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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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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오랜만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전율이 흘렀다. 진보논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존심에 대해 입을 모았다.  그 안에는 늘상 들어온 진보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자존심.  [명사]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진보적으로 사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일상적인 폭력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야하는데 - 사실 선택이 주어지는 것 같지도 않으나 -그 순간 많은 타협들이 우리의 진보적 선택을 가로막는다.

이는 살아오면서 학습해온 타협의 편리성 때문이기도 하며  그 일들이 그렇게 자존심을 내세우며 대항해야할 만큼 싸울만해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이래서 민주의 탈을 쓴 정부는 더 잔악하다. 뭔가 마땅치는 않는데 딱히 공격할 뭔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침투하여 순간순간의 타협과 비굴을 강요한다.
 
여러 혁명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황이 비일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많은 혁명인들의 성과를 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성이라는 것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또 쉽게 합리화하게 만든다.

또 그런 거센 반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반해야할 세력이 워낙 가시적으로 막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책 안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적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일을 잘한단다. 자신이 그런 적은 돈에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아예 그 거짓말을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그렇다. 순간순간 작은 강요와 폭력 앞에서 자신을 한두번 꺽고 난 사람들이, 작은 폭력에 자신이 굴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아예 자신을 속이며 사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자본가는 교묘하게도 싸울 의지도 들지 않으면서도 굴하고  나면 자존심이 상해버리는 정도의 폭력만을 쓰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권력가들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많은 기술을 터특해나가고 있다. 좋게 말해, 우리 국민들은 너무 순진하다. 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린 바보처럼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건,
속이는 것도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속인다는 거, 즉 자기기만에 빠져 사는 삶은 얼마나 슬픈가.

속고 속이는 사이에 스스로 지쳐 자신을 내던지지 말자.

인생은 속고 속이는 잔혹한 사기극이 아니지 않은가.

균형있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몸부림칠 수 있는 "자존심"이 필요하다.

그 것이 바로 우리 실존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순간순간 타협과 굴종을 요구받는 당신에게
이 책을 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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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화를 기원하지 않는다 - 국제분쟁전문가 김재명의 전선 리포트
김재명 지음 / 지형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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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의의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서 약자의 평화를 꿈꾸다

- 정의의 전쟁과 불의의 전쟁

 


수많은 정의의 전쟁, 그 속의 진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적인 힘의 배치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세계정책의 중심무대를 차지하던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준 것이다. 커다란 변화이자 전환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국제적인 힘의 배치의 전환일 뿐 국가권력의 대칭이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비대칭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러한 힘의 불균형 상태 속에서 종교, 인종, 신념, 체제가 다른 전 세계의 국가들이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지구촌의 각 지역에서는 종족간의 갈등, 종교 간의 전쟁, 권력을 위한 내전,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쟁 등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에서 승리자는 없다. 피해자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명분 없는 전쟁은 없다. 모두가 명분을 내세워 그 뒤에 숨은 시퍼런 욕망의 서슬을 감춘다. 누구나 자신의 전쟁만은 정의의 전쟁임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전쟁이 정의의 전쟁인 것일까? 단호하게 말하자면 그 모든 전쟁이 정의의 전쟁은 아니다. 그 중에는 불의의 전쟁도 많다. 그렇다면 정의의 전쟁이라 주장되는 수많은 전쟁들 속에서 우리가 진실로 정의의 전쟁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불가능한 평화의 대안으로서 정의의 전쟁

정의의 전쟁론의 핵심은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 무력사용을 행사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가를 둘러싼 판단이다. 결국 정치적 폭력의 사용이 윤리적으로 정당한가를 둘러싼 논의이다. 물론 폭력이나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논의조차 되지 않을 담론이다. 평화주의자들은 언제나 전쟁을 반대한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어떤 전쟁이든 폭력이든 합리화될 수 없다. 그러나 장 폴 사르트르는 “외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정당하다.”라고 선언한다. 비폭력운동의 바탕은 억압자의 도덕적 양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지 치하의 악랄하고도 혹독한 억압 상황에서, 나치 독일의 삼엄한 통치 아래서 그러한 불복종운동이 성공을 거둘 수는 없다. 현재로서는 칸트의 말대로 “영구평화란 무덤 속에서 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화를 포기한 채 가만히 주저앉아 불의의 전쟁을 지켜보아야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평화가 불가능하다면 불의의 전쟁만이라도 막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의의 전쟁을 제대로 알고 이를 수행해야만 한다. 곧, 현재 상황에서 불가능한 평화의 대안으로서 정의의 전쟁이 존재한다.


불의의 전쟁, 그리고 정의의 전쟁

그렇다면 정의의 전쟁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먼저 정의의 전쟁이라 주장되는 전쟁들을 살펴볼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서론에서도 이야기되었던 미국이 일으킨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들 수가 있다. 미국은 전선을 아프간에서 이라크로 넓힌 것은 (의심받은 바대로 석유 때문이 아니라) 후세인 독재를 뒤엎고 이라크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우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라크 침공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주장을 편다.




정의의 전쟁을 말할 때는 일반적으로 세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첫째, 전쟁을 벌일만한 충분한 근거와 명분이 있는가(전쟁선포의 정당성). 둘째, 일단 전쟁이 벌어졌다면 그 전쟁에서 지나친 폭력을 삼가는 등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고 올바로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전쟁행위의 정당성). 셋째, 전쟁 마무리 단계에서 전쟁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짐으로써 다음 전쟁의 불씨를 만들지 않도록 노력하는가(전쟁종식의 정당성)이다.




