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을 잃어버려도 생활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물건을 사고 거스름을 받거나, 운전을 하거나, 아침 알람소리를 듣고 일어나 출근하는 것은 마음 없이도 가능하다. 더 나아가, 오히려 생활이라는 것은 효율을 위해선 마음이 끼어들 여지를 몰아내는 것이 낫다. 거스름을 받다가 무언가에 마음이 뺏기면, 거스름을 주는 쪽은 당황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보다 조금 더 옛날에는 생활에서 마음이 몰려나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그때는 도시가 아닌 마을에서 살았고, 마을은 아는 사람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김씨 아저씨에게 뚝배기를 사다가 지나가는 옆집 아기의 웃음에 잠깐 마음을 빼앗기더라도 괜찮다. 김씨 아저씨도 내가 코흘리게 시절 나의 웃음에 마음을 빼앗겨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김씨 아저씨와 나의 관계는 마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나는 구매자이면서 동시에 김씨 아저씨의 동네 꼬마고, 김씨 아저씨도 판매자이면서 동시에 나의 동네 삼촌이다. 

하지만 세계가 현대화되고 사람들이 도시에 살면서, 우리는 마음으로 연결되지 않은 관계가 더 익숙하게 되었다. 효율을 위해선 이는 바람직하다. 우리들 모두는 각자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역할 수행에 마음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건, 변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마음이 사라진 세계는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갈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가진 톱니같은 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마음을 위해 산다. 효율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래서 생활을 하다보면 어느순간 어딘가 모르게 텅 비고, 어딘가 모르게 헛헛하게 된다. 비어버린 마음은 어떻게든 채워야 한다. 마음은 효율적으로는 채울 수 없다. 마음을 채운다는 것은 노래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효율적으로 마음을 채운다는 건, 마치 노래를 빨리 감기로 듣는 것과 비슷하다. 5분짜리 노래에는 5분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톱니처럼 살아야만 하는 우리는 마음도 계산해서 효율적으로 채우려고 한다. 아마 그 효율의 핵심은 돈 같다. 그래서 비싼 지갑이나 비싼 핸드백이나 비싼 자동차 같은게 빨리 감기는 노래처럼 우리 마음을 한 번에 채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마음이 그렇게 채워질리 없고, 그래서 다들 그냥 마음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적당히 산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마도 개인을 위해선 불행이고 사회를 위해선 다행이겠지만) 마음이 없어도 생활은 가능하고, 그래서 우리는 큰 문제없이 다들 생활을 하며 살아간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라는 작품은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생활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두 가지 선택지가 생긴다. 잃어버린 마음을 굳이 찾지 않고 지금 세계에 만족하는 것과, 괴로움을 감수하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것. 사실 이 책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