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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라이프
가이 대븐포트 지음, 박상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7월
평점 :
이 책은 러프하게 말하자면, '가벼운 문명사의 기록' 정도 되는 에세이다. 저자인 '가이 대븐포트'는 'stilllife' 즉, '정물'이라는 단어의 기원을 밝히며 글을 시작한다. 단어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의 역사에 관한 글에서 처음 쓰였으나 '정물 stilllife'이라는 용어가 그제야 언급된 것일 뿐, '정물' 그 자체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저자가 밝히는 '정물'의 기원은 크게 이집트와 이스라엘에 있다. 사자死者의 곁에, 동굴 벽화 등에 음식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은 '음식'이라는 '정물'이 삶과 생존과 풍요로움의 자양분이라고 여긴 원시적 생각을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역사인 구약 성경에도 '음식' 곧 음식이 담긴 '정물'은 상징의 핵심이다. 풍성한 과일 광주리는 가득 차 있음,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동시에 먹지 않으면 부패할, 풍요의 정점인 동시에 종말의 기원이라는 양면성을 보여 준다.
이렇게 정물은 여러 신화와 문명 속에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며 상징으로 기능한다. 역으로 보자면, '문명'은 신화와 상징을 필수적 요소로 성립하는 것이니, '정물', 곧 상징의 대상이 되는 무엇은 문명의 출발점이 되는 셈이다. 정물은 시시때때로 변화를 거듭하며 인류 역사와 문명 속에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정물'이 새로운 동시에 또한 보편적인 의미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양의 사과와 배, 과일 광주리, 성경 책, 망원경. 지도, 흉상, 악기, 과일, 꽃병, 책. 이 다양한 '정물'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수억 만 년에 걸쳐 반복되는 창조와, 이 반복적 창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순환적 재앙과 파괴이다. 저자의 말을 따라 기독교적 버전으로 보자면 '현재의 안녕이 곧 미래의 재앙'이며, "모든 아름다움에 내재된 비극에 관한, 특별히 다층적 해석이 가능한 상징"으로서 정물은 기능하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정물'은 시대를 지나며 탄생, 진부함, 몰락, 재탄생의 경험을 반복하는데 이는 인류 문명의 순환과 그 흐름을 같이한다.
책의 핵심 주제는 바로 이것인데, 이를 크게 네 챕터로 나누어 저자는 흥미롭게 설명한다. 첫 번째 챕터는 <여름 과일 광주리>로 정물의 기원과 정물의 의미, 두 번째 챕터는 <운명의 두상>으로 '두상'이라는 정물로 상징되는 인류, 예술, 문명의 순환, 세 번째 챕터는 <사과와 배>, 그리고 고흐의 '양파'까지 태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핵심 소재로 작용한 정물의 상징성을, 마지막 챕터는 <토리노의 형이상학적 빛>으로 '니체', 즉 그의 영원회귀설을 생각할 때, 결국 정물의 순환과 문명의 순환이 그 궤를 같이한다는 주제의 역설이다.
말하자면 저자는 '정물'이라는 이 풍요로운 상징물을 통해 문명과 예술의 순환을 이야기한다. 이를 씨실 삼는다면, 구약 성서, 디킨스, 카프카, 아서 코난 도일, 에드거 앨런 포, 제임스 조이스, 반 고흐, 클로드 모네, 세잔, 니체, 다채로운 신화와 역사서 등을 날실 삼아 책을 엮는다. 책의 외관처럼 사실 이 저작물은 가볍고 심플한 규정하기 어려워 '에세이'라고 칭하는 글이지만, 책 자체의 깊이보다는 일종의 지도 같은 책이랄까. 궁금하면 더 읽어 봐!를 외치는 복잡하게 얽힌 미로를 내포하고 있다.