위와 같은 정의의 전쟁의 기준에 비추어볼 때 미국이 벌린 아프간 전쟁과 이라크 전쟁은 정의의 전쟁이 아닌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이 내세운 것은 명분에 불과하다. 명분만으로는 나머지 두 항목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그 명분조차도 욕망의 샘이라 불리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한 미국의 시커먼 욕망을 가리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이라는 거대 권력에 맞서 ‘약자의 무기’라 여겨지는 테러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현 팔레스유엔 총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가와 테러리스트가 다른 점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이다. 올바른 투쟁동기를 지녔고, 침략자들과 정착민, 그리고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땅과 자유를 지키려고 투쟁하는 사람은 테러리스트라 불려서는 안 된다.” 물론 감추어져 있기는 하지만 물론 국가의 테러도 명백히 존재한다. 이러한 국가의 테러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테러는 ―위에서 언급한 비폭력의 세계는 오기 힘들며, 비폭력 저항으로 외부의 침입자를 물리칠 수 없다는 맥락에서 ―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이라 해서 그것을 쉽사리 정의의 전쟁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사실 정의의 전쟁론이 요구하는 세 기준에 비춰보면, 안타깝게도 하나같이 정의의 전쟁에 못 미친다.  테러도 마찬가지이다. 공포의 확산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테러는 결국 잔인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다. 테러리스트들은 자신들의 명분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만, 테러의 희생자들에게 그 주장은 공허할 뿐이다.

이렇게 불의의 전쟁에서 정의의 전쟁으로 가는 길은 쉬워 보이지만, 넘어서기 힘든 장벽이 버티고 있다. 명분만 정당하다고, 또는 과정이 깨끗하다고, 마무리가 잘 되었다고만 해서 정의의 전쟁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자의 평화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그 대안으로 ― 강자의 평화를 꿈꾸기보다는 ― 정의의 전쟁을 기원한다.



정의의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서 약자의 평화를 꿈꾸다

 ‘전쟁’이란 나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적에게 굴복을 강요하는 폭력행위라고 클라우제비츠는 말했다. 물리적 폭력을(수단) 써서 적이 저항하지 못하도록(목표) 적에게 나의 의지를 강요할(목적)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그리고 욕망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상황은 더 악화되어 자살폭탄테러까지 성행하고 있다. 이슬람 무장 세력은 ‘자살폭탄테러’까지 감행하며 이스라엘을 향한, 미국을 향한 최후의 극단적인 몸부림을 치며 저항하고 있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을 보며 자살폭탄테러가 만든 결과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그 결과에 대한 응징을 하겠다며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것을 지켜보는 평화주의자나 반전주의자들은 미국의 한계가 ‘테러의 개념을 국가가 아닌 정치적 무장집단이 저지르는 폭력으로 좁혀보는 것’이라고 얘기한다. 미국이 ‘왜 테러가 발생 하는가’에 대한 테러의 ‘근본 원인’보다는 그 ‘결과’로 일어난 희생과 손실에만 집착한다고 지적한다.

자살폭탄테러는 그들의 분노의 폭발적인 표현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부시 행정부는 테러의 원인을 빈곤과 무지, 종교적 편견 등으로 꼽아왔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오리엔탈리즘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깔려 있다. 그 담론 안에서는 합리적으로 발전해 온, 인도적이고 우월한 서양과, 탈선적이고 정체되어 있으며 열등한 동양의 사이에 절대적이고 체계적인 상위가 있다. 이러한 구분은 추상적인 증오를 더?한 편견을 가지고 군사력으로 자폭테러를 막으려다가는 오히려 자폭테러 건수를 늘릴 것이다. 이러한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투쟁 동기를 진정으로 읽어내야만 그들의 투쟁은 조금씩 사라져갈 것이다.

미국이 이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전도사인양 행세한다면 평화는커녕 정의의 전쟁 또한 어려운 상황이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지켜야한다. 정의의 전쟁이 바로 그 올바른 전쟁학의 가이드라인인 셈이다. 그래야만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는 평화를 꿈꿀 수 있다. 이 글을 마치며, 정의의 전쟁으로 가는 길목에서 감히 한번 평화를 그것도 약자의 평화를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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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인터뷰 특강 시리즈 4
진중권.정재승.정태인.하종강.아노아르 후세인.정희진.박노자.고미숙.서해성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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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오랜만에 반가운 책을 만났다. 진보논객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존심에 대해 입을 모았다.  그 안에는 늘상 들어온 진보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자존심.  [명사]남에게 굽히지 아니하고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진보적으로 사는 삶이 어려운 이유는, 일상적인 폭력이 만연해있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우리는 선택을 하며 살아야하는데 - 사실 선택이 주어지는 것 같지도 않으나 -그 순간 많은 타협들이 우리의 진보적 선택을 가로막는다.

이는 살아오면서 학습해온 타협의 편리성 때문이기도 하며  그 일들이 그렇게 자존심을 싸우며 대항해야할 만큼 싸울만해 보이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이래서 민주의 탈을 쓴 정부는 더 잔악하다. 뭔가 마땅치는 않는데 딱히 공격할 뭔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사람들의 일상 속에 침투하여 순간순간의 타협과 비굴을 강요한다.
 
여러 혁명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황이 비일상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많은 혁명인들의 성과를 비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일상성이라는 것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또 쉽게 합리화하게 만든다.

또 그런 거센 반발이 가능했던 이유는 반해야할 세력이 워낙 가시적으로 막강했기 때문이 아닐까.
 
