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흉기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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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스포츠 도핑이라는 독특한 주제를 다뤘다. 전개과정에서의 속도감, 뒤통수를 후리는 반전 등 작가가 다른 작품에서도 여러 번 보여주었던 매력이 잘 드러나 있다.다만 '백야행' 이나 '용의자 X의 헌신' 등에 비하면 좀 덜 만족스런 느낌이다. 

기본적으로 소설이 독자의 공감과 긴장을 동시에 가져가려면, 핵심 등장인물의 정서가 기본적으로는 독자와 비슷하되 어떤 부분에서는 달라야 한다. 이 다른 부분은 등장인물이 소설 속에서 겪는 특수한 경험에서 비롯된다. '백야행'과 '용의자 X의 헌신'은 이런 특수한 경험을 한 핵심 등장인물이 범죄를 저지르며 사건의 중심에 선다. 이들에게 특수한 경험을 제공한 측은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세상이다. 그러다보니 소설을 이끄는 가해자의 공격범위는 특정하게 정해지는 대신 불특정 세상이 된다. 

반면, '아름다운 흉기'나 최근 리뷰한 '기린의 날개'의 경우,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사건을 일으키는 범위도 자신에게 가해를 한 특정 대상이 된다. 그 결과 사건들이 좁은 범위로 국한되는 느낌이 있다.

또한,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설득력이 다소 부족하다. 이 소설에서 핵심 등장인물들은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입었고, 그래서 그 피해를 복구하려는 과정에서 사건을 일으킨다. 이 과정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피해를 준 어떤 사람의 캐릭터가 우리 입장에서 공감이 가야 한다. 하지만 피해를 준 사람의 캐릭터는 꽤나 평면적이다. 그렇다면 피해를 복구하고 싶은 핵심 등장인물들에게라도 공감이 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사건을 끌어나가는 과정에서 별다른 심리변화를 보이지 않고 한결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 결과 평면적인 캐릭터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작품들이 워낙 훌륭해서 좀 박하게 평을 했지만, 그래도 여느 소설들이 비하면 무척 재밌다. 읽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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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1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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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숭고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빛에 비유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희생에 제3자의 희생까지 포함시킨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널 위해 죽을수도 있어'라는 문장은 따뜻한 빛으로 날 감싸는 느낌이지만, '널 위해 난 누구라도 죽일 수 있어'는 섬뜩한 빛이 날 찌르는 느낌이다. 

백야행의 부제는 하얀 어둠 속을 걷다 이다. 하얀 어둠이란건 일종의 섬뜩한 빛이다. 빛이 날 쬐고 있지만 결코 따뜻해지지는 않는. 온기를 잃은 강렬한 빛이 시종일관 소설 전체를 섬뜩하게 비춘다. 

