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마이 송골매 - 교유서가 소설
이경란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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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키워드는 제목에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송골매'이다. 송골매를 모르는 사람도 요즘은 많겠지?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떠올리면 되겠다. 배철수, 구창모. 소설 속 주인공들과 작가에 비해 나는 아마 한 세대 뒤인 것 같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생방송 가요 프로그램에서 무대에 나왔던 배철수가 마이크를 잡자마자 쓰러져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강렬하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나 구창모의 <희나리>는 초등학생들도 떼창을 하던 노래다. 아무튼 나는 송골매 세대라기보다는 소방차와 박남정, 신해철과 윤상, 신승훈과 이승환 오빠를 두고 다투던 세대긴 하지만, '그 시절 우리가 함께 듣던, 함께 사랑했던 가수'에 대한 추억이라면 작가만큼은 풀어낼 수 있을 테다.

 'D-100'의 챕터로 시작하는 소설의 첫 번째 주인공은 '홍희'다. 고등학교 시절 성격 좋고 푼수 같지만 정도 많고 의리 있는, 각 반에 한 명쯤 반드시 있는 캐릭터다. 오십이 넘은 그녀는 남편과 일찍 헤어져 힘들게 식당 일을 하며 자식을 키웠고 삶에 대한 열망 따윈 잊은지 오래인데, 그런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일이 생긴다. 바로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이다. 콘서트 표를 사고 혼자서 가면 그만이지만, 홍희에게 '송골매'는 소녀 시절에 사랑했던 영원한 오빠들을 보는 것 그 이상이다. 송골매는 오래전 닫힌 문을 여는 열쇠인 셈이다. 그녀가 오랜만에 열어 보는 세계는, 송골매 오빠들과 동시에 오빠들을 같이 좋아하며 온 삶을 함께 나누었던 친구들이 있는 세계이다. 이제 홍희가 열망하는 것은 바로 그 시절, 돌아올 수 없는 날들을 함께 한 친구들이다.

 송골매 재결합 콘서트는 이처럼 고등학교 시절, 사총사라고 불렸던 친구들의 재결합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네 명의 여주인공을, 각자의 중년의 삶의 사정을,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에서부터 비롯된 인생과 관계에 대한 탐색을 한 쾌로 엮어주는 역할을 한다. 네 명의 주인공은 각각 성격도, 외모도, 환경도, 인생도 다르지만 읽는 독자의 입장에선 한없이 친숙하다. 여고 시절을 떠올리면 내 친구 누구하고 꼭 같네 하고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인물들. 작품은 각 챕터별로 그들의 고등학교 시절과 그 시절에서 이제는 멀어져 버린 중년 여성의 삶을 모자이크 한다. 에피소드 형식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은 송골매 콘서트가 가까워지는 'D-day'를 향해 갈수록 하나로 모이는데, 누구나 다 짐작할 수 있는 결말이지만 과연 그들이 어떻게 재회하고 어떤 모습으로 조우하게 될 것인가라는 궁금증을 버릴 수 없다. 다 아는 결말, 예상을 빗나가지 않는 모두의 해피엔딩임에도 끝까지 책을 덮을 수 없는, 일종의 통속 드라마 같달까.

 또 하나, 이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노래'이다. 송골매가 등장하는 것은 작품의 마지막 단 한 장면뿐인데, 작품이 진행되는 내내 그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중간중간 그들의 노랫말이 적재적소에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본디 소설 속 노래(시)의 인용은 감정과 여운의 깊이를 더하고, 생략된 많은 말들을 대신하며 서정을 증폭시킨다 하지 않았던가. 열 마디의 말보다 한 소절의 노래가 때로는 인물의 심리와 작품의 정서를 더 잘 전달하는 법이다. 하물며 송골매의 팬이라면, 그렇지 않다 해도 가수를 좋아하고 그들의 노랫말을 삶의 의지 삼아 세월을 견디고 추억을 쌓아 본 이들이라면. 이야기 속 노랫말이 주는 감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 영리하게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노랫말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 노래들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쩌다 마주친' 하지만 '영원히 서로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도와 축복과 삶으로 폭발된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이제는 중년의 여성이 되어버린 나는 사실 이 작품에 처음부터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이야기는 굳이 읽고 싶지 않으니까, 모든 우연의 요소들이 결합하여 우리가 다 행복해지는, 그런 반짝이는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니까. 혹은 어쩌다 찾아온 그 순간조차 그 뒤에 이어질 공허와, 일상의 간극을 먼저 생각하며 외면하기 마련이니까. 끝까지 이 책을 순수한 소녀의 마음으로 두근거리며 읽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작품은 흥미롭게 읽혔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어쩐지 서글퍼졌다.