책 안에 그런 구절이 있었다.
적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 돈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보다 더 일을 잘한단다. 자신이 그런 적은 돈에 양심을 속이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상황을 견디지 못해 아예 그 거짓말을 믿어버린다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그렇다. 순간순간 작은 강요와 폭력 앞에서 자신을 한두번 꺽고 난 사람들이, 작은 폭력에 자신이 굴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 아예 자신을 속이며 사는 것은 아닐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자본가는 교묘하게도 싸울 의지도 들지 않으면서도 굴하고  나면 자존심이 상해버리는 정도의 폭력만을 쓰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이다.

 권력가들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많은 기술을 터특해나가고 있다. 좋게 말해, 우리 국민들은 너무 순진하다. 라고 했지만.

사실은 우린 바보처럼 속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슬픈 건,
속이는 것도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속고 속이는 사이에 스스로 지쳐 자신을 내던지지 말자.

인생은 속고 속이는 잔혹한 사기극이 아니지 않은가.

균형있고 객관적인 판단으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몸부림칠 수 있는 "자존심"이 필요하다.

그 것이 바로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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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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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우리는 늘 중요한 부분만 빼먹는다. 우리의 일상에서 통용되는 정의는 “지켜야 할 바른 도리”로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바로 열에서 제외된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분명 중요한 것이 빠졌다. 이쯤되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는 한 만화 주인공의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가 무엇이길래 날 용서치 못하겠다는것인가? 과연 이 대단한 “정의”란 무엇인가? 아니,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너의 정의? 나의 정의!
여기 정의를 위해 모인 다섯 사람의 테러리스트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정의는 조금씩 다른 듯하다. 각자의 정의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스테빵의 정의는 혁명을 통한 결과 그 자체이다. 그로 인해 희생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감수해야만한다.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리고 정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리아예브의 정의는 다르다. 그의 정의는 그 실현 과정에 있다. 물론 혁명을 통한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스테빵과 같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또 너무 유치하다. 다만 서로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꿈꾸면서도 전혀 다른 과정을 생각한다. 과연 정의는, 하나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반복된 절망
어쨌든 결국 태공은 카리아예브의 손에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첨예한 갈등이 시작된다.
"태공은 폭탄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사상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중략... 우리는 사실로 돌아가서 태공의 머리를 날려 보낸 것이 자네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러니 자네는 용서를 받아야 해."
경시총감과 태공비는 카리의 정의를 위한 행위를,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살인으로 몰아간다. 이에 카리는 상당한 괴로움을 느낀다. 카리와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인민을 위한, 즉 휴머니즘의 목적을 테러리즘의 수단으로 가져가야 하는 모순을 숙명적으로 지닌다. 그들의 테러의 기준은 그것이 인민을 위한 행위일 때만 허락된다. 그러한 논리로 그들은 아이들은 죽일 수 없으나, 태공은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태공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태공은 더 이상 추악한 압제자가 아니다. 카리는 태공과의 개인 대 개인의 만남, 즉 인간으로서의 만남을 누구보다 괴로워한다.
즉, 이상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실존의 근본을 짓밟는 방향으로 놓일 때의 무참한 배신감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삶이 가진 부조리,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반복된 절망일지 모른다. 정의의 사람들은 압제를 반대하는 역압제, 폭력을 반대하는 반폭력적인 폭력을 사용이라는 반복된 싸이클 속에 존재한다.

사이클을 끊는 방법
니체는 가장 무서운 자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를 주변에서 쉽게 경험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재권력화만큼 무서운 것이 있던가.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날 자살을 감행한다. 카리아예브는도 결국 교수대에 오른다. 그는 죽음으로서 그의 정의를 완성한다.
남은 이야기는 많다. 하나만 까먹지 말자. 빠뜨린 것이 무엇인가? 정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이다. 인간이 빠진 정의는 공허한 이념에 불과하다. 반복된 정말의 사이클을 끊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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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시집 외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
장용학 지음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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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통한 문명 비판
-욕망의 장으로서의 글쓰기-



1. 서론
전쟁의 여파가 도사리고 있는 1950년대 한국사회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묘지이고, 진개장이었다. 사람들은 ‘전쟁’을 겪으면서 인간 최악의 처참함과 비참함을 경험하게 되었다. ‘전쟁’을 통해 인간의 존재는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한 것이 되어갔다. 이처럼 한국전쟁은 그 어느 전쟁보다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던 전쟁이었다. 민중들은 폭격을 피해 혈거 생활과 지하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전쟁 중 인간에게는 원초적 생존본능만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는 밥 먹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으며, 살기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해야만 했다. 그런 땅에서 문학이 발 디딜 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
장용학은 이러한 전쟁 상황에서 소설을 썼던 작가였다. 폭탄과 총알이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그는 문학이 설자리가 어디쯤인지 가늠해야 했다. 그는 전쟁과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문학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장용학을 한국 전후문학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이유이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인 장용학은 전통적인 소설 기법을 무시하고 한자어, 관념어를 도입하였을 뿐 아니라 지극히 난삽한 문체와 작중인물의 기괴함을 통해 당대의 뒤틀린 사회현실을 독특한 기법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부조리에 절망하고 존재의 허무를 혐오하며 그것을 초극하려는 고독에 절규하는 인간상을 플롯의 부정, 우화적 기법으로 작품화하였다. 이처럼 장용학의 소설은 관념적이며 철학적이다. 따라서 모든 철학적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시공간에 대한 논의는 장용학 소설을 이해하는데 아주 적절한 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고에서는 그 시공간의 틀을 이용하여 1950년대 한국이라는 극한 전쟁 상황 속에서 장용학이 과연 문학이 설 자리를 어디에 자리매김했는가를 전쟁 당시 쓰인 50년대 그의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2. 본론


