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산책 말들의 흐름 4
한정원 지음 / 시간의흐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적의 몽유병이 남긴 흔적을 소화하기 위한 혼자만의 산책을 즐기며, 대학 전공인 문창과를 완성하기 위해 창문을 통해 소통을 하며, 어린 시절의 돌봐주던 언니와의 추억에서 일탈을 보여주며, 소란스럽게 다가와 나를 불러주는 바다에게 강과 다른 모습을 찾아내는 작가였다.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가 한편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작가 스스로도 읽고 걷는 나날들을 모아 이 책을 썼다고 했는데.. 그녀의 산책에 잠시나마 동행이 되어보고 싶었다.

 

빨강머리 앤이 만난 인디언 소녀가 자신의 집을 알려주는 문구처럼 한편의 시도 지도가 될 수도 있었다. 지리학자 데니스 우드는 동네 지도를 단순한 길찾기용 지도가 아닌 시간과 공간이 있는 지도로 만들었다고 한다. 집에 걸려진 풍경의 소리가 펼쳐지는 공간 지도, 동네에 사는 강아지 이름 지도, 할로윈 장식의 종류에 따른 할로윈 지도... 참으로 멋진 지도가 아닐까!! 작가 역시 한편의 시와 함께 한편의 이야기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산책길의 소근소근거리는 이야기처럼 펼쳐놓았다. 이 책은 그녀의 삶에 대한, 그녀가 보고 느낀 것에 대한 지도였다.

 

작가는 스스로를 "쓸모를 만드는 생활체육인"도 아닌 "산책자"... 아니 그것도 아닌 "수집가"라고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쓰레기로 여길 벌레 먹은 잎, 돌맹이, 열매, 조개비 등등을 줍줍해와서는 보관하거나 원래 자리로 돌려보낸다. 그뿐만 아니라 귀로 줍는 것들도 있다. 자연의 소리와 사람들의 말들. 그것들도 돌아와 노트에 적어서 보관하거나 다시 돌려보낸다. 그녀의 산책은 그냥 앞만 바라보는 걷기가 아닌 주변을 둘러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옆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걷기였다. 그렇기에 항상 넘어지고 다치곤 한다지만.. 이런 그녀이기에 이렇게 소소할 수도 있는 추억과 기억의 이야기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펼쳐놓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가장 빠른 길로 힘차게 걸어가던 젊은 시절의 나에게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빠른 걸음걸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삶의 목표인 듯 살았던 그 시절에 나도 이런 추억들이 있었을까? 분명 내 주변에도 이런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을 것이다. 단지, 내가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고 기억하지 못할 뿐일 것이다. 그 시간과 공간은 이미 사라졌지만, 지금이라도 나만의 지도를 한번 그려보고 싶다. 나만의 방식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