.


​‘이브’라는 새로운 기계종이 처음 본 ‘조슈’를 보고 ‘창조주’라고 말하고 따르는 것에서 의아했는데, ‘창조주’라는 개념이 이미 이식되어 있으면서 왜 다른 정보는 제대로 입력되지 않아 사소한 단어의 의미까지 다시 설명해줘야 하는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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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이라는 것은 어째서 해야 하는 거죠?”

이브를 돌아보았다. 작은 기계종이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펼쳐 보이며 말했다.

“….우리 인간이 너흴 만든 이유가 그거니까.”

“제가 만들어진 이유사 일을 하기 위해서라구요?”

“그래. 모든 도구는 그 목적이 있어. 나무는 음식과 산소를 만들고, 태양전지는 전기를 생산하지. 네 경우엔, 인간을 위해 일하는 거야. 넌 기계종이니까.”

(중략)

“반대로 만약 ‘목적’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무언가라면, 우연히 창조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룰 방법이 전혀 없었던 행위가 목적의 범주에 포함될 ㅁ수 있을까요?”

“무슨 소리 하는거야? 우리가 널 만들어 줬으니까, 우리 말을 들어야지.”

“그 두 명제는 서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논리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P. 107 ~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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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는 ‘창조주’라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했지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전제되었어야 할 몇가지, 즉, 탄생의 목적이나 존재의 이유, 그 존재 이유와 ‘일’이라는 단어의 연관성도 전혀 유추하지 못하는 건 매우 뛰어난 AI와 이진컴퓨터의 사이 어디라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입력장치를 통해 모든 행동에 대한 정의를 글자로 입력시켜야 한다’는 걸 위한 설정에 따른 것이라서 조금 아쉽다. 


'이브'는 왜 만들어졌고, 그들은 어디에서 온 건지에 대해서는 후반부에 물 흐르듯이 잘 성명된다. '이브'는 단일종이 아니며, 이것이 후반부의 중요한 스토리가 되기도 한다.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경험에 따른 감정과 유사한 반응도 갖고 있고, 노예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순간 다른 기계종을 노예처럼 부리기도 하며, 심지어 파라미터에 의미를 이해하고 그걸 사명으로 여긴다든지, 그런 사명을 위한 자의적인 행동까지 하는 걸 보면 이는 단순히 노동력을 대신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하던 어떤 부분을 대체하기 위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면서 꺼름칙해지기도 한다. 



인상깊은 부분은?

사실 파라미터(parameter)라는 단어의 뜻을 이해하면 소설의 흐름이 더 쉬울 수도 있다. 파라미터(parameter)의 의미는 “한도를 정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프로그래밍 분야에서는 “매개변수로써, 두 변수를 연결해주는 변수. 즉, 둘 사이에서 양편의 관계를 구할 수 있게 해주는 수"이다. 소설에서와 같이 누군가는 입력을 하고, 그래야 어떤 개체는 행동한다. 때로는 변경하기도 하며, 그것이 이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 때문에 그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소설의 제목으로 한만큼 ‘조슈’가 ‘이브’에게 하는 행동은 중요하다. 그런데 등장인물 이름이 너무나 미국식이다. 인류의 멸망을 앞둔 세상, 인원이 많지는 않아도 아마 다양한 인종, 다양한 직업군들이 몰렸을텐데, '지호'라는 한국식 이름 외에는 전부 미국식 이름이다. 동양, 또는 제 3 세계의 사람들이 있고, 그들 역시 다양한 곳 출신이라면 문화나 음식, 그리고 언어 같은 차이에서 오는 더 많은 상상을 펼쳐낼 수 있었을 것이며, 거기에 인물 개개인의 이야기를 조금 더 교차될 수 있게 했다면 영화<설국열차>(Snowpiercer, 2013, 봉준호 감독)나 <캐리어스>(Carriers, 2009, 알렉스 패스터, 데이빗 패스터 감독)들처럼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풍부하고 더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왔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큰 고난을 지난 인류의 마지막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끔찍한 상황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부림지구 벙커X>(강영숙, 2019)와는 결이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조슈’가 엄마와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현재와는 많이 다름을 간접적으로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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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생각이 날 때마다 이곳에 오곤 해. 그리고 저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감탄하지. 그리곤 이런 생각도 한단다. 우린 이런 광경을 보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하고.”

구름이 만드는 그림자가 노을을 스티고 지나가자, 작열하는 빛의 사선들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했다. 

엄마는 마음에 드는 장소에 북극성 산, 생각 바다, 아침이슬 벌판 등의 지명을 즉석에서 지어 붙이곤 했다.

(중략)

“생물이란 생물은 곰팡이부터 수염고래까지 한 종도 남김없이 다 죽었으니, 이 행성에서 우리는 마지막 관객이야. 하지만 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저 태양은 계속해서 저 산 너머로 지겠지. 그 떄는 누가 이 장관을 봐주려나.”

“….그러게요.”

P.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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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비극적인 인류의 삶 보다는 외부에서 들어 온 존재, 다른 기계종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면에서 세기말의 어두움이 계속 느껴지지는 않으니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들도 쉽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의도적인건 아니지만 시설 안, 그 소수의 사람들 중에 범죄자가 있다든지, 감옥까지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따로 적지 않았는데 이것 역시 오롯이 작가가 의도한대로 ‘조슈’와 ‘이브’의 이야기로 집중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이다.


어떤 기록물에 남은 신화적인 상상보다는 인간이 어디선가 더 삶을 누린다는 걸 묘사한 소설로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래서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잠시 희망을 갖고 밝은 미래를 꿈꾸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안타까움’ 또는 ‘어딘가에는 기록되었을 것 같은 인류 최후의 순간에 떠올린 잊지못할 기억’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한가. 어떤 쪽일지는 읽는 사람 마음대로.


덧붙인다면?

1. 아무리 발전된 기계의 단계라도 유기체와 비슷한 logic으로 복제를 한다는 건 아직도 이해가 쉽게 가지는 않는다. 


2. 처음 시작 부분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한 소녀가 전파수신기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고 천천히 외부로 나가서 어딘가로 몸을 던지는 과정이 굉장히 정적이다.


3. 단순한 인물구조와 어렵지 않은 스토리, 너무 복잡한 이론이 등장하지 않는 가벼운SF소설을 읽고 싶다면 추천, ‘아이작 아시모프’나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무게감있는 대서사시를 원한다면 비추. 


* 이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개인 블로그에 올린 서평 내용 일부를 편집한 것입니다.

* 이 서평은 출판사 ‘황금가지'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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