2-1.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한국전쟁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와 더불어 남과 북의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빚어진 전쟁이다. 『요한 시집』은 한국전쟁의 원인이 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인간의 실존이 얼마나 무참히 짓밟고 있는가를 고발한 작품이다. 작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의 수기 몇몇 장면을 읽고 나서 그 잔혹한 실상에 울고 싶은 전율에서 창작욕이 솟아올랐음을 고백한다. 『요한 시집』은 이처럼 장용학이 실존주의 문학에서 배운 눈과 더불어 거제도의 전율에서 싹이 튼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은 엉뚱하게도 포로수용소의 이야기가 아닌 토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토끼는 처음에는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에서 불행을 모르고 지냈다. 그런 그에게 사춘기가 찾아온다. 언제부터인가 바깥세계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나의 개안이자 혁명으로 표현된다. 이내 토끼는 일곱 가지 빛 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안 세계와 아름다운 바깥세계를 구분해 인식하기 시작한다. 토끼는 드디어 자신의 생일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창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암흑에 쫓기며, 살이 터져 피투성이가 되어가며 그 창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바위 틈 사이로 목을 쑥 내밀며 최초의 일별을 바깥 세계로 내던진 순간, 토끼는 소경이 되어버렸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그의 후예들은 그가 죽은 자리에서 난 버섯을 <자유의 버섯>이라 부르며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토끼의 우화는 한국이라는 구체적 상황에 대입시켜볼 수 있다.

몇 세기 동안 자기의 전쟁을 가져 보지 못한 이 겨레였다. 근대적 의식이라고는 사벨과 지카다비밖에 모르던 이 땅이 ‘민주 보루’니 ‘두 개의 세계’니 ‘만국 평화 어필 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리얼리즘이 네이팜탄의 세례와 함께 쏟아져 들어왔을 때, 농부의 옷을 채 벗지 못했던 그 시골내기들은 살이 찢어지고 피를 줄줄 흘리면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와 같은 동호의 독백은 서양적 근대문명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유입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무방비 상태에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근대의 빛’은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들어와 한국사회의 눈을 멀게 하였다. 토끼는 이러한 한국사회의 비극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시대의 근대의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곧 근대화이며. 또한 서구화를 의미하였다. 거칠 것 없는 기세로 밀려들어온 서구화의 물결은 전통적인 시공간을 살해하며 근대적 시공간을 창출해내기 시작한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이 발전시킨 근대적 이성은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자만심을 키웠다. 이러한 자만심은 모든 자연현상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낳았으며, 그 생각은 시간까지도 수학적 사고를 통해 계산 가능한 것으로 변환시킨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자본의 발전과 함께 이제 노동행위는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가치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노동행위가 갖는 다양한 성질을 오직 시계바늘로 계산되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양으로 환원한다. 이처럼 시간을 동질적 단위로 분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은 선분화된다. 이제 근대적 시간은 모두에게 균질적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선언한다.
『비인탄생』에서 ‘아홉시병’은 그러한 균질적이며 공적인 시간과 불균질적이며 사적인 시간과의 갈등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아동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인 아홉시가 되면 배가 아픈 척을 한다. 그러나 ‘아홉시병’은 곧 주인공을 지배하여 주인이야 어찌 생각하든 언제고 그를 지배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근대적 시간은 곧 선분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시간의 선분성이 단지 시간을 동질적 단위로 분할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한 활동이나 동작을 선분화된 시간에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근대적 시간은 인간의 활동을 강제한다. 따라서 그에게 어떠한 사적인 시간이 흐르든 관계없이 그는 공적인 시간인 아홉시에 맞춰 학교를 가야한다. 이러한 강제는 폭력성을 수반하며 주인공에게 고통으로 다가온다. 결국 이러한 시간의 선분화는 공적인 영역을 넘어 사적인 영역에까지 침투한다. 주인공은 결국 ‘아홉시병’에 물들어 고통을 느끼지 않게 된 것이다. 현대인은 직선적 시간의 폭력성을 내면화한 그런 건강인인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아홉시병’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시간의 선분화는 직선을 지향하며 그 이외의 자연적 공간들을 살해한다. 그 자연이 살해되고 남은 시체의 진개장이 바로 도시인 것이다. 도시에서는 이러한 시간적 배치가 공간적 배치로 전환되어 이질적이고 불연속적인 공간들을 구획한다. 이와 같은 근대적 시공간의 개념이 성립된 것은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아침 조회 때, 천 명이나 되는 학생들의 가슴에 달려 있는 단추가 모두 다섯 개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현기증을 느꼈다. 무서운 사실이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주위는 모두 그런 무서운 사실 투성이었다.

『요한시집』에서 누혜는 유서를 통해 사람들의 활동과 행위를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근대적 시공간이 어떻게 인간을 억압하는지에 대해 폭로한다. 누혜는 ‘육십 초 지각은 지각이지만 오십초 지각은 지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며 직선적인 시간관의 모순을 느끼게 된다. 또한 그는 공간적으로 구획된 공간인 학교에서 벌을 통해 죄를 배우며 점점 공민사회의 한 분자가 되어간다. 그곳에서는 단추를 다섯 개씩으로 획일화시켜 인간의 다양한 무늬들을 절단시킨다. 결국 시간의 선분화는 공간까지도 구획시키므로서 직선 이외의 것, 즉 인간의 다양한 무늬를 거세시킨다.

