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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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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우리는 늘 중요한 부분만 빼먹는다. 우리의 일상에서 통용되는 정의는 “지켜야 할 바른 도리”로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바로 열에서 제외된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분명 중요한 것이 빠졌다. 이쯤되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는 한 만화 주인공의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가 무엇이길래 날 용서치 못하겠다는것인가? 과연 이 대단한 “정의”란 무엇인가? 아니,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너의 정의? 나의 정의!
여기 정의를 위해 모인 다섯 사람의 테러리스트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정의는 조금씩 다른 듯하다. 각자의 정의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스테빵의 정의는 혁명을 통한 결과 그 자체이다. 그로 인해 희생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감수해야만한다.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리고 정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리아예브의 정의는 다르다. 그의 정의는 그 실현 과정에 있다. 물론 혁명을 통한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스테빵과 같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또 너무 유치하다. 다만 서로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꿈꾸면서도 전혀 다른 과정을 생각한다. 과연 정의는, 하나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반복된 절망
어쨌든 결국 태공은 카리아예브의 손에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첨예한 갈등이 시작된다.
"태공은 폭탄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사상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중략... 우리는 사실로 돌아가서 태공의 머리를 날려 보낸 것이 자네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러니 자네는 용서를 받아야 해."
경시총감과 태공비는 카리의 정의를 위한 행위를,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살인으로 몰아간다. 이에 카리는 상당한 괴로움을 느낀다. 카리와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인민을 위한, 즉 휴머니즘의 목적을 테러리즘의 수단으로 가져가야 하는 모순을 숙명적으로 지닌다. 그들의 테러의 기준은 그것이 인민을 위한 행위일 때만 허락된다. 그러한 논리로 그들은 아이들은 죽일 수 없으나, 태공은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태공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태공은 더 이상 추악한 압제자가 아니다. 카리는 태공과의 개인 대 개인의 만남, 즉 인간으로서의 만남을 누구보다 괴로워한다.
즉, 이상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실존의 근본을 짓밟는 방향으로 놓일 때의 무참한 배신감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삶이 가진 부조리,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반복된 절망일지 모른다. 정의의 사람들은 압제를 반대하는 역압제, 폭력을 반대하는 반폭력적인 폭력을 사용이라는 반복된 싸이클 속에 존재한다.

사이클을 끊는 방법
니체는 가장 무서운 자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를 주변에서 쉽게 경험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재권력화만큼 무서운 것이 있던가.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날 자살을 감행한다. 카리아예브는도 결국 교수대에 오른다. 그는 죽음으로서 그의 정의를 완성한다.
남은 이야기는 많다. 하나만 까먹지 말자. 빠뜨린 것이 무엇인가? 정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이다. 인간이 빠진 정의는 공허한 이념에 불과하다. 반복된 정말의 사이클을 끊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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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시집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
장용학 지음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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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통한 문명 비판
-욕망의 장으로서의 글쓰기-



1. 서론
전쟁의 여파가 도사리고 있는 1950년대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묘지이고, 진개장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 최악의 처참함과 비참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한 것이 되어갔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그 어느 전쟁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던 전쟁이었다. 민중들은 폭격을 피해 혈거 생활과 지하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쟁 중 인간에게는 원초적 생존본능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밥 먹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살기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만 했다. 그런 땅에서 문학이 발 디딜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
장용학은 이러한 전쟁 상황에서 소설을 썼던 작가였다. 폭탄과 총알이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그는 문학이 설자리가 어디쯤인지 가늠해야 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장용학을 한국 전후문학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장용학은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무시하고 한자어, 관념어를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지극히 난삽한 문체와 작중인물의 기괴함을 통해 당대의 뒤틀린 사회현실을 독특한 기법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부조리에 절망하고 존재의 허무를 혐오하며 그것을 초극하려는 고독에 절규하는 인간상을 플롯의 부정, 우화적 기법으로 작품화하였다. 이처럼 장용학의 소설은 관념적이며 철학적이다. 따라서 모든 철학적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시공간에 대한 논의는 장용학 소설을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그 시공간의 틀을 이용하여 1950년대 한국이라는 극한 전쟁 상황 속에서 장용학이 과연 문학이 설 자리를 어디에 자리매김했는가를 전쟁 당시 쓰인 50년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2. 본론


2-1.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남과 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전쟁이다. 『요한 시집』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의 실존이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가를 고발한 작품이다. 작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의 수기 몇몇 장면을 읽고 나서 그 잔혹한 실상에 울고 싶은 전율에서 창작욕이 솟아올랐음을 고백한다. 『요한 시집』은 이처럼 장용학이 실존주의 문학에서 배운 눈과 더불어 거제도의 전율에서 싹이 튼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은 엉뚱하게도 포로수용소의 이야기가 아닌 토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토끼는 처음에는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에서 불행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 그에게 사춘기가 찾아온다. 언제부터인가 바깥세계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개안이자 혁명으로 표현된다. 이내 토끼는 일곱 가지 빛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안 세계와 아름다운 바깥세계를 구분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토끼는 드디어 자신의 생일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창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암흑에 쫓기며, 살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그 창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바위 틈 사이로 목을 쑥 내밀며 최초의 일별을 바깥 세계로 내던진 순간, 토끼는 소경이 되어버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후예들은 그가 죽은 자리에서 난 버섯을 <자유의 버섯>이라 부르며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토끼의 우화는 한국이라는 구체적 상황에 대입시켜볼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자기의 전쟁을 가져 보지 못한 이 겨레였다. 근대적 의식이라고는 사벨과 지카다비밖에 모르던 이 땅이 ‘민주 보루’니 ‘두 개의 세계’니 ‘만국 평화 어필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리얼리즘이 네이팜탄의 세례와 함께 쏟아져 들어왔을 때, 농부의 옷을 채 벗지 못했던 그 시골내기들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와 같은 동호의 독백은 서양적 근대문명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유입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무방비 상태에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근대의 빛’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들어와 한국사회의 눈을 멀게 하였다. 토끼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대의 근대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근대화이며. 또한 서구화를 의미하였다.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밀려들어온 서구화의 물결은 전통적인 시공간을 살해하며 근대적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시작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이 발전시킨 근대적 이성은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만심을 키웠다. 이러한 자만심은 모든 자연현상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으며, 그 생각은 시간까지도 수학적 사고를 통해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킨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자본의 발전과 함께 이제 노동행위는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가치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노동행위가 갖는 다양한 성질을 오직 시계바늘로 계산되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양으로 환원한다. 이처럼 시간을 동질적 단위로 분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은 선분화된다. 이제 근대적 시간은 모두에게 균질적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선언한다.
『비인탄생』에서 ‘아홉시병’은 그러한 균질적이며 공적인 시간과 불균질적이며 사적인 시간과의 갈등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인 아홉시가 되면 배가 아픈 척을 한다. 그러나 ‘아홉시병’은 곧 주인공을 지배하여 주인이야 어찌 생각하든 언제고 그를 지배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적 시간은 곧 선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의 선분성이 단지 시간을 동질적 단위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활동이나 동작을 선분화된 시간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적 시간은 인간의 활동을 강제한다. 따라서 그에게 어떠한 사적인 시간이 흐르든 관계없이 그는 공적인 시간인 아홉시에 맞춰 학교를 가야한다. 이러한 강제는 폭력성을 수반하며 주인공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러한 시간의 선분화는 공적인 영역을 넘어 사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한다. 주인공은 결국 ‘아홉시병’에 물들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직선적 시간의 폭력성을 내면화한 그런 건강인인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아홉시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간의 선분화는 직선을 지향하며 그 이외의 자연적 공간들을 살해한다. 그 자연이 살해되고 남은 시체의 진개장이 바로 도시인 것이다. 도시에서는 이러한 시간적 배치가 공간적 배치로 전환되어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공간들을 구획한다. 이와 같은 근대적 시공간의 개념이 성립된 것은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 투성이었다.

