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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5
에밀 졸라 지음, 유기환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투기, 오직 투기만이 하룻밤사이 단숨에 행복, 사치, 여유로운 삶, 완전한 삶을 허락하는 거야. 만약 이 낡은 세계가 언젠가 붕괴되어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이 붕괴 이전에 욕망을 채울 시간과 장소를 찾아내야 할 것 아닌가? (p.61) 자선의 왕, 수많은 빈자들로부터 추앙받는 신이 되는 것, 유일하고 인기있는 존재가 되는 것, 세상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 이는 그의 야망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자부심과 기쁨을 만끽하는 날, 나는 전투를 이기는 불굴의 힘, 즉 돈, 금고 가득 든 돈, 흔히 많은 악을 만들지만 언젠가 많은 선도 만들 돈을 버는 불굴의 힘을 갖게 되리라! (p.72)
알아둬요, 투기와 작전은 우리 사업과 같은 거대 사업에서는 핵심 톱니바퀴요 심장 그 자체입니다. 그래요! 그것은 작은 도랑들을 통해 도처에서 피를 불러오고, 피를 축적하고, 강물로 불어난 피를 사방으로 보내고, 대사업의 생명 그 자체인 돈의 거대한 순환을 실현하죠. 그것 없이는 자본의 흐름도, 거기서 비롯되는 문명 전파 역사도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요...... 주식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식회사가 도박장이라고, 강도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장소라고 늘 사람들이 외치지요! 그렇지만 주식회사 없이는 우리가 철도도, 세계를 쇄신한 현대적 거대 기업도 가지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p.157)
만국 은행은 모든 것이 최후의 일격으로 산산이 파괴될 때까지 석탄을 가득 채운 채 악마의 철로 위를 전속력으로 달리는 열차를 연상시켰다. 그녀는 은행이 왜 군중을 전염적 광기의 무도 속으로 몰아넣는 이 열광적 오버페이스에 집착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아침 주가가 상승해야 했고, 더 큰 성공, 이를테면 황금의 대하, 황금의 바다를 만들기 위해 강물을 빨아들이는 마법의 회계 창구, 기적의 회계 창구를 믿게 해야 했다. (p.302)
루공 마카르 총서 중 국내에 너무나 늦게 초역된 '돈'을 읽었다. 무시무시하게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이 있는 소설이었다. 서사는 선이 굵고 단순하며 지치지 않는 속도로 질주한다. 색깔이 분명한 인물들이 만나고 다투고 사랑하고 배신하는 과정에서 터지는 스파크들이 휘황하다. 1870년대 나폴레옹 3세의 제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파리의 증권거래소와 주식회사들, 은행들, 동방을 향한 욕망으로 가슴이 부풀어오른 사업가들과 그들을 따라 전재산을 투자하며 일확천금의 꿈을 꾸는 개미 투자자들을 그린다. 그리고 화폐 상인이자 막후의 실력자인 유대인 금융가들도. 오직 자본이 자본을 낳고, 먹지 않으면 먹히는 것이 순리인 이 거대 자본주의의 파리를 이토록 세세하고 격렬하게 묘사해내는 것은 에밀 졸라의 집념의 힘이다. 읽는 내내 자본주의를 응시하는 그의 냉철한 눈빛과 거침없는 묘사력에 절로 탄복하게 된다. 첫 장의 시작부터 '증권거래소의 종이 열한 시를 울리고 (시간)' '사카르가(인물)' '레스토랑 샹포(장소)'로 들어가 증권가의 사람들을 만나는 묘사가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특별히 잘 하려고, 예쁘고 화려하려고 애쓰지 않으면서도 슥슥 시간과 장소와 인물들을 화폭에 그려나가는 그 손놀림이 과연 대가의 그것다웠다.
루공 가의 차남이자 '모험가 선장', '향락가', '광인' 사카르. 그는 돈으로 행복과 명성과 권력과 향락을 사고, 파리를 사고, 유럽을 사고, 유대인을 밀어낸 가톨릭의 승리와 자유주의자들을 몰아낸 보나파르트의 승리를, 그리고 마침내는 신의 지위까지 사려고 한다. 한 명의 아이를 낳기 위해 백 번의 천박한 관계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성공에도 적용되는 공식이라고 천명하는 그는, 진정 자본주의가 낳은 '앙팡 테리블' 이다. 미친놈이고 악당 사기꾼인데도 그의 굳건한 신념과 돈으로 이룩하고자 하는 자본가로서의 원대한 꿈이 너무나 눈부셔서 감히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에밀 졸라가 만들어낸 불굴의 캐릭터. 그는 파리의 초상이며, 욕망의 현신, 자본주의의 총아이다.
불꽃 튀는 속도로 두 번 읽었고 두 번 다 정말 재미있었다.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정 시간이 없다면 소설의 절정인 10장 - 12월의 정기거래 결제일에서 군데르만의 유대인 자본가들과 혈투를 벌인 사카르가 다음해 1월 정기거래 결제일에 결정적인 한방으로 승리를 거머쥐려 하다가 결국 빠르게 몰락하는 그 현란한 10장만이라도 읽기를 권한다. 1870년대 파리 증권거래소의 모습을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은 어느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6장에서 사카르가 형 루공에게 몰래 빼내온 국가 기밀 정보를 이용해 장외 거래로 수백만 프랑을 투자하는 장면과, 10장에서 마조와 자코비 두 대리인을 통해 벌이는 주식 매수-매도의 적벽대전이 소설의 압권이라고 생각한다. 필리어스 포그 씨가 자기 배를 뜯어 불태우며 대서양을 건넜던 이래로 이렇게 손에 땀을 쥐며 책을 읽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사카르의 패배는 나폴레옹의 몰락과도 일치하고 (책 속에 그가 패배한 1월 정기거래 결제일의 전투를 '워털루 전투'라고 묘사한다) 결국 '찬란한 제정의 지배와 도처에 영광이 빛나는 파리의 이 시절' 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임을 암시하기도 한다. 항상 그렇듯, 위대한 작가는 미래를 예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