2-2. 시간의 선분화가 낳은 문명의 이데올로기
그런데 이러한 시간의 선분화는 또 한편으로는 비가역적인 진보의 논리를 전제하며, 문명/야만이라는 이분법을 보여준다. 이는 지금의 시대는 그 전보다 우월한 문명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서양은 문명국가로서 동양과 같은 야만국가보다 우월하다는 이념적 조작은 근대에 이르러서 실질적 힘을 발휘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문명을 지탱하는 장치로서―한국 사회에서는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장치로서―이용된다. 결국 문명의 모순을 감춘 채 그를 유지하려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억압하고 짓밟는다. 위에서 살펴본 『요한시집』의 토끼 우화를 확장시켜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명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토끼의 우화는 문명의 발생과 이데올로기의 생산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고운 빛을 흘러들게 하는 저 바깥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라는 개안과도 같은 생각은 토끼의 마음을 밖으로 향하게 한다. 이 개안은 마치 동물적 삶을 뛰어넘어 더 나은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태고 인간의 모습과 같다. 결국 토끼는 자신이 추구한 것을 얻기 위해 밖으로 향하고 그 과정에서 처음으로 참담한 고통을 겪는다. 이것은 토끼의 생에 처음으로 겪는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억압의 시작은 문명의 발생과 연결된다. 인간은 동물적 삶을 뛰어넘어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공동생활을 시작한다. 공동생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은 억압되어야 했고, 그를 위한 최소한의 금기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문명 발생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토끼는 억압을 딛고 자신이 원하는 바깥 세계를 향해 한 발자국씩 내딛는다. 결국 그 세계로 나간 순간 토끼는 소경이 되어버린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억압’으로 시작된 문명의 최대의 적은 ‘욕망’하는 인간이다. 토끼가 소경이 된 것은 문명에 의해 아예 ‘욕망’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언제나 저항의 가능성을 지닌 인간의 욕망을 아예 거세시켜버리는 것이다.
토끼는 소경이 되어 자유를 박탈당한 채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의 후예들은 그가 죽은 자리에서 난 버섯을 오히려 ‘자유의 버섯’이라며 숭배한다. 그들은 그것이 없어지면 아주 이 세상이 꺼져 버리기나 할 것 같은 거짓 환상을 가진다. 이는 문명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이데올로기를 생산해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토끼의 좌절은 문명의 모순을 드러낸다. 문명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결국 인간의 욕망을 거세시켜 그를 좌절시킨다. 그러나 그 뒤에 생산된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문명의 현실을 왜곡하고, 문명의 우월성만을 강조함으로서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명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시킨다. 이처럼 문명은 자신에 대한 거짓 환상인 이데올로기를 생산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간다.
그런데 ‘문명’이라는 낱말은 “동물적 상태에 있었던 우리 조상의 삶과 우리의 삶을 구별해 주고, 인간을 자연에서 보호해 주고 인간의 상호 관계를 조정해 주는 두 가지 목적에 이바지하는 규제와 성취의 총량”을 가리킨다. 이처럼 분명 ‘문명’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부분이 존재한다. 그러나 ‘문명’은 분명 인간의 욕망의 억압을 전제로 세워진다. 또한 ‘문명’은 그 억압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통해 철저히 인간을 짓밟는다.

눈구멍에서 뽑혀 드리운 누혜의 눈알. 여기저기서 공기가 찢어진 눈알들이 내다보고 있는 벌판에 서서 그래도 외쳐야 하는 ‘자유 만세!’

여기저기 ‘인간’이 찢겨져 있는데도 외쳐야하는 자유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표현되는 자유는 자유 그 자체라기보다는 하나의 왜곡된 표상형식인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유’이다. 이는 문명을 지키기 위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인간에 반하는 일을 하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간의 억압이 가장 절정으로 드러난 때가 바로 한국 전쟁 상황이다. 그 곳에서는 구속의 반대이어야 할 ‘자유’마저 구속이 되어버린다.
문명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라는 하나의 장치에 결부시켜 종내는 모든 것을 말살시켜버린다. 『요한시집』에서 어느 순간 누혜는 자신이 ‘자유’에 얽매여 있음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추구했던 ‘자유’가 오히려 이데올로기화되어 다른 모든 가능성을 말살시키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결국 그는 그동안 ‘자유’에 가려져 자기 자신을 보지 못했음을 깨닫고, 자신을 보기 위해 ‘자살’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장용학은 누혜를 통해 이데올로기가 인간 내면에까지 침투해 그 외의 모든 가능성, 결국 인간의 생 전체를 말살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문명’의 장치인 ‘이데올로기’가 인간에 반하는 일을 일삼는 데도 계속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죄의식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명의 최대의 적은 ‘욕망’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욕망을 지닐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따라서 문명사회에서는 그 사회를 위협하는 욕망을 지닌 죄인일 수밖에 없다. 직선에서 벗어나는 자는 곧 죄인이다. 죄인인 인간은 문명을 비판할 자격을 상실한다.

그 무수의 가능성이 우연에 의하여 말살된 자리가 존재이다. 따라서 존재는 죄지은 존재이다. 생 속에서는 죄지었다는 것은 죄지을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범죄이다. 그 총목록이 세계이다. 세계는 범죄의 소산이고, 인생은 그 범죄자였다.