 삶은 때로는 우연하게, 예측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반짝임의 순간을 주기도 하고, 터무니없다고 생각한 해피엔딩이 실제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이고, 우리는 다시 현실을 산다. 변하는 것은 무엇도 없다. 그리하여 삶과 소중했던 이야기 사이의 간극은 깊어가기만 한다. 그런데 오늘 책장을 덮으며 나는 생각한다. 비록 나는 이제는 삶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고도 서글퍼하지 않지만 말이다. 작품 속 그녀들의 만남이, 삼십팔 년 만의 재결합이라는 송골매의 콘서트가, 비록 오늘, 단 하루만 가능한 그런 날의 이야기일지라도, 괜찮아, 상관없어. 우리는 또 시시하고 평범한 날들을 살아갈 것이다. 기대하지 않고도 서글퍼하지 않지만, 기다리지 않고 열망하지 않지만, 또 어떤 날에는 문득 그 단 하루만 가능한 날이 찾아올지도 모르지. 불과 몇 년 전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난 믿지 않았을 것 같다. 그건 너무 유치하고 격이 없지 않니. 너무 흔해빠지고 통속적인 이야기 아니니. 그런데 그게 삶이라는 걸 요즘의 나는 깨닫는다. 

 문득 잊혀진 친구, 사라진 추억, 이제는 까마득해져버린 학창 시절의 우정, 그 모든 순수했던 삶의 시간이 그리운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더불어 '노래'의 힘으로 슬픔과 기쁨을 위안하며 사랑과 공감을 나누었던 추억을 가진 이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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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쳐 돌아가는 저녁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손홍규 지음 / 교유서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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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름다운 산문집은 오래전 소설가를 꿈꾸던 한 소년이 절망을 통해 문학에 입문하고, 길 위의 방랑과 수많은 사연을 전해 들은 밤과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통해 소설을, 글을 써 내려가며, 그렇게 이제는 작가(소설가)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소설가가 되기를 꿈꾸는 삶의 기록이다. 문학, 소위 '글'이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써야 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작가는 자신의 생이라는 하나의 선 위에서 여러 사연이 얽혀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을 담담히 응시한다. 그것을 듣고 기록하고 전하는 이로서 문학의 소임을 풀어낸다. 말하자면 문학의, 문학을 위한, 문학에 대한 에세이인데,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간결한 문체에 깊은 서정이 담겼다.

 손홍규 작가의 삶은 문학이고, 그에게 문학은 '소'다. 소,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소를 기르고 자식을 위해 소를 팔고, 가정이 몰락하여 온 가족이 비참한 선택을 할 때에도 묵새기며 마지막까지 등을 어루만지는, 사람들의 삶과 함께 하고 사람들의 삶을 증언해 주는 최후의 유일한 목격자. 하지만 더 이상 소를 한 집안의 기둥처럼 지키고 기르는 이들이 사라지고 공동체의 삶이 붕괴될 때에 소는 점점 작아진다. 시대의, 시절의, 사람들 이야기의, 그 붕괴의 중심에 있는 이는 바로 '소'다. 소년 시절로부터 청년에 이르도록 모든 이야기의 기록자였던 소를 팔고 돌아온 밤, 아버지는 작가에게 '이래도 소설이라는 것을 쓸 테냐'라고 묻는다. 하지만 소설을 쓰고 말고 할 게 있나. 소, 한 시대와 모든 사람들의 사연을 묵묵히 듣고 있던 소. "소설은 이미 소가 다 써버렸다"는, 이 작품집의 첫 수필 <문학은 소다>의 마지막 구절은, 작가의 정체성과 글쓰기의 근원을 표상한다. 작가에게 '소설(문학)'은 바로 '소'이며, 이는 "세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는 것만으로도 소설이 되는 비장하게 희극적인 삶을 외면할 수 없는" '듣는 이', 최후의 유일한 목격자, 이야기 전달자로서의 삶이다. 이렇게 '소'는 한 작품을 통해 '문학'의 지독하고 마음 아린 처절한 은유가 된다.