『요한시집』에서 누혜는 유서를 통해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적 시공간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지에 대해 폭로한다. 누혜는 ‘육십 초 지각은 지각이지만 오십초 지각은 지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직선적인 시간관의 모순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공간적으로 구획된 공간인 학교에서 벌을 통해 죄를 배우며 점점 공민사회의 한 분자가 되어간다. 그곳에서는 단추를 다섯 개씩으로 획일화시켜 인간의 다양한 무늬들을 절단시킨다. 결국 시간의 선분화는 공간까지도 구획시키므로서 직선 이외의 것, 즉 인간의 다양한 무늬를 거세시킨다.

2-2. 시간의 선분화가 낳은 문명의 이데올로기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선분화는 또 한편으로는 비가역적인 진보의 논리를 전제하며, 문명/야만이라는 이분법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의 시대는 그 전보다 우월한 문명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서양은 문명국가로서 동양과 같은 야만국가보다 우월하다는 이념적 조작은 근대에 이르러서 실질적 힘을 발휘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문명을 지탱하는 장치로서―한국 사회에서는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장치로서―이용된다. 결국 문명의 모순을 감춘 채 그를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억압하고 짓밟는다. 위에서 살펴본 『요한시집』의 토끼 우화를 확장시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명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토끼의 우화는 문명의 발생과 이데올로기의 생산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고운 빛을 흘러들게 하는 저 바깥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라는 개안과도 같은 생각은 토끼의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이 개안은 마치 동물적 삶을 뛰어넘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태고 인간의 모습과 같다. 결국 토끼는 자신이 추구한 것을 얻기 위해 밖으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참담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은 토끼의 생에 처음으로 겪는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억압의 시작은 문명의 발생과 연결된다. 인간은 동물적 삶을 뛰어넘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공동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은 억압되어야 했고, 그를 위한 최소한의 금기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문명 발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토끼는 억압을 딛고 자신이 원하는 바깥 세계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결국 그 세계로 나간 순간 토끼는 소경이 되어버린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억압’으로 시작된 문명의 최대의 적은 ‘욕망’하는 인간이다. 토끼가 소경이 된 것은 문명에 의해 아예 ‘욕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저항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욕망을 아예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토끼는 소경이 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채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그가 죽은 자리에서 난 버섯을 오히려 ‘자유의 버섯’이라며 숭배한다. 그들은 그것이 없어지면 아주 이 세상이 꺼져 버리기나 할 것 같은 거짓 환상을 가진다. 이는 문명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토끼의 좌절은 문명의 모순을 드러낸다. 문명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을 거세시켜 그를 좌절시킨다. 그러나 그 뒤에 생산된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문명의 현실을 왜곡하고, 문명의 우월성만을 강조함으로서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명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시킨다. 이처럼 문명은 자신에 대한 거짓 환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낱말은 “동물적 상태에 있었던 우리 조상의 삶과 우리의 삶을 구별해 주고,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 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 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을 가리킨다. 이처럼 분명 ‘문명’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명’은 분명 인간의 욕망의 억압을 전제로 세워진다. 또한 ‘문명’은 그 억압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통해 철저히 인간을 짓밟는다.

눈구멍에서 뽑혀 드리운 누혜의 눈알. 여기저기서 공기가 찢어진 눈알들이 내다보고 있는 벌판에 서서 그래도 외쳐야 하는 ‘자유 만세!’

여기저기 ‘인간’이 찢겨져 있는데도 외쳐야하는 자유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표현되는 자유는 자유 그 자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왜곡된 표상형식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이다. 이는 문명을 지키기 위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인간에 반하는 일을 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 가장 절정으로 드러난 때가 바로 한국 전쟁 상황이다. 그 곳에서는 구속의 반대이어야 할 ‘자유’마저 구속이 되어버린다.
문명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장치에 결부시켜 종내는 모든 것을 말살시켜버린다. 『요한시집』에서 어느 순간 누혜는 자신이 ‘자유’에 얽매여 있음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추구했던 ‘자유’가 오히려 이데올로기화되어 다른 모든 가능성을 말살시키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그는 그동안 ‘자유’에 가려져 자기 자신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고, 자신을 보기 위해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장용학은 누혜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인간 내면에까지 침투해 그 외의 모든 가능성, 결국 인간의 생 전체를 말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문명’의 장치인 ‘이데올로기’가 인간에 반하는 일을 일삼는 데도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의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명의 최대의 적은 ‘욕망’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욕망을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문명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위협하는 욕망을 지닌 죄인일 수밖에 없다. 직선에서 벗어나는 자는 곧 죄인이다. 죄인인 인간은 문명을 비판할 자격을 상실한다.