장용학은 문명세계에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인식한다. 인간은 모두 학교라는 죄의 집에서 벌을 통해 죄를 배운다. 내면화된 죄책감은 인간 자신이 지닌 욕망을 스스로 부인하게 만든다.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며, 모욕이다. 이러한 곳에서 진정한 인간은 찾는다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의 열매인 ‘문명’은 익을 대로 익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더 이상 감당해낼 수 없다. 죄책감의 증대는 문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잡한 관계로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문명은 죄책감을 개인이 참을 수 없는 수준까지 증대시킴으로써 인간이 스스로를 억압하도록 조종하여 자신을 지켜나간다.

2-3. 근대적 시공간 해체를 통한 원시로의 회귀
지금까지 살펴본 근대적 시공간 개념의 사상적, 이념적 바탕은 근대적 이성에 대한 맹신에서 비롯된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생각하는 자만이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단면적 시선을 보여준다. 시공의 얽매인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 일측면만을 보며, 그것이 곧 자신의 전면이라 착각하게 된다. 장용학이 볼 때, 그 일측면이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작가는 이 일측면에서 탈주를 꿈꾼다.
그가 그러한 탈주를 꿈꿀 수 있게 된 계기는 바로 전쟁이었다. 문명의 횡포가 극에 달아 나타난 것이 전쟁이다. 특히 한국 전쟁은 문명의 장치인 이데올로기로 인해 생겨난 전쟁이었다. 전쟁은 인간에게 원시적 본능만을 남긴다. 원시적 본능만이 남은 인간들은 전쟁 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비문명적 행동을 드러낸다.
『요한시집』에서 60일 동안이나 혼자 남겨진 노파는 쥐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한다. 노파는 문명인이 아닌 ‘욕망’을 가진 ‘인간’으로써 살기 위해 쥐를 먹은 것이다. 이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비난되어야할 것은 인간을 쇠고기를 먹는 셰퍼드만도 못한 존재로 만드는 전쟁의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호는 ‘인간의 체면을 이렇게까지 더럽힌 노파의 목을 꾹, 눌러서 나는 그 숨을 끊어 버리고 싶었다’고 말할 정도로 노파에게 분노와 고통스러운 환멸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의 분노와 환멸은 우리가 사로잡혀 있던 인간이 ‘문명적’이라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인간’은 애당초 문명적이지 않았다. 인간은 처음부터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억압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전쟁을 통해 작가는 문명사회가 문명적이라며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 즉 ‘인간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강제였을 뿐임을 깨닫는다.
장용학은 결국 문명사회에서는 무수의 율, 즉 개개인의 무수한 욕망이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무수의 율’이 빛나는 새로운 세계를 찾기 위한 시도를 시작한다. 장용학은『요한 시집』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동호라고 말한다. 누혜가 죽은 곳에서 그의 새로운 탄생은 시작된다. 그 탄생으로 인해 이제 동호는 ‘아침이면 해가 떠오른다’라는 하나의 율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나의 율에 대한 의문은 무수한 가능성을 암시한다. 『요한 시집』은 이처럼 하나의 율인 이데올로기가 부정되고 무수한 가능성을 가진 미래가 올 것을 암시하며 작품을 끝마친다. 『비인탄생』과 『역성서설』은 그러한 암시에서 더 나아가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시도한다. 그런데 결국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는 직선적 시간관의 해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벽이 벽인 것은 시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벽 안에서도 바깥 세계와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더 더딘 시간이었습니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용학이 보았을 때 벽이라는 공간적 구획은 결국 시간의 선분화에 의해 절단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선분화를 해체하는 것은 결국 공간의 구획화까지 해체시킨다. 이제 죄인으로써가 아닌 진정한 ‘인간’으로서 다시 서려면 근대적 시공간의 해체를 통해 문명사회에서 벗어나 원시시대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이 보인다. 과거 쪽으로 흘러가는 사건의 흐름이 보인다. 거기서는 밥이 쌀이 된다. 입에서 나온 밥이 숟가락에서 그릇으로 내려앉고, 그릇에서 솥으로, 그 솥이 끓어올랐다가 아주 식어진 다음 뚜껑을 열어 보면 물속에 가라앉은 쌀이다. 뚝배기에 옮겨서 헤엄치고 나오면 겨가 붙어서 가게에 있는 쌀처럼 된다. 싸전에서 정미소로 가서 껍질을 붙이고 밭으로 간다. 여럿이 모여서 벼이삭에 달린다. 이렇게 해서 몇 달이 지나면 그들은 땅 속 한 알의 씨가 된다…….
이렇게 보면 거기에도 하나의 생성(生成)은 있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世界)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역사(歷史)가 생겨진다.