 오래간만에 첫 작품(「문학은 소다」)부터 너무 아름다워,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 작가와 작품을 만났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때론 부조리하고 때로는 험하며 때로는 서럽고 원망스럽지만, 분노하고 투쟁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기 보다 경계와 편견 없이, 그 누구가 되었든 사연이 있는 이라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가 한 사람을 빛나게 하는, 그런 '듣는 귀'가 있는 작가를 알게 되어 기쁘다. 진실과 서정과 세상을 보는 균형과, 그리고 아름답고 간결한 문체를 동시에 지닌 작가의 이 산문집을 추천한다. 작가가 들려주는 사람들의 사연과 각자 각자의 언어와 그 말들이 교류하며 지어내는 깊은 세계를 통해 나 자신의 사연을 회상하는, 이야기의 단초가 필요한 이들에게 특별히 더 이 작품을 추천한다.  


*교유당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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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준의 생활명품 101
윤광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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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윤광준'은 작가이자 사진가로 미술, 음악과 공연, 건축과 디자인 등 경계를 넘나들며 '향유'하는 전방위 예술 애호가이다. '생활 명품' 시리즈는 이십 여 년 동안 신문에 연재되었다는데, 이번에 출판된 이 책은 생활 명품 시리즈의 완결판이다.

저자는 이십 여 년 간 '생활 명품'이라는 주제로 시장, 전문 매장, 백화점, 수입사를 비롯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물건'을 찾고 발굴하고 향유한다. 이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인간의 순수한 '호기심'의 발원인 동시에 수많은 대상 중 자신의 가치 기준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가치 부여의 과정이기도 하며, 우리를 둘러싼 물성화 된 무엇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규정하는지 그 방식과 철학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 즉 이는 인간이 태초부터 지니고 있는 '도구적 인간'의 습성과 동시에 '예술적 인간', '향유하는 인간'의 면면을 드러내니, 단순히 백한 가지의 물건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본성에 대한 탐구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가 곁에 두고 늘상 사용하는 물건'에 대한 재인식이 가능한데, 말하자면 일상을 그저 매일 반복되는 날들의 하나가 아닌, 나의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는 취향, 즉 라이프 스타일의 표상으로 다시금 바라 보게 된다.

또한 이 책이 흥미로운 까닭 중 하나는 각각의 물건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나 그 물건을 만든 이의 철학에 대한 소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솔직히 물건을 향유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사사로운 이야기만을 담았다면 요즘 SNS에 넘쳐 나는 감각적이고 개성적인 글보다 이 책이 나을 게 없다. 그런데 이 책의 가치는 저자가 오랜 세월 동안 직접 발품을 팔며 물건의 근원에 대해 탐구했다는 것에 있다.