그 무수의 가능성이 우연에 의하여 말살된 자리가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는 죄지은 존재이다. 생 속에서는 죄지었다는 것은 죄지을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범죄이다. 그 총목록이 세계이다. 세계는 범죄의 소산이고, 인생은 그 범죄자였다.

장용학은 문명세계에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인간은 모두 학교라는 죄의 집에서 벌을 통해 죄를 배운다. 내면화된 죄책감은 인간 자신이 지닌 욕망을 스스로 부인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며, 모욕이다. 이러한 곳에서 진정한 인간은 찾는다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의 열매인 ‘문명’은 익을 대로 익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더 이상 감당해낼 수 없다. 죄책감의 증대는 문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명은 죄책감을 개인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증대시킴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억압하도록 조종하여 자신을 지켜나간다.

2-3. 근대적 시공간 해체를 통한 원시로의 회귀
지금까지 살펴본 근대적 시공간 개념의 사상적, 이념적 바탕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생각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단면적 시선을 보여준다. 시공의 얽매인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일측면만을 보며, 그것이 곧 자신의 전면이라 착각하게 된다. 장용학이 볼 때, 그 일측면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작가는 이 일측면에서 탈주를 꿈꾼다.
그가 그러한 탈주를 꿈꿀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전쟁이었다. 문명의 횡포가 극에 달아 나타난 것이 전쟁이다. 특히 한국 전쟁은 문명의 장치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생겨난 전쟁이었다. 전쟁은 인간에게 원시적 본능만을 남긴다. 원시적 본능만이 남은 인간들은 전쟁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비문명적 행동을 드러낸다.
『요한시집』에서 60일 동안이나 혼자 남겨진 노파는 쥐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노파는 문명인이 아닌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써 살기 위해 쥐를 먹은 것이다.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비난되어야할 것은 인간을 쇠고기를 먹는 셰퍼드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 전쟁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호는 ‘인간의 체면을 이렇게까지 더럽힌 노파의 목을 꾹, 눌러서 나는 그 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노파에게 분노와 고통스러운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와 환멸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인간이 ‘문명적’이라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인간’은 애당초 문명적이지 않았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작가는 문명사회가 문명적이라며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 즉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강제였을 뿐임을 깨닫는다.
장용학은 결국 문명사회에서는 무수의 율, 즉 개개인의 무수한 욕망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수의 율’이 빛나는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한 시도를 시작한다. 장용학은『요한 시집』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동호라고 말한다. 누혜가 죽은 곳에서 그의 새로운 탄생은 시작된다. 그 탄생으로 인해 이제 동호는 ‘아침이면 해가 떠오른다’라는 하나의 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나의 율에 대한 의문은 무수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요한 시집』은 이처럼 하나의 율인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고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가 올 것을 암시하며 작품을 끝마친다. 『비인탄생』과 『역성서설』은 그러한 암시에서 더 나아가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시도한다. 그런데 결국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는 직선적 시간관의 해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벽이 벽인 것은 시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벽 안에서도 바깥 세계와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더 더딘 시간이었습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용학이 보았을 때 벽이라는 공간적 구획은 결국 시간의 선분화에 의해 절단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선분화를 해체하는 것은 결국 공간의 구획화까지 해체시킨다. 이제 죄인으로써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다시 서려면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통해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과거 쪽으로 흘러가는 사건의 흐름이 보인다. 거기서는 밥이 쌀이 된다. 입에서 나온 밥이 숟가락에서 그릇으로 내려앉고, 그릇에서 솥으로, 그 솥이 끓어올랐다가 아주 식어진 다음 뚜껑을 열어 보면 물속에 가라앉은 쌀이다. 뚝배기에 옮겨서 헤엄치고 나오면 겨가 붙어서 가게에 있는 쌀처럼 된다. 싸전에서 정미소로 가서 껍질을 붙이고 밭으로 간다. 여럿이 모여서 벼이삭에 달린다. 이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면 그들은 땅 속 한 알의 씨가 된다…….
이렇게 보면 거기에도 하나의 생성(生成)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世界)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역사(歷史)가 생겨진다.

결국 그는 불가역적인 직선적 시간을 가역적인 것으로 돌려놓음으로서 시간이 죽고 공간이 범람하는 유역, 비인의 왕국을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역성서설』에서는 결국 기계적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녹두대사를 파괴함으로써 그동안 직선에 의해 절단되었던 다양한 인간의 무늬들을 되돌려놓는다.
하지만 인간의 다양한 무늬를 되돌려놓고, 무수한 ‘욕망’을 가지고 누구나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 출혈이 얼마나 클 것인가 대한 의문이 남는다. 또한 죄의식을 동반하는 이데올로기의 통제 없이 무수한 욕망이 범람하는 사회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원형의 전설』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장용학이 볼 때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욕망’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인간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 안에서 계속 오택부의 ‘근친상간’은 개, 돼지만도 못한 짓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장의 ‘근친상간’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같은 금기인 ‘근친상간’을 어겼는데도 두 행동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바로 오택부의 ‘근친상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뛰어넘어 타인의 주체성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타인의 주체성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이 ‘욕망’을 돌려받은 ‘주체’로서 돌아간다고 해도 이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주체’는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선택한 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런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 되게끔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장용학은 직선적 시간관을 원형으로 바꿈으로서 근대적 시공간을 해체하고, 그를 통해 문명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까지 부정한다. 궁극적으로 그는 문명을 부정하고 원시시대로 회귀함으로서 절단된 ‘인간’의 다양한 무늬들을 되살리고자한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시공간에 얽매이며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녔으나, 이제 ‘인간’은 자기가 자(尺)인 세계를 창조해낸다.

