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 2004년 제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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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개인 그리고 몸

- 김훈의 「화장」

Ⅰ. 서론

이제 막 21세기로 들어서려는 길목에서 ‘3인칭 공포증’이라는 희귀한 신경증을 지닌 작가가 홀연히 한국 문단에 등장하였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라는 찬사와 함께 ‘개별화의 마성은 공허하다’라는 비판까지, 그는 등단하자마자 각별한 문단의 관심 속에서 고속행진을 이어왔다. 그의 소설은 이제 한국문학의 중요한 화두로 자리매김했다. ‘김훈’이라는 외자 이름을 가진 이 작가는 그의 이름처럼 언제나 홀로 지내는 충만함을 즐기는 50대 남성이었다. 이 ‘홀로’라는 키워드는 때로는 ‘개인’1)으로, 또 때로는 ‘개별자’로 변주되며 김훈의 소설의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 잡는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주인공 대부분은 1인칭 화자이다. 1인칭은 ‘나’라는 구체성을 지닌 개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도 ‘너’도 아닌 ‘그’로써 표현되는 3인칭은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실체 없는 그 ‘누군가’이다. 3인칭은 누구나 언제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는 보편자를 의미한다. ‘3인칭 공포증’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지향점은 보편자가 아닌 개별자를 향해 있다. 이 개별자의 숨은 욕망과 동기들이 가시화되어 나타나는 영역이 바로 ‘몸’이다. 김훈의 「화장」은 끊임없이 이 개별자의 몸을 추적해나간다. 우리는 그의 추적을 따라가 보며 과연 보편으로 포섭되지 않는 개별자가 '몸'으로서 구현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본론

1. 이미지로서의 육체 - 상품화되고 대상화된 육체

『화장』은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이 됨과 동시에 시작된다. 심전도 계기판의 눈금이 0이 되었다는 것은 곧 아내의 생명이 0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죽음을 가리킨다. 놀라운 것은 인간의 죽음이 간단명료하게 수치화된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수치화는 모든 죽음을 획일화시킨다. 현대사회에서 죽음이 지니는 이러한 사소성은 곧 익명화되고 획일화된 삶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 안에서는 개별성의 증거였던 육체마저도 이미지라는 보편성으로 너무나 쉽게 환원되고 만다.

연구개발실장은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면서 아마도 질 내부의 산성 정도를 서너 계통으로 분류해서 거기에 맞는 제품들을 별도로 생산해야 할 것 같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사장은 생산비가 두 배 이상 들어가고, 선전에서 추가비용이 발생하며 유통과정 관리가 힘들어진다는 이유로 연구개발 실장의 대안을 승인하지 않았다. 2)

주인공이 다니는 화장품회사에서는 의약부외품인 질 세척제와 질 방향제 개발사업에 연구비 오십억을 투입하면서 연구개발해 왔다. 그러나 질 세척제의 인체 적용실험에서는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게 된다. 여성의 질 내부온도와 분비물의 산성농도에 따라 수많은 편차를 드러내고 이에 발생하는 생화학적 과정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각각의 개별자인 여성의 질을 고려하여 그 개별자의 특성에 맞는 질 세척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장은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 개별자의 특성을 고려해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이윤을 남길 수 없는 비합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안으로 서너 계통으로 분류하여 수많은 질들의 개별성을 극복하려고 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다. 개별성이 모두 하나의 동일성으로 환원되어야만 효율성이 높아지고 그 안에서 가치가 생긴다. 그리고 이렇게 개별성의 억압 위에 세워진 동일성은 광고와 언론 등을 통해 보편적인 이미지로 보급된다.

두 과장들은 또 이미지에 따른 로케이션과 양상 구성의 내용, 손톱, 입술, 눈동자, 허벅지, 장딴지, 눈썹 같은 부분모델을 기용하는 문제와 그 모델들의 신체 특징을 열거해나갔다. 박진수가 들고 온 가방 속에는 모델들의 신체부위를 찍은 천연색 사진이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정철수는 지난 일 년 동안 TV드라마, 영화, 가요, 패션, 무용에 나타난 여성성의 이미지들을 수집하고 분석한 자료를 꺼내 보였다. 3)