소비자의 입장이 아닌 생산자, 제작자,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물건'은 다양한 가치 실현의 장이자 독특한 아이디어와 남다른 관점의 표상이다. 인류가 시작된 이래 실용성을 위해서든 종교와 예술을 위해서든,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발걸음을 떼는 용기와 탐구 정신이 '도구'와 '물건'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끝없이 인간은 탐구와 도전 정신으로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는데 이러한 인간 정신의 표상 중 하나가 바로 '물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명품'이란 소비자의 입장에서 범접할 수 없는 돈의 기준으로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 아닌, 생산자와 제작자의 입장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개척의 대가로 부여 받을 수 있는 이름인 셈이다. 어찌 되었든, 양측 모두에게 '물건', '도구'는 각자 삶의 방식,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스타일을 드러내는데, 이 양측의 입장을 균형감각 있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글들이 상당히 흥미롭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백한 가지의 물건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일상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우려는 태도가 라이프 스타일이다"일 것인데, 이 책에서는 '물건'이 '라이프 스타일'의 대유이지만, 시간을 채우는 것이 반드시 물건일 필요는 없다는 깨달음이다. 저자에게는 다양한 물품이, 나에게는 '책'이라면 누군가에게는 여행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산책일 것이다. 누군가는 정원을 가꾸고 누군가는 사람을 사랑하며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누군가는 도구를 제작하겠지. 저자가 말하는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경험', 수없이 실패하더라도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을 버리지 않고, 고착화된 관점과 습관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려는 정신, 실은 그 자체가 우리 삶의 명품인 셈이다.


*을유문화사 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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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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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러프하게 말하자면, '가벼운 문명사의 기록' 정도 되는 에세이다. 저자인 '가이 대븐포트'는 'stilllife' 즉, '정물'이라는 단어의 기원을 밝히며 글을 시작한다. 단어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역사에 관한 글에서 처음 쓰였으나 '정물 stilllife'이라는 용어가 그제야 언급된 것일 뿐, '정물' 그 자체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밝히는 '정물'의 기원은 크게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있다. 사자死者의 곁에, 동굴 벽화 등에 음식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음식'이라는 '정물'이 삶과 생존과 풍요로움의 자양분이라고 여긴 원시적 생각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역사인 구약 성경에도 '음식' 곧 음식이 담긴 '정물'은 상징의 핵심이다. 풍성한 과일 광주리는 가득 차 있음,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먹지 않으면 부패할, 풍요의 정점인 동시에 종말의 기원이라는 양면성을 보여 준다.