3. 결론
전쟁이 한창인 1950년대 내 집, 내 학교, 내 공장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바로 자신 앞에 쓰러져있는 어린 아이 한 명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문학'을 하던 장용학은 그 누구보다 문학의 무용성을 처절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줌으로써 문학의 활로를 되찾으려 하였다. 그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작가 장용학을 주목하게 만드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문명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고 비약을 해버렸다.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부조리함은 두 가지 항의 비교에서 생겨난다. 만약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면, 문제를 구성하는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슬그머니 회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장용학은 문명의 부정적 측면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을 회피하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장용학을 전후문학에서 빼놓지 않고 논하는 이유는 절망적 전쟁 상황 속에서도 저항의 보루로서의 문학을 놓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문명은 분명 인간에게 많은 이로움을 제공한다. 인간은 이 문명 밖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이 느끼면서도, 또 그 안에서는 질식할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장용학이 ‘문명’에 대한 부정을 시도한 것은 문학가로서 그가 적어도 공범자는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전쟁이라는 비문명적 상태에서 그는 문명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문명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문명의 억압에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전선에 참가한다. 이처럼 그에게 문학은 현실에서는 풀어놓을 수 없는 ‘욕망’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장이었다. 그것이 전쟁 상황에서 장용학이 찾은 문학의 자리였다.

1) 어느 날 점두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의 수기를 그 몇몇 장면을 주어 읽게 되었다. 사람에게 바위를 떨어뜨려 으깨어 죽인다든지 눈알을 뽑고 코를 도리어 내고 사지를 뜯어내어 변소에 처넣었다든지 하는 장면은 빈혈증을 일으킬만한 것이었다. 그 울고 싶은 전율을 안고 보수산에 올라 와 저 앞바다 수평선 희미한 거제도의 도영을 바라보았을 때 내 마음에서 창작욕이 솟아올랐다. 저 섬에서는 얼마든지 큰 작품이 나올 수 있다.(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 實存과 요한 시집」, 국학자료원, 2002, 84-85쪽.)

2) 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 「 實存과 요한 시집」, 국학자료원, 2002, 85쪽.

3)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25쪽.

4) 정선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번역된 근대 또는 도둑맞은 문명독립국의 꿈」, 소명출판, 2006, 79쪽

5) 18세기 말이 되면서 자본가들은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환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 함께 임노동자의 고용이 확대되는 한편, 노동인구는 점차 과잉되어갔다는 역사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데, 사실 고용이 일반화되면서 시간은 애덤 스미스 말대로 ‘기회비용’이요 가치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임금이란 일정한 시간 동안 일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라면, 그것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최대한 가동하는 것이 관견인 것이다. 이젠 노동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가치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노동행위가 갖는 다양한 성질을 오직 시계바늘로 계산되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양으로 환원한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0쪽)

6 )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21쪽

7) 공간의 ‘구획화’는 협업과 분업과 관계가 깊다. “분업은 이전에 시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공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시간적 배치를 공간적 배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34쪽)

8)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63쪽

9)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1쪽

10) 지나가는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며, 그만큼 낭비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금”이라는 생각은 시간의 일방성(비가역성)과 긴밀히 관련된 것이다. 즉 자본가에게는 과학자들과 달리 음의 부호가 붙은 시간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지나간 것’일 뿐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0쪽)

1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문명/야만(미개), 서양/비서양, 식민국/피식민국, 이성/광기 등으로 현상하는 이항대립구도에서 전자는 후자를 배제하거나 ‘감금’함으로써 차별화한다. …중략…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절대적인 경계선은 오랜 시일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긴 하나, 이러한 이념적 조작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정선태.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2003, 103쪽)

12) 문명은 어느 정도의 본능 단념을 토대로 세워지며, 또 거기에는 대단히 많은 (억압, 억제, 또는 그 밖의 수단에 의한) 본능 불충족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83쪽.)


13) 인류의 공동생활은 다수가 모여 어떤 개인보다 강한 집단을 이루고 모든 개인에 대항하여 결속을 유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처럼 개인의 힘이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되면, 문명은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게 된다. 문명의 본질은, 개인적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사실에 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80-281쪽.)


14)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그의 후계자들의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정신분석이론과 그 밖의 이론은 욕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라캉주의자들은 특정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되는 욕구(need)와 타자에게 대응하여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망은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양兩개념을 수반할지라도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욕망은 오히려 세계 속에서 만족스러운 대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거세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탐구-를 지배하는 환상적 구축물을 향해 있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146쪽.)

15) 1 비평의 현행 용법에서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는 관념의 그 사회적 맥락과의 관계를 정의하려는 다양한 정치적 철학적 시도의 결과로 발전되었다. 첫째, 이데올로기는 사회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하려는 잘못된 표상 형식이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법률, 철학, 윤리, 예술 등과 같은 사회의식의 모든 형태들의 결합이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처럼 단순히 어떤 사회계급 혹은 경제계급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정치적 관념들이다. 끝으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은 이 세 가지 모든 정의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이데올로기의 이론을 구성했다. 이데올로기란 모든 개인들의 삶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표상 체계 혹은 이야기 체계라는 이론이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234쪽.) 장용학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사회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하려는 잘못된 표상 형식이라는 첫 번째 의미의 성향이 강하다.

16)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73쪽.

17)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21쪽.

18) 그들은 뭐든지 어떤 한 가지를 모든 것에 결부시켜서 종내는 그것을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14쪽.)

19)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그의 후계자들의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정신분석이론과 그 밖의 이론은 욕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라캉주의자들은 특정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되는 욕구(need)와 타자에게 대응하여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망은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양(兩)개념을 수반할지라도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욕망은 오히려 세계 속에서 만족스러운 대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거세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탐구-를 지배하는 환상적 구축물을 향해 있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146쪽.)

20)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7쪽.

21)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 영원히 익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0쪽.)

22)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326쪽.

23) 시공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동시에 두 지점에 설 수 없다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눈에 비쳐 든 것은 그 대상의 일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한 지점에만 서 있게 되면 우리는 그 일측면만을 보고 사는 것이고, 영원히 일측면만 보고 살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전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원형의 전설」, 동아출판사, 1995, 213쪽.)

24)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원형의 전설」, 동아출판사, 1995, 206쪽.

25)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07쪽.

26) 비인(非人)의 왕국! 시간이 죽고 공간이 범람하는 유역, 공간적 거리만이 거기에 있을 뿐 시간적 전후가 없는 땅! 결정(結晶)이 있을 뿐 부패가 없는 안뜰. 존재가 곧 본질이요, 내가 내인 오직 동일률(同一律)만인 계절이 거기에 온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비인 탄생」, 동아출판사, 1995, 399쪽)


27) 이제 시간은 노동과 관련된 행위의 일반적 척도가 된다. 이러한 척도는 선택 가능한 행위의 외연을 규정하며, 그것을 벗어났을 때 가해지는 벌금이나 처벌 등은 일반적 척도로서 시계적 시간이 단지 측정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강제를 수반하여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주변장치다. 그것은 시계적 시간이 사람들의 활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3쪽.)