고흐의 작품보다는 고흐의 편지를 더 흥미롭게 읽은 내 입장에선 고흐의 '양파'도 흥미로웠고, '에밀 졸라'의 기괴하고 음울하며 다분히 의도성이 짙어서 더 섬뜩했던『작품』이 그의 친구 '세잔'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고 있기에 세잔의 '사과'에 대한 이야기도 무척 재미있었다. 문명의 역사를 아폴론적 문화(고전), 파우스트적 문화(고딕), 마기적 문화(아라베스크)로 구분하고 이를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어셔 가의 몰락』에 대비하여 어셔의 식탁, 그의 책, 그리고 '집'까지 정물에 담긴 상징성과 몰락, 즉 문명의 파괴와 재탄생을 보여주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그럼에도 가장 여러 번 읽으며 의미를 되새겨 본 부분은 2장 <운명의 두상> 즉 셜록 홈스의 파괴된 흉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이 대븐포트는 "정물이 지속되는 한 두상이 우리의 운명이다"라고 언급한다. 오래전 문명과 신화에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머리보다는 몸, 즉 육체이자 신체였다. '지, 덕, 체' 세 가지 덕목 중 우선 겸비해야 할 것을 꼽으라고 하면 결코 '지'만을 꼽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우리의 세기가 고대 신화의 웅장함과 규칙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개성이 존중되기 시작할 때 인간에게 남은 것은 육신이 아닌 오로지 '머리'이다. 이런 관점에서 홈스의 흉상-혹은 두상은 '머리' 즉 지성과 사고, '얼굴' 즉 개인과 개별을 가능하게 하는, 근대의 산물이자 공동체로부터 분리된 개인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흉상-두상'이 파괴되었다는 점이다. 「여섯 개의 나폴레옹 형상」에서 셜록 홈스가 파헤치는 사건은 그 무렵 어느 집에나 전시되었던, 싸구려 장식품으로 전락한 정물인 나폴레옹 형상이 차례로 파괴되는 것이다. 추리 소설의 표면만 읽자면 이는 희귀한 보석을 숨긴 이탈리안 세공사의 계략이었지만,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그 아래 본질적 의미를 숨겨 둔다. 작품에서 흉상은 산산조각으로 파편화된다. 즉, 흉상은 다시는 복원할 수 없게 파괴되는 운명인 것인데, 말하자면 이야기의 이면에는 '흉상-두상'의 '폭력적 파괴'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다시 한번 차근히 살펴보자. 나폴레옹 흉상은 고대 신화의 상징을 잃고 싸구려 장식품으로 전락하였다. 즉, 상징성이 고갈된 이 흉상은 '정물'이라고 부를 것도 없는 잉여물이다. 이러한 흉상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은 그러니 '예술', '주기적으로 그 의미가 고갈되고 가치를 상실한 예술'이 철저히 파괴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새로운 탄생을 예고한다. 예술, 혹은 문명의 종말과 재탄생의 선언이 바로, 홈스의 흉상인 것이다.
『스틸라이프』의 작가도, 역자도, 그리고 이 책을 보내준 출판사의 편집자도 "정물을 통해 우리의 삶과 역사, 문명의 흐름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의 질문은 '지금 당신의 테이블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로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가, 매일의 삶 속에서 여기저기 부딪쳐 오는 내 주변의 사물과 SNS의 이미지들을 보면서 나는 끝내 의구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넘쳐나는 물질과 풍요로움의 정점, 수많은 정물과 이미지들의 반복 재생산이 무의미하고 또 재빠르게 일어나는 이 시대는 인류 문명사의 어떤 부분일까. 무엇이 파괴되고 무엇이 재생산되며, 어떤 충족과 몰락의 예고를 내포하는가?
아서 코난 도일은 흉상의 파괴를 통해 예술의 재탄생을 선언하였는데, 그 후로 예술은 재탄생 되었는가? 현대를 무無정물의 시대라고 본다면,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것, 종말을 고함으로써 재탄생을 예고하는 것은 단지 가치 전락한 예술의 일종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인간으로서 우리 자신의 머리(뇌-지성-가치-사고)와 얼굴(개인-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시대에 우리가 맞닥뜨리는 진일보한 형식은 무엇일까? 우리에게 깊은 상징을 지닌 정물은 무엇이며, 재구성과 재탄생으로 다음 스테이지를 펼쳐낼 고전이 될 작품들, 레퍼런스들은 무엇일까?
처음에는 너무 흥미진진하게, 씨실과 날실로 복잡하게 얽힌 수많은 참고 자료들과 책들의 향연에 감탄하며 읽기 시작한 에세인데, 책장을 덮으며 조금 씁쓸한 기분이 된다.
나의 식탁에, 내 책상에, 우리의 집에, 그렇게 '나'를 이루고 있는 '정물'은 무엇인가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사실 우리 집은, 나의 식탁은, 참으로 별것이 없다. SNS에 서평을 쓰기 위해 책 사진을 찍으려다가, 요즘의 '정물'은 더욱 교묘하고 더욱 가면적인 위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실제 하는 정물이 아닌, 정물의 이미지를 정물로 여기게 되면서, 우리가 아는 정물은 이제 너무나 인위적이다. 가장 정물이 우위에 선, 정물이 인간을 대체해 버린, 그런 시대, 그러한 문명. 선처럼 이어지는 기나긴 흐름 속에 자연스레 번영했다가 쇠퇴하고 가치 전락의 끝에 파멸하지만 그 파멸이 재생산의 원동력이 되는, 그러한 문명의 시대는 지나간 것일까. 밀집된 시간과 공간, 응축된 집단의 에너지와 유행 속에 실은 모두 개개인 양 위장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하나의 정물이, 하나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순식간에 복제되고 확대되는 시대가 요즘이 아니던가. 사실 난 좀 요즘 세상이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생각하고, 볼 것 없는 이미지들에 질려가는 중이다. 이런 관점에서 '가이 대븐포트'의 책 『스틸라이프』는 시의적절한 동시에 또 하나의 무無정물이다.
씨실과 날실을 복잡하게 엮어 그 안에 교묘히 미로를 숨긴, 그 실들을 각기 풀어내 또 다른 영역의 독서로, 새로운 관점의 해석으로 자기만족적 독서를 충족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더불어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이라면. 셜록 홈스와 에드거 앨런 포를 탐닉한 사람이라면. 세잔의 사과를 보며 에밀 졸라의 의문스러운 죽음의 미스터리를 떠올릴 수 있는 이라면. 그저 감각적인 책 한 권을 내 책상 위의 정물로 소유하고 사진 찍고 싶은 이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을유서포터즈로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고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