이렇게 정물은 여러 신화와 문명 속에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상징으로 기능한다. 역으로 보자면, '문명'은 신화와 상징을 필수적 요소로 성립하는 것이니, '정물', 곧 상징의 대상이 되는 무엇은 문명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정물은 시시때때로 변화를 거듭하며 인류 역사와 문명 속에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정물'이 새로운 동시에 또한 보편적인 의미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양의 사과와 배, 과일 광주리, 성경 책, 망원경. 지도, 흉상, 악기, 과일, 꽃병, 책. 이 다양한 '정물'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억 만 년에 걸쳐 반복되는 창조와, 이 반복적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순환적 재앙과 파괴이다. 저자의 말을 따라 기독교적 버전으로 보자면 '현재의 안녕이 곧 미래의 재앙'이며, "모든 아름다움에 내재된 비극에 관한, 특별히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상징"으로서 정물은 기능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정물'은 시대를 지나며 탄생, 진부함, 몰락, 재탄생의 경험을 반복하는데 이는 인류 문명의 순환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책의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인데, 이를 크게 네 챕터로 나누어 저자는 흥미롭게 설명한다. 첫 번째 챕터는 <여름 과일 광주리>로 정물의 기원과 정물의 의미, 두 번째 챕터는 <운명의 두상>으로 '두상'이라는 정물로 상징되는 인류, 예술, 문명의 순환, 세 번째 챕터는 <사과와 배>, 그리고 고흐의 '양파'까지 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핵심 소재로 작용한 정물의 상징성을, 마지막 챕터는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으로 '니체', 즉 그의 영원회귀설을 생각할 때, 결국 정물의 순환과 문명의 순환이 그 궤를 같이한다는 주제의 역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정물'이라는 이 풍요로운 상징물을 통해 문명과 예술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이를 씨실 삼는다면, 구약 성서, 디킨스, 카프카, 아서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조이스,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세잔, 니체, 다채로운 신화와 역사서 등을 날실 삼아 책을 엮는다. 책의 외관처럼 사실 이 저작물은 가볍고 심플한 규정하기 어려워 '에세이'라고 칭하는 글이지만, 책 자체의 깊이보다는 일종의 지도 같은 책이랄까. 궁금하면 더 읽어 봐!를 외치는 복잡하게 얽힌 미로를 내포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보다는 고흐의 편지를 더 흥미롭게 읽은 내 입장에선 고흐의 '양파'도 흥미로웠고, '에밀 졸라'의 기괴하고 음울하며 다분히 의도성이 짙어서 더 섬뜩했던『작품』이 그의 친구 '세잔'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기에 세잔의 '사과'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문명의 역사를 아폴론적 문화(고전), 파우스트적 문화(고딕), 마기적 문화(아라베스크)로 구분하고 이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어셔 가의 몰락』에 대비하여 어셔의 식탁, 그의 책, 그리고 '집'까지 정물에 담긴 상징성과 몰락, 즉 문명의 파괴와 재탄생을 보여주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가장 여러 번 읽으며 의미를 되새겨 본 부분은 2장 <운명의 두상> 즉 셜록 홈스의 파괴된 흉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이 대븐포트는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언급한다. 오래전 문명과 신화에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보다는 몸, 즉 육체이자 신체였다. '지, 덕, 체' 세 가지 덕목 중 우선 겸비해야 할 것을 꼽으라고 하면 결코 '지'만을 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우리의 세기가 고대 신화의 웅장함과 규칙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기 시작할 때 인간에게 남은 것은 육신이 아닌 오로지 '머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홈스의 흉상-혹은 두상은 '머리' 즉 지성과 사고, '얼굴' 즉 개인과 개별을 가능하게 하는, 근대의 산물이자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흉상-두상'이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여섯 개의 나폴레옹 형상에서 셜록 홈스가 파헤치는 사건은 그 무렵 어느 집에나 전시되었던, 싸구려 장식품으로 전락한 정물인 나폴레옹 형상이 차례로 파괴되는 것이다. 추리 소설의 표면만 읽자면 이는 희귀한 보석을 숨긴 이탈리안 세공사의 계략이었지만,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그 아래 본질적 의미를 숨겨 둔다. 작품에서 흉상은 산산조각으로 파편화된다. 즉, 흉상은 다시는 복원할 수 없게 파괴되는 운명인 것인데, 말하자면 이야기의 이면에는 '흉상-두상'의 '폭력적 파괴'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시 한번 차근히 살펴보자. 나폴레옹 흉상은 고대 신화의 상징을 잃고 싸구려 장식품으로 전락하였다. 즉, 상징성이 고갈된 이 흉상은 '정물'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잉여물이다. 이러한 흉상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은 그러니 '예술', '주기적으로 그 의미가 고갈되고 가치를 상실한 예술'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탄생을 예고한다. 예술, 혹은 문명의 종말과 재탄생의 선언이 바로, 홈스의 흉상인 것이다.

『스틸라이프』의 작가도, 역자도, 그리고 이 책을 보내준 출판사의 편집자도 "정물을 통해 우리의 삶과 역사, 문명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질문은 '지금 당신의 테이블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매일의 삶 속에서 여기저기 부딪쳐 오는 내 주변의 사물과 SNS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끝내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넘쳐나는 물질과 풍요로움의 정점, 수많은 정물과 이미지들의 반복 재생산이 무의미하고 또 재빠르게 일어나는 이 시대는 인류 문명사의 어떤 부분일까. 무엇이 파괴되고 무엇이 재생산되며, 어떤 충족과 몰락의 예고를 내포하는가?