28)1 실존주의의 적극적인 성격은 그 주체성의 존중 나아가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인간의 위엄을 재건하려는 그 의욕에 있는 것이다. 실존의 주체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선택의 주체성과 책임의 주체성이다. 나의 존재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행동 존재방식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선택한 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런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 되게끔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대신해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행동에 대하여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전 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 실존주의가 지니고 있는 깊은 윤리성 있는 것이라고 위에서 본 바……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주체성의 회부」, 국학자료원, 2002, p.149

29) 알베르 카뮈, 김혜숙 역, 『시지프스의 신화』, 청하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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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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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개인 그리고 몸

- 김훈의 「화장」

Ⅰ. 서론

이제 막 21세기로 들어서려는 길목에서 ‘3인칭 공포증’이라는 희귀한 신경증을 지닌 작가가 홀연히 한국 문단에 등장하였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라는 찬사와 함께 ‘개별화의 마성은 공허하다’라는 비판까지, 그는 등단하자마자 각별한 문단의 관심 속에서 고속행진을 이어왔다. 그의 소설은 이제 한국문학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김훈’이라는 외자 이름을 가진 이 작가는 그의 이름처럼 언제나 홀로 지내는 충만함을 즐기는 50대 남성이었다. 이 ‘홀로’라는 키워드는 때로는 ‘개인’1)으로, 또 때로는 ‘개별자’로 변주되며 김훈의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주인공 대부분은 1인칭 화자이다. 1인칭은 ‘나’라는 구체성을 지닌 개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도 ‘너’도 아닌 ‘그’로써 표현되는 3인칭은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실체 없는 그 ‘누군가’이다. 3인칭은 누구나 언제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는 보편자를 의미한다. ‘3인칭 공포증’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지향점은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향해 있다. 이 개별자의 숨은 욕망과 동기들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몸’이다. 김훈의 「화장」은 끊임없이 이 개별자의 몸을 추적해나간다. 우리는 그의 추적을 따라가 보며 과연 보편으로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가 '몸'으로서 구현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이미지로서의 육체 - 상품화되고 대상화된 육체

『화장』은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이 됨과 동시에 시작된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이 되었다는 것은 곧 아내의 생명이 0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죽음을 가리킨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죽음이 간단명료하게 수치화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수치화는 모든 죽음을 획일화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지니는 이러한 사소성은 곧 익명화되고 획일화된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안에서는 개별성의 증거였던 육체마저도 이미지라는 보편성으로 너무나 쉽게 환원되고 만다.

연구개발실장은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면서 아마도 질 내부의 산성 정도를 서너 계통으로 분류해서 거기에 맞는 제품들을 별도로 생산해야 할 것 같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사장은 생산비가 두 배 이상 들어가고, 선전에서 추가비용이 발생하며 유통과정 관리가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연구개발 실장의 대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2)

주인공이 다니는 화장품회사에서는 의약부외품인 질 세척제와 질 방향제 개발사업에 연구비 오십억을 투입하면서 연구개발해 왔다. 그러나 질 세척제의 인체 적용실험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 여성의 질 내부온도와 분비물의 산성농도에 따라 수많은 편차를 드러내고 이에 발생하는 생화학적 과정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각각의 개별자인 여성의 질을 고려하여 그 개별자의 특성에 맞는 질 세척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장은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 개별자의 특성을 고려해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윤을 남길 수 없는 비합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안으로 서너 계통으로 분류하여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다. 개별성이 모두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어야만 효율성이 높아지고 그 안에서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이렇게 개별성의 억압 위에 세워진 동일성은 광고와 언론 등을 통해 보편적인 이미지로 보급된다.

두 과장들은 또 이미지에 따른 로케이션과 양상 구성의 내용, 손톱, 입술, 눈동자, 허벅지, 장딴지, 눈썹 같은 부분모델을 기용하는 문제와 그 모델들의 신체 특징을 열거해나갔다. 박진수가 들고 온 가방 속에는 모델들의 신체부위를 찍은 천연색 사진이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정철수는 지난 일 년 동안 TV드라마, 영화, 가요, 패션, 무용에 나타난 여성성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를 꺼내 보였다. 3)

이런 식으로 사회는 보편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보급해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인간의 개별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켜버린다. 동일성으로 환원된 개개인의 육체는 이제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게 된다. 이제 인간의 몸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소비되어야하는 대상으로서 취급된다. 이처럼 대상화되고 보편적 이미지로 규정된 육체는 실체 없는 헛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광고 문구를 정하는 과장들의 말들은 무엇보다도 스모키한 헛것들이었으나, 실제로 광고를 만듦으로써 이미지를 배포하고 상품을 소비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힘을 지닌다. 그러나 이 헛것들은 개별자에게 있어서는 있으나마나 한 것들이다. ‘모든 생명현상은 죽음을 향한다.’는 의사의 뻔한 말― 즉, 보편적 진리 ―은 아내의 개별적 생명현상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화장』에서의 화장은 죽은 사람을 불에 살라 장사 지내는 화장(火葬)인 동시에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을 가리키는 동음이의어다. 화장(火葬)은 삶을 살아가면서 육체에 덧씌워져 있던 누추함을 가린 것을 벗겨내고 그 본질을 보여주는 반면에 화장(化粧)은 삶을 살아가면서 온갖 누추함을 가리고, 미화시켜 덧칠한다. 즉 이는 벗겨냄으로써 누추함마저 보여주는 실체로서의 육체를 보여주는 것이고, 덧칠함으로써 누추함을 감추는 이미지로서의 육체를 나타낸다.  이미지로서의 육체는 바로 이 헛것들로 덧칠된 상품화되고 대상화된 육체이다. 김훈은 이 헛것들을 모두 걷어냄으로써 인간을 대상의 자리에서 다시 주체의 자리로 회귀시키려한다.