결국 그는 불가역적인 직선적 시간을 가역적인 것으로 돌려놓음으로서 시간이 죽고 공간이 범람하는 유역, 비인의 왕국을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역성서설』에서는 결국 기계적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녹두대사를 파괴함으로써 그동안 직선에 의해 절단되었던 다양한 인간의 무늬들을 되돌려놓는다.
하지만 인간의 다양한 무늬를 되돌려놓고, 무수한 ‘욕망’을 가지고 누구나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그 출혈이 얼마나 클 것인가 대한 의문이 남는다. 또한 죄의식을 동반하는 이데올로기의 통제 없이 무수한 욕망이 범람하는 사회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원형의 전설』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을 해준다. 장용학이 볼 때는 인간이 주체가 되어 ‘욕망’을 돌려받는다고 해서 인간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설 안에서 계속 오택부의 ‘근친상간’은 개, 돼지만도 못한 짓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이장의 ‘근친상간’은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같은 금기인 ‘근친상간’을 어겼는데도 두 행동에 대한 작가의 시선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바로 오택부의 ‘근친상간’은 자신의 주체성을 뛰어넘어 타인의 주체성을 침범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는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타인의 주체성을 드러내주기 때문에 자신의 주체성을 초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인간이 ‘욕망’을 돌려받은 ‘주체’로서 돌아간다고 해도 이는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주체’는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선택한 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런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 되게끔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 아래 장용학은 직선적 시간관을 원형으로 바꿈으로서 근대적 시공간을 해체하고, 그를 통해 문명을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까지 부정한다. 궁극적으로 그는 문명을 부정하고 원시시대로 회귀함으로서 절단된 ‘인간’의 다양한 무늬들을 되살리고자한 것이다. 그동안 ‘인간’은 시공간에 얽매이며 이데올로기를 맹목적으로 따라다녔으나, 이제 ‘인간’은 자기가 자(尺)인 세계를 창조해낸다.

3. 결론
전쟁이 한창인 1950년대 내 집, 내 학교, 내 공장이 모두 폐허가 되어버린 그곳에서 바로 자신 앞에 쓰러져있는 어린 아이 한 명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문학'을 하던 장용학은 그 누구보다 문학의 무용성을 처절히 느꼈을 것이다. 그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그는 문학을 통해 현실의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시도를 보여줌으로써 문학의 활로를 되찾으려 하였다. 그러한 점이 바로 우리가 작가 장용학을 주목하게 만드는 점이다.
그러나 그는 문명의 부정적인 면만을 강조한 나머지 부조리를 직시하지 못하고 비약을 해버렸다.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부조리함은 두 가지 항의 비교에서 생겨난다. 만약 내가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면, 문제를 구성하는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슬그머니 회피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장용학은 문명의 부정적 측면만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을 회피하였다.
그럼에도 우리가 장용학을 전후문학에서 빼놓지 않고 논하는 이유는 절망적 전쟁 상황 속에서도 저항의 보루로서의 문학을 놓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문명은 분명 인간에게 많은 이로움을 제공한다. 인간은 이 문명 밖에서는 살 수 없을 것 같이 느끼면서도, 또 그 안에서는 질식할 것만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이러한 부조리 속에서 장용학이 ‘문명’에 대한 부정을 시도한 것은 문학가로서 그가 적어도 공범자는 되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전쟁이라는 비문명적 상태에서 그는 문명에 대한 회의를 느꼈고, 문명에 의한 억압에서 벗어나 ‘욕망’을 지닌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추구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문명의 억압에서 인간을 구원하려는 전선에 참가한다. 이처럼 그에게 문학은 현실에서는 풀어놓을 수 없는 ‘욕망’을 풀어놓을 수 있는 장이었다. 그것이 전쟁 상황에서 장용학이 찾은 문학의 자리였다.

1) 어느 날 점두에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의 수기를 그 몇몇 장면을 주어 읽게 되었다. 사람에게 바위를 떨어뜨려 으깨어 죽인다든지 눈알을 뽑고 코를 도리어 내고 사지를 뜯어내어 변소에 처넣었다든지 하는 장면은 빈혈증을 일으킬만한 것이었다. 그 울고 싶은 전율을 안고 보수산에 올라 와 저 앞바다 수평선 희미한 거제도의 도영을 바라보았을 때 내 마음에서 창작욕이 솟아올랐다. 저 섬에서는 얼마든지 큰 작품이 나올 수 있다.(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 實存과 요한 시집」, 국학자료원, 2002, 84-85쪽.)

2) 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 「 實存과 요한 시집」, 국학자료원, 2002, 85쪽.

3)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25쪽.

4) 정선태,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번역된 근대 또는 도둑맞은 문명독립국의 꿈」, 소명출판, 2006, 79쪽

5) 18세기 말이 되면서 자본가들은 삶의 방식 자체의 변환을 직접적으로 요구하게 된다. 이는 자본의 발전과 함께 임노동자의 고용이 확대되는 한편, 노동인구는 점차 과잉되어갔다는 역사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은데, 사실 고용이 일반화되면서 시간은 애덤 스미스 말대로 ‘기회비용’이요 가치임이 분명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임금이란 일정한 시간 동안 일을 시킬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이라면, 그것을 조금의 낭비도 없이 최대한 가동하는 것이 관견인 것이다. 이젠 노동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가치로서 정의된다. 그것은 노동행위가 갖는 다양한 성질을 오직 시계바늘로 계산되는 추상적이고 동질적인 양으로 환원한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0쪽)

6 )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21쪽

7) 공간의 ‘구획화’는 협업과 분업과 관계가 깊다. “분업은 이전에 시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공간적으로 배열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시간적 배치를 공간적 배치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34쪽)

8)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63쪽

9)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1쪽

10) 지나가는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며, 그만큼 낭비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시간은 금”이라는 생각은 시간의 일방성(비가역성)과 긴밀히 관련된 것이다. 즉 자본가에게는 과학자들과 달리 음의 부호가 붙은 시간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것은 단지 ‘지나간 것’일 뿐이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0쪽)

11)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문명/야만(미개), 서양/비서양, 식민국/피식민국, 이성/광기 등으로 현상하는 이항대립구도에서 전자는 후자를 배제하거나 ‘감금’함으로써 차별화한다. …중략…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절대적인 경계선은 오랜 시일에 걸쳐서 형성된 것이긴 하나, 이러한 이념적 조작이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정선태.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2003, 103쪽)

12) 문명은 어느 정도의 본능 단념을 토대로 세워지며, 또 거기에는 대단히 많은 (억압, 억제, 또는 그 밖의 수단에 의한) 본능 불충족이 전제된다는 점이다.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83쪽.)