추천한다. 무엇보다도 재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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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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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초기 암세포가 발견되었다면 어떻게 할까. 일단은 놀랠 것이다. 그리곤 당연히 수술로 제거를 할 것이다. 수술할 땐 좀 아프겠지만, 그거 아픈게 무섭다고 수술을 안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에겐 이 상식같은 당연한 일이, 사회적으로 커지면 꼭 그렇지도 않다. 사회에서 뭔가 상처라고 할 수 있는 모순을 발견했을때, 상처를 치료하는 대신 그냥 그 상처를 못본척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심지어 그런 태도를 신념으로 삼고, 그런 대응이 어른이 되는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런 예로는 위안부 할머니들과 세월호 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위안부 할머니들도 처음에는 나라에서 못본 척 했다. 몇십년이 지난 후에야 그 할머니들의 상처가 공식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그동안 많은 할머니들의 상처가 덧나고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라 여긴다. 세월호도 그랬다. 세월호 발생 초기, 일각에서는 자식을 잃은 그들의 상처를 직시하는 대신 그 상처를 왜곡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보상금이니 특례입학이니 하는 말들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한다. 상처를 인정하고 치료하는게 싫어, 그냥 그 상처를 못본척 인정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기린의 날개에는 두 어른이 나온다. 두 어른은 모두 어떤 잘못에 관련이 있다. 한 어른은 일단 그 잘못을 덮으려 한다. 한 어른은 댓가를 치르더라도 그 잘못을 직시하려 한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야 너무 당연히도 후자의 어른이 훌륭한 어른이다. 하지만 전자의 어른이 가진 가치관도 불과 몇년 전까지 우리나라의절반을 대변하는 가치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전자의 가치관이 가지는 무게가 생각보다 만만찮기에 소설은 긴장감을 놓치지 않고 제법 쫄깃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다른 대표작들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에 비해서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좀 '뻔하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알기쉬운 문체와 빠른 속도감은 작가의 뛰어난 역량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전개된다. 하지만 다른 대표작들이 결말을 알고 나서도 불분명한 선악의 경계로 벙 하는 느낌을 주는 것에 반해, 너무 깔끔한 결말이 오히려 아쉽다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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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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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런데 이런 동경 나만 있는 건 아닌듯하다. 요새는 자비로 자신의 책을 출간하게 도와주는 업체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우연한 계기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를 읽게 되었다. 하루키로 말할것 같으면, 내가 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소설가이다. 심지어 요즘 그의 책에 한창 빠져있으니, 매우 적절한 시기에 이런 책을 보게 되었다. 소설가로서의 그를 들여다보는 재미 이외에, '이 책 읽고 나도 소설하나 써 봐야지'하는 얄팍한 기개 같은것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을 읽으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오히려 내가 이제와서 백인이나 흑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란 나란 다른 인종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들고 있다.

장편 소설을 쓸 때에 하루키는, 매일 오전에 정해진 이른 시간에 일어나 6시간 정도 소설을 집필한다. 이후에는 다른 잡일도 하지만, 하루 한 시간의 달리기는 빼놓지 않는다. 그러고는 이른 시간에 잠이 든다. 꽤나 재미없는 인생이다. 반면 마약을 해놓고도 걸린 후에 위축되기는 커녕 당당하게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고 말해서 유명한 프랑수와즈 사강의 경우,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쓸거면 뭐하러 작가를 하나. 공무원을 하지'라는 류의 말을 했다고 한다 (문장은 정확하지 않다만). 이런 사강이 하루키를 보면 혀를 끌끌 차는것도 모자라 작가망신 그만 시키라고 드잡이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강과 하루키는 단지 양 극단에 있을 뿐, 그 본질은 비슷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유명한 작가라는 인간들은 보통 그 위치, 예를 들어 얼마나 건전한가 불건전한가 같은 것 보다는 얼마나 '극단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방탕의 극단에 사강같은 인물이 있고, 건전의 극단에 하루키같은 인물이 있어서, 이들이 각 극단에서 극단으로 오지 못하고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머무르는 범인들에게 뭔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는 거 아닐까. 반대로 평범한 (나같은) 인물은, 건전하게 살다 보면 불현듯 '아 이게 사는거냐. 오늘은 코가 삐뚤어질때까지 마셔야지'라고 하고, 그러다 술을 마시다 보면 '아 내일 힘들것같애. 이제 그만 마셔야지'하는, 어정쩡한 중간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중요한 '나만의' 하고싶은 얘기는 생길 틈도 없는게 아닌가 싶다. 결국 작가가 되기위해 중요한 건, 타인의 기준같은거 신경쓰지 않는 '나만의 기개'같은 게 아닐까 싶다.