 2. 실체로서의 육체 - 치욕으로서의 삶

삶에서 소외된 개별자를 삶 한가운데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작가는 화장(化粧)을 벗겨낸 육체를 향해 파고든다. 타락한 세계와 대립하는 순결한 개별자의 몸은 인간을 구원해줄 약속의 땅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헛것을 드러낸 실체로서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것은 악취와 구린내뿐이다.

아내가 가장 견딜 수 없어했던 냄새는 김이 나는 더운 쌀밥의 냄새였다. 냄새는 혐오할수록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옆 침대 환자가 김나는 밥을 먹을 때도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일으켰다. “더운밥이 구린내가 더 심해요. 냄새가 김으로 퍼지거든요.”라며 아내는 간병인을 들볶았다. 아내가 야채즙이나 크림수프를 먹을때도 간병인은 코를 막아주었고 아내가 삼키고 나면 입안을 물로 헹구어냈다. 4)

뇌종양에 걸린 아내는 밥에서 구린내만을 느낀다. 그 구린내를 맡고 구토를 일으키지만 이 밥을 먹지 않으면 아내는 육체를, 그 몸 토대로 해야 비로소 가능한 삶을 유치할 수 없다.  그러나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아내에게 있어서 고통의 연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를 획득할 줄 알았던 개별자는, 또 다시 그 개별자는 물적토대인 육체에 의해 다시 얽매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여기서 개별자는 무력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간호사가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간호사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애무를 해주듯 손을 움직여 내 성기를 키웠다. 고무장갑 낀 간호사의 손 안에서 내 성기는 부풀었다. 성기는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내 몸이 아닌 내 성기가 나는 참담하게도 수치스러웠다.5)

동일성으로 환원된 개별자를 구원하기 위해 실체로서의 육체를 파헤쳤지만, 그 실체로서의 육체는 개별자 스스로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나는 오줌을 싸고 싶은데 몸은 오줌을 배출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기는 내 몸의 일부이지만, 내 몸처럼 느껴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몸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적토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개별자로 돌아왔지만 계속해서 물적토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여기서 무력감을 느낀다.

자정께 아내는 다시 두통 발작을 일으켰고, 진통제와 수면제 주사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아내가 깊이 잠들어서, 아내의 의식이나 수치심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시간에 저는 안도했습니다.6)

자신의 몸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아내는 샤워 도중에 똥물을 흘린다. 그런데 아내가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무력감이 아닌 수치심이다. 이 수치심은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시간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수치심을 일으키는 것은 개별자의 의식 속에 각인된 보편적 이미지로서의 신체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물적토대와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미지로서의 신체간의 간극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결핍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나는 이 결핍을 채울수 있는 것을 생명력으로 본다. 그 생명력이 바로 추은주라는 이상화된 육체이다.




3. 이상적 육체 - 원시적 생명력 갈구

이미지로서의 육체로 상품화된 육체와 실체로서의 육체로 소멸화 되어가는 육체의 추악함 사이에서 결핍된 채 괴로워하는 나는 이상적인 육체를 꿈꾼다. 그 이상적인 육체를 지닌 자가 바로 추은주이다. 그 여자의 몸을 쫒는 나의 시선은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이상적인 육체를 쫒는 것이다.

 

추은주는 함께 온 여직원들과 나란히 서서 아내의 영정을 향해 두 번 절했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닥에 엎드린 추은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추은주는 블루진 바지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추은주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 머리타래가 흘러내렸고 맨발의 뒤꿈치가 도드라졌다. 뒤꿈치의 각질과 엄지발가락 밑의 둥근 살도 보였다. 엎드린 추은주의 등과 엉덩이는 완연한 몸이었다. 세상속으로 밀치고 나오는 듯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스스로 자족해 보였다.

추은주의 몸은 살아있는 완연한 몸이다. 육체 자체가 살아있음을,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추은주는 치욕적인 삶으로 죽음에 치닫고 있는 아내의 모습과 대조된다. 아내는 치욕적인 삶에 끊임없이 수치심을 느끼지만, 추은주는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스스로 자족하는 존재다. 그녀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는 삶이다. 그런 그녀의 육체를 나는 계속해서 쫒고 있다. 오줌이 빠지지 않는 나의 몸은 무거웠고,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다. 그 결핍 속에서 그녀가 가진 생명력을 욕망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갈구는 삼인칭의 언어로 확장된다.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의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7) 
 

나는 소멸 되어가고 있는 나의 몸을 왕성한 생명력으로 이끌어주기를 끊임없이 바라지만 실제로는 그의 부름은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추은주는 늘 나에게 3인칭으로 다가온다. 이상적 육체와 직접 맞닿음으로써 생명력을 얻으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여기에서 좌절된다. 그녀는 여기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는 3인칭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욕망은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고, 그 언어조차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Ⅲ. 결론

「화장」을 통해 드러난 김훈의 문학관은 ‘소설이란 곧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인간이 개별적으로 살아있다는 것, 즉 이 찰나에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삶의 질감을 재생하고자 함이다. 「화장」은 그러한 삶의 질감을 재생해내는 공간을 역사적 공간에서 현대적 공간으로 옮겨오는 시점에 쓰인 소설이다. 언뜻 보기에 현대인은 이순신보다는 더 자유롭고, 사인화(私人化)된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훈은 여전히 국가공동체, 혹은 권력의 중력이 개별자의 의지와 욕망에 삼투하며 억압8)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그 폭로의 과정을 육체라는 통로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유난히 집착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몸(육체)’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건 결국 그 무엇이든 이 몸이라는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은 개별자가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이다. 세계는 언제나 개별자에게 욕망을 미디어, 책, 관념, 상징, 추상, 언어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하다고 인정된 매개체들을 통해서만 표현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개별자의 욕망을 완전히 배출해낼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타자와의 완전한 소통 또한 가능할리 없다. 사회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 개별자의 몸은 사물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고 대상화된다. 개별자는 무력함을 느낀다. 그러나 김훈은 포기하지 않고 개별자의 몸을 끊임없이 파헤친다. 개별성이 가려진 이미지로서의 육체도, 그것을 벗겨낸 실체로서의 육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치욕의 삶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줄 것만 같은 이상으로서의 육체도 모두 개별자의 결핍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개별자가 끊임없이 세계를 향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개별자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세계와 대면하고자 한다. 그의 싸움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그 패배의 치욕을 견뎌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화장」은 외적 패배를 받아 드리고 ―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렵혀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내적 승리를 ― 결국은 포섭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성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내는 일 ―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에 대한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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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배반의 수사학, 들춰내며 가리기

