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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종로에서 일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어느 점심 시간 나는 마법에라도 이끌린 듯이 점심을 거르고 교보문고로 향했고, 거기서 책을 읽고 있는 수많은 책 중독자 무리에 합류했다. 거기서 제목과 책 디자인의 분위기에 이끌려서 고른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속 '패리스 힐튼을 찾습니다'는 무슨 수상작이라고 해서 읽어 보았는데, 기대 이상 위트와 유머로 가득 차 있었다. 스탠딩 개그를 좋아하는 내 취향을 얼결에 저격해 준 그 책을 나는 일단 다시 꽂아 두었다가 한 달 쯤 지나서 다시 교보문고로 가서 입양해 왔다. 책이 아직도 같은 매대에 표지를 보이면서 놓여 있는 걸 보니, 다행히 책의 인기가 급격히 사그라들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책을 펴보니, 패리스 힐튼 이야기 이후로 읽는 단편들이 모두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것이었다! 그리고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동성애에 대해 편견이 없고 관대한 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여태까지 한 번도 동성애자가 주인공인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는 것을. 되려 영화 쪽은 간혹 동성애자의 이야기를 접할 기회가 있었지만 (그 유명한 섹스 앤 더 시티에조차 나오지 않았는가! 사만다가 양성애자가 되어 보려고 애쓰다가 포기하고 집어치운다는 개그 소재처럼 쓰이긴 했었지만. 그래도 동성애 섹스신은 TV극 치고는 미국 것이라 그런지 꽤 리얼했었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도록 동성애 소설을 읽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예 관심이 없었고, 내 손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는 아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건 지도 몰랐다. 그들은 대체 어디서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는 것일까? 같은 시대와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생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으로 많다.
나는 소설 속 왕샤 같았다. 이성애자로 살아왔지만, 동성애자를 만났을 때 망설이고 불안해하며 받아줄 수 있는 자. 나는 그런 나를 상상하며 스스로를 양성애자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 자이툰 파스타' 소설을 읽고나서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샤는 스스로를 동성애자로 생각한 적이 없었던 평범한 이성애자였지만,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난 후 그에게 자신을 맞춰가고 그의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만난 곳이 이라크 자이툰 - 남자만 있는 곳이 아니었더라면 왕샤의 선택이 과연 바뀌었을까? 자이툰이 아니었더라도 왕샤는 주인공의 진심 어린 구애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을까?
'자이툰 파스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저 왕샤는 남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 미도리일 뿐이다. 왕샤와 동성애자 주인공은 폭탄이 터지는 이라크 자이툰에서 만났고, 미도리와 이성애자 주인공은 일본 도시에서 만날 뿐이다. 두 다른 이야기는 인물들의 성적 편향이나 무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 세상의 꽤 많은 것들이 이미 다 정해져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시절(200쪽)'을 함께 건너가는 흔들리는 청춘에 대해 똑같은 목소리 톤으로 말하고 있다. 자이툰의 소설가는 꼭 술 먹다가 목에 울컥 하고 소주가 걸린 듯 나레이션을 했다. "그때는 몰랐었어, 누굴 사랑하는 법." 나이가 더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천지라는 것, 이성애자들도 모르긴 마찬가지라는 것이 소설가에게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사랑에 빠진 후 자신을 상대방에게 맞춰가는 과정은 이성애자 간에도 흔히 일어나는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 애정의 균형이 한 쪽으로 치우쳐 있을 때엔 속박이나 지배가 일어나기도 한다. 왕샤와 주인공 커플 간에도 처음엔 분명 왕샤에게 모든 감정의 주도권이 있었다. 주인공은 동성애자란 이유 만으로 왕샤를 향한 그의 애정을 미안해 한다. 나중에 왕샤 스스로 주인공 앞에 나타나면서 - 그것은 자살을 거쳐야 할 만큼 격한 고통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 비로소 대등한 애정 관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 관계는 동시에 '인간 대 인간으로, 성적 욕망이 걷힌, 맑고 투명한 관계로 남아 인생의 가장 고단한 시절을 함께하는(211쪽)' 사이가 되었다.
책을 첨 읽을 때 작가의 사진을 보며 듬직한 젊은 작가로군 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다시 책을 읽으니 그는 아무리 봐도 동성애자 같다. 책 속에 나오는 왕샤의 외모를 닮은 듯 하다. 나는 모든 동성애자가 다 특이한 외모를 가진 게 아니란 것 쯤은 안다. 그들은 다 평범하게 생겼다. 외모나 목소리에서 그들을 가려낼 수 있는 경우는 그들의 수에 비해 별로 많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의 소설이 너무 좋다고 평한 평론가 저 사람도 혹시 게이일까? 이제 이 책을 보는 내 시선이 바뀌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소설 속 영화에 빗대어 슬퍼한다. 영화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사람들이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랑을 하다 맥빠지게 끝나버렸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런 특색도 가치도 없는 그런' 영화(207쪽). '세상의 아주 작은 점'(214쪽)이 되고 싶었던 작가의 작품은 그래도 작은 점 이상이라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싶다. 적어도 그는 평범한 이성애자들에게 작품을 보이고, 그들에게 평범한 동성애자들의 사랑에 대해 용기 있게 말하지 않았는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조금씩 불편하게 느끼는 지점은 내가 이성애자로 살아왔다는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인물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내가 그들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실 이성애자들의 사랑이란 또 뭐 그리 평범한가. 아침 막장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불륜 상대가 남자로 설정된 들 뭐 그다지 놀랄 일이란 말인가. 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게, 어린 시절 버린 딸이 며느리로 들어오거나, 몇십 년 지기 친구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거나, 어머니는 아들과 재혼하고 딸은 아버지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가는, 이성애자들의 막장 세상보다 덜 고상할 것은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내 서재에 퀴어 소설 한 권 쯤 있어도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맘으로, 세상 모든 사랑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 내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이야기로, 내 작은 서재에 소장할 맘이다. 대체 퀴어 평론은 어디로 보내야 하는 것일까? 어딘지도 모르는 한 이성애자 친구의 지지 소감문은 그저 이성애자들의 세상에서 떠돌게 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