하루키는 소설을 쓸 때에 무슨 얘기를 할지 고민한 적이 없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라는 것은 샘솟듯 '퐁퐁' 써야지, 그게 아니면 뭐하러 소설을 쓰느냐고. 자신은 소설을 억지로 쓰진 않고, 그냥 인생을 (수필이니 번역이니 하면서) 살다보면 어느날 불현듯 자신의 뇌속 캐비넷에 하고싶은 얘기가 가득 찬다고 한다. 그럼 이제 수필도 번역도 다 끊고 오직 장편소설을 쓰는 태세로 전환한다. 하고싶은 얘기가 있다보니 소설을 샘솟듯 '퐁퐁' 쓰고, 그렇게 장편소설을 완성하면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된다고 한다. 덧붙여, 제정신인 인간은 원래 장편소설을 쓸 리가 없다고 생각한단다. 다만 자신은 하고싶은 얘기들을 했을 뿐인데 소설로 먹고사는 작가가 되어 그 부분에선 그저 감사한 일이라고. 놀라운 얘기다. 당장 내가 만약 '상실의 시대' (원제: 노르웨이의 숲)의 인세를 받고 있다면, 아마 후속작을 쓸 생각이 들었을까. 전작의 아성을 뛰어넘을수 있을까 걱정이며, 한편으로는 이 돈이면 평생 먹고 살겠다는 나태한 마음이며 들면서, 더 이상 작가로선 그저그런 삶을, 살아간다기보단 그냥 늙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하루키는 진정으로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은 것 같다. 그저 자신의 하고픈 이야기를 소설의 형태로 우리에게 들려주었을 뿐.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는 하루키의 지극히 개인적인 소설가에 대한 견해다. 다만 그 책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하루키라는 작가의 일면을, 보고 배운다기보다는 그냥 경탄하는 마음으로 스윽 바라본 것 같다. 하루키는 책에서 지극히 겸손한 어투로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따위의 말을 반복하지만, 그 문장 너머의 하루키가 가진 단단함이 책에서 느껴진다. 그래서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이 사람은 나와 다른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런 단단함을 느끼는 건 이 책을 읽는 독자 개개인에 크게 좌우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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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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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잃어버려도 생활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사고 거스름을 받거나, 운전을 하거나, 아침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출근하는 것은 마음 없이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 오히려 생활이라는 것은 효율을 위해선 마음이 끼어들 여지를 몰아내는 것이 낫다. 거스름을 받다가 무언가에 마음이 뺏기면, 거스름을 주는 쪽은 당황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옛날에는 생활에서 마음이 몰려나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도시가 아닌 마을에서 살았고, 마을은 아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 아저씨에게 뚝배기를 사다가 지나가는 옆집 아기의 웃음에 잠깐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괜찮다. 김씨 아저씨도 내가 코흘리게 시절 나의 웃음에 마음을 빼앗겨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김씨 아저씨와 나의 관계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구매자이면서 동시에 김씨 아저씨의 동네 꼬마고, 김씨 아저씨도 판매자이면서 동시에 나의 동네 삼촌이다. 

하지만 세계가 현대화되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가 더 익숙하게 되었다. 효율을 위해선 이는 바람직하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역할 수행에 마음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건, 변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마음이 사라진 세계는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가진 톱니같은 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위해 산다. 효율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순간 어딘가 모르게 텅 비고, 어딘가 모르게 헛헛하게 된다. 비어버린 마음은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마음은 효율적으로는 채울 수 없다. 마음을 채운다는 것은 노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효율적으로 마음을 채운다는 건, 마치 노래를 빨리 감기로 듣는 것과 비슷하다. 5분짜리 노래에는 5분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톱니처럼 살아야만 하는 우리는 마음도 계산해서 효율적으로 채우려고 한다. 아마 그 효율의 핵심은 돈 같다. 그래서 비싼 지갑이나 비싼 핸드백이나 비싼 자동차 같은게 빨리 감기는 노래처럼 우리 마음을 한 번에 채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마음이 그렇게 채워질리 없고, 그래서 다들 그냥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적당히 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마도 개인을 위해선 불행이고 사회를 위해선 다행이겠지만) 마음이 없어도 생활은 가능하고, 그래서 우리는 큰 문제없이 다들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작품은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생활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잃어버린 마음을 굳이 찾지 않고 지금 세계에 만족하는 것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 사실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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