아서 코난 도일은 흉상의 파괴를 통해 예술의 재탄생을 선언하였는데, 그 후로 예술은 재탄생 되었는가? 현대를 무無정물의 시대라고 본다면,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것, 종말을 고함으로써 재탄생을 예고하는 것은 단지 가치 전락한 예술의 일종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머리(뇌-지성-가치-사고)와 얼굴(개인-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맞닥뜨리는 진일보한 형식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깊은 상징을 지닌 정물은 무엇이며, 재구성과 재탄생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펼쳐낼 고전이 될 작품들, 레퍼런스들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너무 흥미진진하게, 씨실과 날실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참고 자료들과 책들의 향연에 감탄하며 읽기 시작한 에세인데, 책장을 덮으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된다.

나의 식탁에, 내 책상에, 우리의 집에, 그렇게 '나'를 이루고 있는 '정물'은 무엇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실 우리 집은, 나의 식탁은, 참으로 별것이 없다. SNS에 서평을 쓰기 위해 책 사진을 찍으려다가, 요즘의 '정물'은 더욱 교묘하고 더욱 가면적인 위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 하는 정물이 아닌, 정물의 이미지를 정물로 여기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정물은 이제 너무나 인위적이다. 가장 정물이 우위에 선, 정물이 인간을 대체해 버린, 그런 시대, 그러한 문명. 선처럼 이어지는 기나긴 흐름 속에 자연스레 번영했다가 쇠퇴하고 가치 전락의 끝에 파멸하지만 그 파멸이 재생산의 원동력이 되는, 그러한 문명의 시대는 지나간 것일까. 밀집된 시간과 공간, 응축된 집단의 에너지와 유행 속에 실은 모두 개개인 양 위장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하나의 정물이, 하나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순식간에 복제되고 확대되는 시대가 요즘이 아니던가. 사실 난 좀 요즘 세상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볼 것 없는 이미지들에 질려가는 중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이 대븐포트'의 책 『스틸라이프』는 시의적절한 동시에 또 하나의 무無정물이다.

씨실과 날실을 복잡하게 엮어 그 안에 교묘히 미로를 숨긴, 그 실들을 각기 풀어내 또 다른 영역의 독서로, 새로운 관점의 해석으로 자기만족적 독서를 충족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더불어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셜록 홈스와 에드거 앨런 포를 탐닉한 사람이라면. 세잔의 사과를 보며 에밀 졸라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미스터리를 떠올릴 수 있는 이라면. 그저 감각적인 책 한 권을 내 책상 위의 정물로 소유하고 사진 찍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을유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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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뤼아르 시 선집 을유세계문학전집 121
폴 엘뤼아르 지음, 조윤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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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엘뤼아르'는 189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하여 학업을 중단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기적으로 1차,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다. '앙드레 브레통'의 초현실주의 선언에 동참하여 초기에는 다다이즘, 초현실주의적인 시를 썼다.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등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며, 문학과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 삽화 시를 쓰거나 시를 하나의 이미지로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의 시 중, 「그려진 말言」이라는 작품은 '파블로 피카소에게'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제목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 시의 음악성, 회화성, 함축성 중 회화성을 강조하는 시들이 상당히 많다.

초현실주의 경향을 띠는, 이러한 초기의 시들은 상당히 파편적이다. 시가 본래 논리의 영역은 아니지만, 논리와 이성을 철저히 넘어 연결되지 않는 것들을 끝없이 나열하거나 반복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비현실적 이미지를 창조한다. 이러한 낯선 이미지들의 배열을 통해 시인은 끝없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불안전한 현실과 무질서한 세계,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는 소멸된 세상의 불완전성을 표현한다.