13) 인류의 공동생활은 다수가 모여 어떤 개인보다 강한 집단을 이루고 모든 개인에 대항하여 결속을 유지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처럼 개인의 힘이 공동체의 힘으로 대치되면, 문명은 결정적인 걸음을 내딛게 된다. 문명의 본질은, 개인적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제한한다는 사실에 있다.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80-281쪽.)


14)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그의 후계자들의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정신분석이론과 그 밖의 이론은 욕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라캉주의자들은 특정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되는 욕구(need)와 타자에게 대응하여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망은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양兩개념을 수반할지라도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욕망은 오히려 세계 속에서 만족스러운 대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거세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탐구-를 지배하는 환상적 구축물을 향해 있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146쪽.)

15) 1 비평의 현행 용법에서 이데올로기는 적어도 네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네 가지 의미는 관념의 그 사회적 맥락과의 관계를 정의하려는 다양한 정치적 철학적 시도의 결과로 발전되었다. 첫째, 이데올로기는 사회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하려는 잘못된 표상 형식이다. 둘째, 이데올로기는 법률, 철학, 윤리, 예술 등과 같은 사회의식의 모든 형태들의 결합이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처럼 단순히 어떤 사회계급 혹은 경제계급이 갖고 있다고 생각되는 정치적 관념들이다. 끝으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상은 이 세 가지 모든 정의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이데올로기의 이론을 구성했다. 이데올로기란 모든 개인들의 삶의 가능성을 규정하는 표상 체계 혹은 이야기 체계라는 이론이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234쪽.) 장용학의 소설 속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개념은 사회현실을 왜곡하고, 현실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적 모순을 상징적으로 해소하려는 잘못된 표상 형식이라는 첫 번째 의미의 성향이 강하다.

16)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273쪽.

17)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21쪽.

18) 그들은 뭐든지 어떤 한 가지를 모든 것에 결부시켜서 종내는 그것을 말살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14쪽.)

19)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과 그의 후계자들의 영향 아래 현대의 많은 정신분석이론과 그 밖의 이론은 욕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라캉주의자들은 특정 대상을 획득함으로써 충족되는 욕구(need)와 타자에게 대응하여 상호작용을 추구하는 요구(demand)를 구별한다. 욕망은 이러한 비교적 단순한 양(兩)개념을 수반할지라도 그 어느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욕망은 오히려 세계 속에서 만족스러운 대상을 향한 끝없는 탐구-거세 콤플렉스로부터 시작되는 탐구-를 지배하는 환상적 구축물을 향해 있다. (조셉 칠더즈 외, 황종연 역, 현대 문학·문화 비평 용어사전, 문학 동네, 1999, 146쪽.)

20)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7쪽.

21)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 영원히 익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30쪽.)

22)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15 - 문명속의 불만』, 「문명속의 불만」, 열린 책들, 1997, 326쪽.

23) 시공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동시에 두 지점에 설 수 없다는 것이고, 바꾸어 말하면 우리의 눈에 비쳐 든 것은 그 대상의 일측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한 지점에만 서 있게 되면 우리는 그 일측면만을 보고 사는 것이고, 영원히 일측면만 보고 살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전면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원형의 전설」, 동아출판사, 1995, 213쪽.)

24)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원형의 전설」, 동아출판사, 1995, 206쪽.

25)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요한 시집」, 동아출판사, 1995, 307쪽.

26) 비인(非人)의 왕국! 시간이 죽고 공간이 범람하는 유역, 공간적 거리만이 거기에 있을 뿐 시간적 전후가 없는 땅! 결정(結晶)이 있을 뿐 부패가 없는 안뜰. 존재가 곧 본질이요, 내가 내인 오직 동일률(同一律)만인 계절이 거기에 온다! (장용학, 『한국소설문학대계29』, 「비인 탄생」, 동아출판사, 1995, 399쪽)


27) 이제 시간은 노동과 관련된 행위의 일반적 척도가 된다. 이러한 척도는 선택 가능한 행위의 외연을 규정하며, 그것을 벗어났을 때 가해지는 벌금이나 처벌 등은 일반적 척도로서 시계적 시간이 단지 측정하는 기준일 뿐만 아니라 신체적인 강제를 수반하여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주변장치다. 그것은 시계적 시간이 사람들의 활동을 특정한 방식으로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푸른숲, 1997, 113쪽.)

28)1 실존주의의 적극적인 성격은 그 주체성의 존중 나아가서 인간의 주체성을 회복하여 인간의 위엄을 재건하려는 그 의욕에 있는 것이다. 실존의 주체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즉 선택의 주체성과 책임의 주체성이다. 나의 존재는 내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행동은 자기 스스로 선택하여서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행동 존재방식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아무렇게나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를 선택한 때 나는 다른 모든 사람도 그런 경우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 되게끔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은 전 인류를 대신해서 선택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행동에 대하여 그는 자기 자신과 함께 전 인류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것이 된다. 여기에 실존주의가 지니고 있는 깊은 윤리성 있는 것이라고 위에서 본 바……장용학, 『장용학문학전집6』,「주체성의 회부」, 국학자료원, 2002, p.149

29) 알베르 카뮈, 김혜숙 역, 『시지프스의 신화』, 청하출판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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