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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평점 :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다룬 책이라면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과 한국 작가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 가 떠오른다.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작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위의 리스트에 새로이 추가된 한 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우엘벡의 것처럼 인간의 유한성에 절망하며 신인류의 등장을 예언하지 않고, 김중혁의 것처럼 지상과 우주 공간을 오가는 사랑과 우애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코미디언의 이야기지만, 전혀 웃기지 않다는 것 하나다.
오히려 그로스만의 이 소설과 가장 유사하게 떠오르는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The unnamable)'이다.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머리와 몸통만 남은 채로 항아리 안에 들어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항아리-인간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베케트의 이 소설은, 사실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위적 언어 실험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글-언어로 쓰여졌음에도 말-언어에 가깝고, 활자화된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확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폭발된-파편으로서의-산산조각난 언어들의 난장이며, 어떠한 장르적 구분도 거부하고 글자 그대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이하 '말 한 마리')'와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유사하다.1) 이 두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관객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독자-관객에게 '도착'하기를 끊임없이 늦추고 회피하며 쉴새없이 기표만을 쏟아낼 뿐 기의를 완성하지 못한다. 스탠딩 코미디언 도발레 G는 관객에게 개그를 주겠다고 하지만 주지 않고, 그의 발화는 결코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발화'는 '소통'이 아니고 심지어 '언술'조차 아니며 그저 '투척'되는 언어의 실험물일 뿐이다. 결코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성됨을 끊임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완성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듯한, 언어의 파괴적 실험이자 인간성의 파괴된 형상이다.
데리다는 언어는 언제나 지연, 의미의 연기, 애매성, 발화자와의 거리, 혼동 가능성, 기만과 믿을 수 없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필수 요소라고 간주하였다. 언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도발레 G의 '말'은 결핍되고, 지연되며, 혼란에 빠지고, 방해받으며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끊임없이 안과 밖을 떠돈다. 그의 말은 힘없는 종이비행기처럼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이 소설은 코미디-개그라는 완결된 이야기, 화자가 말하고 청자가 수용하며 작가가 쓰고 독자가 수용하는 소통의 완결성에 대한 회의로 점철되어 있다.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의미의 도래는 '지연된다'. 이 직접적이고 작은 바(bar)의 공동체 안에서 관객들은 이해와 통합과 함께하는 웃음의 시간을 열망하지만 그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발레 G의 실패한 코미디를 읽으며, 독자는 의사소통이란 언제나 오해와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하고, 나아가 이 오해와 실패야말로 의사 소통의 핵심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너는 알아 듣는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해하고 함께 웃고 운다는 것. 이런 '상호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환상이다. 완전한 소통, 완전한 관계, 완전한 합일이라는 환상은 이 소설 안에서 부서진다.
공동의 경험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면 (요컨대 홀로코스트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처럼), 그들 안에서는 이상적 관계와 이상적 의사 소통에 기반한 이상적 공동체가 자동적으로 성립될까? 순수하고 완전한 이야기에 대한 회의는 유대 민족의 선택받음에 대한, 우월성과 위대함에 대한, 신에게서 받은 약속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말은 분명히 '말'이지만 그로스만은 그 말을 잡아채 '글' 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독자는 관객에게서 분리되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증언, 그의 '말', 유대인의 약속에 대한 '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일부러, 의도적으로) 실패된 말-코미디를 '글'로 적어 내놓음으로써, 눈앞에 현존하는 것 같았던 소통이 결국은 어긋나고 있을 뿐임을 입증하고, 유대인 공동체와 그들의 선택받음에 대한 부정(不定)성을 에둘러 전달한다. '파이드로스'에서 '말'이 더 생생하고 육체적인 현존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제언은 깨어진다. 끝없이 흔들리는 말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말들의 나열 속에, 개인의 기억이 갖는 정확성과 그 진술의 확고부동성은 의심되며,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의 역사로 절대화되었던 유대인들의 순수성과 오리지널리티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종이비행기와 같은 말들-수신되지 못하는 메시지. 수신되기를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구 접어 날리는 듯한 메시지들. 디아스포라가 환대로 완결되지 못하고, 홀로코스트가 평화로 완결되지 못하며, 죽음은 애도로써 완결되지 못하고 개그로 뒤덮이거나 토악질로 뱉어지거나 (장례식에서) 뛰쳐나가는 것으로 회피된다. 아퀴가 지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불완전함을 목도한 관객은 테이블을 떠난다. 남은 것은 오직 두 명의 불구들 뿐이다. 직장과 아내를 모두 잃은 관계불구자 '나'와 신체적 불구를 가진 '피츠'. 이들은 도발레 G의 잃어버린 아버지-어머니의 역할을 대리하고, 그들의 수직적 위계를 넘어서서 수평적 연대를 수행하기 위해 이 바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도발레의 부모는, 그의 내면에서 부서진 채 떠도는 망령들-'햄릿'의 선왕처럼 밤마다 찾아와 젊은 왕자를 괴롭혔던 망령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도발레는 물구나무 서기로 어머니를 지켰고 슬픔에서 자기를 구원하려 했던 사내였다. 그는 광대짓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이 날의 공연-중언부언하기, 어리석음을 연기하기, 앞뒤 맞지 않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작업들로 그는 마침내 부모-망령을 대신할 자를 얻는다. 잃었던 친구를 찾고, 어린 시절의 소녀와 키스하며, 부서진 언어의 조각들로, 거대한 실패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상적 공동체의 자동적 성립과 완전성에 대한 회의가 이 소설의 토대라면, 그에 대한 대안은 결국 전직 법관인 '나'와 난쟁이 소녀 '피츠'의 불구성일 것이다. 회복 불가능의 불구성을 안고 있는 이 두 인물이 생물학적 부모를 뛰어넘어 도발레 G의 새로운 연대자가 된다면, 이들이 서로의 불구됨을 인정하며 오해로서의 소통으로 불완전성의 공동체를 이룬다면, 이상적 공동체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환상을 걷고 이스라엘와 팔레스타인이 '불가능한 연대'를 이루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명백하게 개별적인 민족, 따로이 존재하며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있는 확고부동한 공동체의 절대성을 지키려 할 때, 이 과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 하며 '나의 원수를 죽여달라'는 복수의 망령만이 이 땅 위를 떠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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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한 마리'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의 코미디언 도발레 G가 공연을 펼치는 무대 위의 '뒤쪽 벽 앞에 놓인 크도 둥그스름한 구리 단지...전에 여기서 상연한 무슨 연극에 쓰던 소품일 것' 같은 단지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항아리-인간 독백은 연극으로도 상연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