시인의 생애에서 후반부에 이르러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며 그의 시 세계는 초현실주의에서 참여 시로 급격한 전환을 이룬다. 여전히 그의 시에는 '나'와 '너', '그녀', '손', '얼굴', '입술', 그리고 다양한 동물-물고기나 바람, 새, 나무, 뿐만아니라 '밤', '빛', '꿈' 등 초기 시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의미를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았던 초기 시에 비하면 후기 시는 상당히 직설적이다. 민중의 평화, 자유와 독립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저항시를 썼다는데, 그 대표작인 「자유」가 이러한 경향성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이렇게 시인의 전기적 요소, 시인의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시를 읽다 보면 평범한 독자로선 와닿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어, 무의식이나 꿈, 무질서를 추구하는 초현실주의적 시와 사회적 실천과 저항이라는 목적이 뚜렷한 참여 시는 얼핏 보기엔 양립할 수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어쿠스틱 기타를 연주하던 컨트리 송 가수가 어느 날 갑자기 일렉트로닉 한 전자 음악의 추앙자가 되는 느낌이랄까. 어설픈 비유지만 말이다. 아무튼, 시인의 스펙트럼이 다채롭다는 게 이 시인의 다재다능함을 보여주는 것인지, 시인의 영혼이 불안하고 혼란스러움을 보여주는 것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러한 작가적 요소를 걷어 내고 시 선집을 읽다 보면, 나름 일관된 기조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이 선집은 번역자의 선택에 따라 각 시집에서 골라낸 작품이기 때문에 온전한 감상에는 한계가 있다.)

한 시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각 시집의 대표작을 한 번에 읽어볼 수 있는 것은 흔한 기회가 아니다. 좋아하는 작가가 생겼을 때, 될 수 있으면 그의 처녀작을 읽고 반드시 마지막 작품을 읽으려 노력하는 편인데,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그 처음과 끝이 가장 그 사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엘뤼아르의 전 작품을 대충이라도 훑어볼 수 있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앞서 말한, 너무 다채로운 스펙트럼이 작가에 대한 편견과 일종의 반감을 형성하게 했지만 막상 선집을 읽으며 엘뤼아르가 어떠한 경향의 시를 쓰든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나'와 '너'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너'. 자아와 타자. 엘뤼아르는 시에서 '너'라는 대상을 때로는 '너'라고 그대로 명명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 '너'라는 대상은 끊임없이 변주하며 다채롭게 드러난다. '너'는 '그녀'이기도 하고, 실제로 사랑했던 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너'는 단순히 사랑하는 대상, 이성으로서의 여성을 넘어 자연이기도 하고, 순간의 이미지이기도 하며, 포착되는 삶의 한 감각이거나, 어둠, 빛, 환상, 꿈 등이기도 하다. 이렇게 '너'는 변주를 거듭하며 후기 시에 이르러 '우리'로 확장된다. 그의 시의 핵심 주제는 '사랑'이었다는데, 결국 그의 생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경계를 허문 관계, 동일성의 발견을 통한 동일화되어짐, 즉 타자의 새로운 정의가 아닐까. 즉, '타자'는 '나'와 경계를 허물고 '우리'가 되는데, 이는 '나' 자신이 삶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 세계와 경험이 나 자신의 또 다른 일면이자, 경계 없이 관계하는 하나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엘뤼아르 시 선집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점 중 하나는 그의 이 낯선 시들이 국내 문학 작품에 상당수 패러디되었다는 점이다. 양귀자의 소설 제목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엘뤼아르의 시 「모퉁이」의 전문이며,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에 큰 희망이 되었다는 시 「자유」는 김지하의 시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모티프도 아닌, 정말 모방 시 수준으로 패러디되었다. 콕 집어 어떤 부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황동규 시인의 「조그만 사랑 노래」에서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와 같은 구절이 형성하는 이미지를 엘뤼아르의 시를 읽으며 떠올릴 수 있었다.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도 엘뤼아르의 시, 「그려진 말言」과 그 취지나 바탕이 너무나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타국의 언어로 된 이 낯선 시들은 국경을 넘어 또 다른 세계의 문화와 예술에 많은 영향과 영감을 끊임없이 미치는 것이다. 작품을 읽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지만, 번역 시를 읽는 묘미와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한 쾌에 꿰뚫을 수 있어서 좋았다. 독서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싶은 분들께, 원어가 주는 아름다움을 모국어와 비교하며 읽어 보고 싶은 분들께 이 책을 권한다.


*을유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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