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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 - 가장 사적인 기록으로 훔쳐보는 역사 속 격동의 순간들 ㅣ 테마로 읽는 역사
콜린 솔터 지음, 이상미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11월
평점 :


올해 51번째 책은 콜린 살터가 지은 '100통의 편지로 읽는 세계사'입니다.
기원전 346년 스파르타인이 마케도니아에 보낸 편지를 필두로 세계 최초의 화산 폭발 묘사 편지, 구직자가 된 레오나르도 다빈치, 헨리 8세의 연애편지, 통신 흐름을 바꾼 세계 최초의 우표...
그리고 "이 편지는 런던에서 시작되어~"로 알고 있는 행운의 편지의 유래부터, 최근 타이타닉호에 탑승한 노부부의 손목시계 경매로 다시 한번 회자된 마지막 편지, 인도 총리에게 쓴 그레타 툰베리의 편지까지 폭넓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 펜팔의 추억, 그리고 남의 편지를 훔쳐보는 재미
역사라고 하면 보통 연도 외우고, 전쟁 이름 외우고... 머리 아픈 암기 과목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딱딱한 역사책이 아니네요.
제목 그대로 기원전부터 현대의 디지털 시대까지, 역사 속 인물들이 직접 쓴 100통의 편지를 모아놓은 책인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문득 잊고 지냈던 고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친구와 펜팔을 주고받으며, 어떤 편지지에 쓸까 고민하고, 밤새 꾹꾹 눌러쓴 글씨로 내 마음을 전하던 그 시절의 추억들...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우체통을 서성였던 그 설렘이 이 책을 보는 내내 오버랩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원래 남의 일기장이나 편지를 몰래 훔쳐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일이라고 하던데, 이 책을 읽다 보면 내가 마치 그 시대의 우체부나, 혹은 그 편지를 몰래 뜯어보는 관찰자가 된 듯한 묘한 기분이 듭니다.
왕과 여왕, 독재자와 혁명가, 예술가와 과학자... 위인전 속 박제된 인물들이 아니라, 고민하고 슬퍼하고 때로는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인간을 만나는 느낌이랄까요? ㅎㅎㅎ
2. 잉크 자국과 필체에 담긴 그들의 민낯
책을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단순히 텍스트만 번역해 놓은 게 아니라 실제 편지의 원본 이미지를 함께 보여준다는 점이었습니다.
구겨진 종이, 번진 잉크 자국, 긴급한 상황에서는 급하게 휘갈겨 쓴 필체... 이런 시각적인 요소들이 더해지니 그 당시의 긴박함이나 절실함이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습니다.
내용들도 참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천재라고만 알았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의 통치자에게 구직 활동을 하며 쓴 자기소개서(이력서)를 보면, 천재도 먹고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구나 하는 짠함이 느껴지기도 하고... 타이타닉호 탑승자의 주머니에 보관되어 있던 마지막 편지들을 보면 역사의 현장에 서 있는 듯한 서늘함도 들었습니다.
또한 8~90년대 한국을 뒤흔들었던 '행운의 편지'. 이 놈의 지긋지긋한 저주가 요즘 크라우드 펀딩이나 구독형 레터의 시초였지만, 나쁘게 말하면 사기였다고 하니 역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맞는 듯합니다.
3. 역사를 바꾼 한마디, "야, 전쟁 났대"
물론 소소한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결정적인 순간들도 편지 한 장에 담겨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는 결국 원자폭탄 개발(맨해튼 프로젝트)의 시발점이 되었고, 한동안 영화로 주목받았던 원자폭탄의 남자 오펜하이머가 등장하는 편지에 막상 원자폭탄이란 말은 등장하지도 않는다고 하니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무서운 국제정치의 한 단면을 보는 듯합니다.
또한 가장 와닿았던 편지는 진주만이 공습을 받자 단 여덟 글자로 "훈련이 아니다, 실제 공습이다"라고 전한 전보 내용인데... 왜냐하면 저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1996년 가을, 논산에서 신병 훈련을 받고 대전에서 6주간 통신병 후반기 교육을 마친 뒤 홍천의 한 부대에 배치받은 저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이젠 추억의 단어가 돼버린 '강릉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 사건'이 벌어진 날 새벽.
피부병으로 막사에서 분리되어 텐트에서 자고 있던 저에게 들이닥친 분대장이 내뱉은 말은 제 평생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저 진주만 공습을 알린 내용과 비슷합니다.
"야, 전쟁 났대. 진짜래."
전 아직도 불안과 공포 사이에서 이 말을 전하던 분대장의 얼굴과 목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저 전보 내용도 그런 모습으로 보내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다만 이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아쉬웠던 건, 우리나라의 편지 한 통도 들어갔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바로 학창 시절 교과서에 한 번은 실렸을 법한, 450년 전 고성 이씨 이응태의 미망인이 작성한 '원이 아버지에게(사부곡)' 말입니다. 죽은 남편을 향한 절절한 편지는 꼭 세상을 뒤흔든 편지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의 마음을 흔들 수 있을 만한 그런 편지인데 말이죠. 원작가에게 한국에도 이런 편지가 있음을 꼭 알려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4.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된다, 편지가 만든 역사
이메일과 카톡이 지배하는 요즘 세상에, 꾹꾹 눌러 쓴 손편지가 주는 감동은 이제 박물관에서나 봐야 하는 유물이 되어가는 듯합니다.
그런 저에게 평소 참 좋아하는 문구가 하나 있습니다.
"오늘이 쌓여 내일이 된다."
이 책에 실린 100통의 편지들이 딱 그런 느낌입니다. 역사란 결국 거창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쓴 그 날의 오늘, 그리고 그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만들어진 거대한 내일이 아닐까 하는...
100통의 편지 속에 담긴 분노, 슬픔, 사랑, 그리고 희망... 그 날것 그대로의 감정들이야말로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진짜 세계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볍게 읽기 시작했지만, 다 읽고 나면 묵직한 인간사를 경험하게 되는 책. 역사의 뒷이야기가 궁금하거나,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을 엿보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하며 서평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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