-김훈 소설이 아직 가지 않은 길

1 화두의 전환, 역사 속의 개인 들춰내기 

 

  끝이 나지 않을 이야기를 시작하려한다. 답답함이 밀려온다. 「남한산성」은 꽉 막힌 성의 답답함 그 자체였다. 한동안 나는 그 답답함을 긴장이라 부르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왜 진리가 주는 안도감에 기대서는 안 되는가. 모두가 말해줬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뉘앙스로만 답하였다. 물음이 차올랐다. 그것이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나는 더 진리에 안주하련다. 아니다, 그것은 또 너무나 반시대적이다. 반시대적인 것은 또 지나치게 그의 시대를 닮아있다. 제 3의 길을 찾아야겠다. 시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 할 만큼.

 

  김훈의 시대는 그를 얼마만큼 알아보는가. 「칼의 노래」에서 그는 반시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박하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 동상의 폭파를 부르짖는 미치광이 지식인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묘사했을 뿐이었다.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삶은 개별적이었다. 이순신 그의 삶도 그러했다. 우리는 동상에 가려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항상 먹먹했다. 전환점은 ‘이순신 동상이 실제 이순신인가, 아닌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던진 화두는 ‘동상에 가려진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였다. 김훈은 폭탄 없이 집요한 묘사만으로 이순신 동상을 허물었다. 언어의 힘이었다.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출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라는 찬사와 함께 ‘개별화의 마성은 공허하다’라는 비판까지, 김훈은 등단하자마자 각별한 문단의 관심 속에서 고속행진을 이어왔다. 그는 한결같이 ‘3인칭 공포증’이라는 희귀한 신경증을 내세우며 세상과 독대하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주인공 대부분은 1인칭 화자이다. 1인칭은 ‘나’라는 구체성을 지닌 개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도 ‘너’도 아닌 ‘그’로써 표현되는 3인칭은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실체 없는 그 ‘누군가’이다. 3인칭은 누구나 언제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는 보편자를 의미한다. ‘3인칭 공포증’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지향점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보편자보다는 치욕적인 삶에 대해 무력하게나마 응대하는 개별자를 향해 있다.

 


2 백전백패, 몽당연필을 든 무사의 싸움

 

  그런 그가 3인칭 소설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언어의 힘으로 영웅 이순신을 무너뜨린 그가 이제 언어의 힘으로 언어의 허무를 말한다. 「남한산성」은 허무 그 자체였다. 그 허무는 압도적 대상을 상대해야하는 약자의 무력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성 안에는 말들이 들끓는다. 그러나 그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을 맺는다. 그 ‘하나마나한’ 말들 사이에서 묘당은 출렁였으나 나아갈 길을 더듬어낼 수는 없었다. 언어는 극한 상황에서 가장 나약한 자들이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들은 싸움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질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안의 싸움이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살고자 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그 안에서 울면서 곡하기와 웃으며 곡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허무 안에서도 삶은 계속됐다. 인간의 삶은 사소하고 소소했다.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했다. 그 안에서 말은 가장 가벼웠다.


언니의 말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 언니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고 언니 혼자에게만 유효한 말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나는 언니의 말에 뭐라고 개입할 수가 없었다. (「언니의 폐경기」)


  폐경기의 언니는 가끔씩 뜨거운 피를 쏟는 대신 의미 없는 말로 자신을 채웠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만 유효한 말이었다. 누가 언어를 소통의 수단이라고 했는가. 이 순간 언어는 자족적이며 자기지시적이다. 대부분의 언어는 타인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몸짓일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상헌과 명길의 싸움 각자 자신의 싸움이었다.  


  상헌과 명길의 싸움은 곧 김훈 자신의 싸움이다. 갇힌 성 안에서 ‘의義’를 외치는 언어는 결코 ‘이利’를 이길 수 없다. 명길이 말처럼,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나 적합한 양식이었다. 소설은 결코 삶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은 못 되었다. 상헌의 말은 나무랄 데 없는 당연한 말이었고, 명길의 말은 필요한 말이었다. 필요 앞에서 당연함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훈 안에서 명길의 말이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네가 하는 소설은 배부른 자의 여유일 뿐이라고. 네 손에 쥐어 쥔 몽당연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준엄하게 꾸짖는 명길의 모습에 그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뼈아픈 한마디가 떠오른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전장에 쓰러져 있는 작은 아이 한 명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소설이란 단지 배부른 자들의 여유이며, 투정인가. 

  언어로 쌓은 성, 소설의 무력함을 증명하듯 남한산성 안에서 말들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그들의 말은 부딪쳐서 흩어졌다. 애초에 합쳐질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성 안의 말은 그 무엇을 위한 말이 아닌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말이었다. 임금은 넌지시 말한다.

아니다, 그냥 둬라. 저들은 저래야 저들일 것이니…… (「남한산성」) 

  

  애초에 무엇을 향하지 않았기에 말들은 그저 맴돈다. 허무는 여기서 비롯된다.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애초에 자족하기 위해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무가 되고 말아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했다. 말들은 끊임없이 맴돈다. 적 앞에서, 현실 앞에서 무너진 언어가 쌓이고 쌓여 무기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의 끝에는 최명길을 베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 후렴으로 매달려 있었다. (「남한산성」)

  임금은 이 맹목적 증오와 폭력성 앞에서 고개를 가로 젓는다. 명길을 죽여 성을 지키자는 그 들의 복받친 울음이 임금은 괴이하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인하고 지키려고 하는 나약한 자들의 마지막 안간힘이 임금은 눈물겹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언어가 적의 언저리라도 짚었다면, <남한산성>의 언어는 애초에 적을 향하지도 못한다. 두려움에 그들은 이내 자기 안에 새로운 적을 만들어낸다. 명길을 베어야한다는 부르짖음은 세계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언어의 무력함을 폭로하고, 그것이 쌓여 폭발 직전인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3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렵혀진다는 것

  임금은 무력함 속에서 울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사관은 붓은 그 눈물을 삼켜야 하는 붓이었다. 그러나 김훈은 붓은 그 눈물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그의 붓이 추적해나가는 개개인은 먹고 배설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흙냄새가 나고, 피가 나며, 다 찢겨진 상처투성이다. 그 안에서 삶은 이순신의 삶처럼 개별적이었으며, 보편적이었다. 그의 지향점은 여전하다.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된 역사는 거짓이다. 인간의 삶이란 지극히 공포스러운 것이며 그로써 비롯되는 치욕을 담아내는 것이다. 명길을 베어야한다는 부르짖음은 결국 그 치욕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몸부림이다. 김훈이 볼 때 그 치욕을 수용하는 것만이  생의 엄숙함을 지키는 일이다. 남한산성은 결국 그 치욕의 길을 향해 내딛는다.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남한산성」)

  김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전이냐, 주화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흩뿌려진 피를 덮는 눈처럼 지속되는 삶에 대한 긍정이다.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땅 위로 뻗은 삶의 길은 이미 나 있었으므로 갇힌 성 안에서는 치욕과 자존이 다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들끓는 언어는 무력감과 허무감만을 더해갈 뿐이다. 


  결국 그는 언어의 허무에 대한 물음에 그 허무로 이루어진 소설을 씀으로써 답한다. 비록 소설 그 자체가 허무일지라도 그는 끊임없이 소설로서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애써 그 허무를 지우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허무를 창조할 것이다. 그는 허무를 지우기 위해 허무를 창조할 것이다. 묘사하기는 그에 적당한 글쓰기이다. 그 안에서 상헌도 명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역설을 버티는 것이 그의 몫이다. 


  그러나 서날쇠 앞에서 그들은 수치감을 느낀다. 대나무 바늘을 만드는 일이나 똥국물을 만드는 일은 하찮고 소소한 일이나, 그 무게감은 한없이 그들을 짓눌렀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몸이 성안에 갇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대, 창검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느냐……. (「남한산성」)

  그들을 가장 부끄럽게 하는 자는, 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서날쇠이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 삶에 필요한 것들을 생성할 수 있는 연장을 쥔 자이다. 정치가에게 제일 무서운 자는 생활인이다. 이명박의 적은 다른 대선후보자들이 아니다. ‘대’운하는 다른 대선후보자에게는 반박해야할 의미가 있는 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 촌동네 사거리쯤 위치하는 구시장에서 나물과 상추를 파는 그이에게는 가닿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헛것이다. 소설가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헛것이라 떠드는 자의 담론은 소설을 위기에 빠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인은 다르다. 아름다운 소설은 그의 배설 앞에서 쩔쩔맬 것이고, 알만한 소설도 그의 삶의 지혜 앞에서 무너질 것이다. 그들은 소설 없이도 충분히 살아 숨 쉴 것이다. 그들이 몰아쉬는 숨결만으로도 소설가는 무너진다. 


  그러나 청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라진 서날쇠의 삶을 추적해낸 것도 소설이다. 그러기에 그는 펜을 놓지 않는다. 삶은 언제나 치욕이며, 허무이다. 그 안에서 그 치욕을 견디기보다 즐기며 허무를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김훈의 추구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렵혀지는 인간을 끊임없이 긍정할 것이다.


 

4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가리는 것들 - 불 지르는 자, 그 누구인가.

 

- 화친을 배격하고 오로지 대의를 곧게 하니 적들이 깊이 들어온 것 아니냐? 오늘의 일이 대의에 비추어 어떠하냐?

- 지금은 대의가 아니옵고 방편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불붙은 집안에는 대의와 방편이 다르지 않습니다. (「남한산성」)

  김훈의 수려한 문체는 분명 그의 소설에서 큰 역할을 해내고 있음이 분명하나, 그 문체는 때때로 독자의 눈을 가리기도 한다. 「남한산성」에서 그는 명길과 상헌의 담론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며 서날쇠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작가가 은근히 명길의 손을 들어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서날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명길이 아니라 항상 상헌이었다. 상헌이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독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결국 그도 명길의 담론에 흡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결국 그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한 인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주전파와 주화파의 주장이 한 덩어리로 엉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쉬이 수긍한다. ‘한판 싸우고 화해하자!’, ‘몸 성할 때 화해하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화’를 염두 해두는 것은 같기 때문에 ‘주화’와 ‘주전’이 결국 다르지 않으며 산성 안의 이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훈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김상헌은 순결주의자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한판 싸우고, 얻어낼 껄 최대한 얻어내자.’가 아니다. 그는 더렵혀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순결주의자이다. 김훈은 그런 김상헌에게 최명길의 목소리를 빌려 지긋이 말한다. 삶은 결국 치욕이고 더렵혀지는 것인데 그 때마다 죽음을 택하겠느냐고.

  문제는 정말 이 집이 불타고 있는가이다. 불탄 집에서는 물론 몸을 먼저 피신할 수밖에 없다. 이 공간에서 선택이라는 말은 무색해진다. <남한산성>은 이처럼 선택을 물을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지만 이 또한 엄연한 소설이다. 그처럼 극도로 고립된 극한의 상황은 인간의 선택권을 강탈해간다.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누군가 우리를 항상 그런 극단의 상황으로 몰아놓고 치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보수언론과 수구정당이 외쳐 되는 한반도는 남한산성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연신 핵무기로 위협해오는 북한은 청과 다를 바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대의와 방편이 다를 바 없으니 미국과 치욕적인 협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전쟁이 터질 것이다. 고로 한미 동맹만이 살 길이다.

  물론 김상헌은 과잉이다. 우리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을 해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분석과 그 토대에서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치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훈의 소설이 그동안 부정당하고 억압당해왔던 수치스럽던 인간의 이면을 들춰내고 그것을 긍정하는 점은 높이살만 하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그 개인을 들춰내고 거기서 발견된 치욕과 고통을 그대로 수용하는데서 그친다면 그는 또 너무나 쉽게 그가 부정해온 담론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처음에 던진 질문을 다시 꺼내보자. 김훈의 시대는 그를 얼마만큼 알아보는가. 그는 아직 반시대적이며, 그래서 더더욱 시대적이다. 니체는 위대함 시대성, 반시대성이 아니라 비시대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비시대성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김훈이 가지 않은 길이며, 또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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