이런 식으로 사회는 보편적인 육체의 이미지를 보급해 도저히 포섭할 수 없는 인간의 개별성을 동일성으로 환원시켜버린다. 동일성으로 환원된 개개인의 육체는 이제 상품으로서 가치를 갖게 된다. 이제 인간의 몸은 주체로서가 아니라 소비되어야하는 대상으로서 취급된다. 이처럼 대상화되고 보편적 이미지로 규정된 육체는 실체 없는 헛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힘을 발휘한다. 광고 문구를 정하는 과장들의 말들은 무엇보다도 스모키한 헛것들이었으나, 실제로 광고를 만듦으로써 이미지를 배포하고 상품을 소비하게 만드는 실질적인 힘을 지닌다. 그러나 이 헛것들은 개별자에게 있어서는 있으나마나 한 것들이다. ‘모든 생명현상은 죽음을 향한다.’는 의사의 뻔한 말― 즉, 보편적 진리 ―은 아내의 개별적 생명현상에 있어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화장』에서의 화장은 죽은 사람을 불에 살라 장사 지내는 화장(火葬)인 동시에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을 가리키는 동음이의어다. 화장(火葬)은 삶을 살아가면서 육체에 덧씌워져 있던 누추함을 가린 것을 벗겨내고 그 본질을 보여주는 반면에 화장(化粧)은 삶을 살아가면서 온갖 누추함을 가리고, 미화시켜 덧칠한다. 즉 이는 벗겨냄으로써 누추함마저 보여주는 실체로서의 육체를 보여주는 것이고, 덧칠함으로써 누추함을 감추는 이미지로서의 육체를 나타낸다.  이미지로서의 육체는 바로 이 헛것들로 덧칠된 상품화되고 대상화된 육체이다. 김훈은 이 헛것들을 모두 걷어냄으로써 인간을 대상의 자리에서 다시 주체의 자리로 회귀시키려한다.

 2. 실체로서의 육체 - 치욕으로서의 삶

삶에서 소외된 개별자를 삶 한가운데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해 작가는 화장(化粧)을 벗겨낸 육체를 향해 파고든다. 타락한 세계와 대립하는 순결한 개별자의 몸은 인간을 구원해줄 약속의 땅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헛것을 드러낸 실체로서의 육체에서 발견되는 것은 악취와 구린내뿐이다.

아내가 가장 견딜 수 없어했던 냄새는 김이 나는 더운 쌀밥의 냄새였다. 냄새는 혐오할수록 더욱 날카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옆 침대 환자가 김나는 밥을 먹을 때도 고개를 돌리고 구토를 일으켰다. “더운밥이 구린내가 더 심해요. 냄새가 김으로 퍼지거든요.”라며 아내는 간병인을 들볶았다. 아내가 야채즙이나 크림수프를 먹을때도 간병인은 코를 막아주었고 아내가 삼키고 나면 입안을 물로 헹구어냈다. 4)

뇌종양에 걸린 아내는 밥에서 구린내만을 느낀다. 그 구린내를 맡고 구토를 일으키지만 이 밥을 먹지 않으면 아내는 육체를, 그 몸 토대로 해야 비로소 가능한 삶을 유치할 수 없다.  그러나 육체를 유지하는 것은 아내에게 있어서 고통의 연장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세계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를 획득할 줄 알았던 개별자는, 또 다시 그 개별자는 물적토대인 육체에 의해 다시 얽매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에 빠진 것이다. 여기서 개별자는 무력감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간호사가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내렸다. 간호사는 고무장갑 낀 손으로 애무를 해주듯 손을 움직여 내 성기를 키웠다. 고무장갑 낀 간호사의 손 안에서 내 성기는 부풀었다. 성기는 내 몸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낯설었지만, 내 몸이 아닌 내 성기가 나는 참담하게도 수치스러웠다.5)

동일성으로 환원된 개별자를 구원하기 위해 실체로서의 육체를 파헤쳤지만, 그 실체로서의 육체는 개별자 스스로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 나는 오줌을 싸고 싶은데 몸은 오줌을 배출해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성기는 내 몸의 일부이지만, 내 몸처럼 느껴지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몸에서 나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적토대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개별자로 돌아왔지만 계속해서 물적토대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개인은 여기서 무력감을 느낀다.

자정께 아내는 다시 두통 발작을 일으켰고, 진통제와 수면제 주사를 맞고 잠들었습니다. 아내가 깊이 잠들어서, 아내의 의식이나 수치심이 더 이상 작동되지 않는 시간에 저는 안도했습니다.6)

자신의 몸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아내는 샤워 도중에 똥물을 흘린다. 그런데 아내가 여기서 느끼는 감정은 무력감이 아닌 수치심이다. 이 수치심은 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시간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수치심을 일으키는 것은 개별자의 의식 속에 각인된 보편적 이미지로서의 신체이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물적토대와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미지로서의 신체간의 간극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는 결핍으로 인식된다. 그리고 나는 이 결핍을 채울수 있는 것을 생명력으로 본다. 그 생명력이 바로 추은주라는 이상화된 육체이다.




3. 이상적 육체 - 원시적 생명력 갈구

이미지로서의 육체로 상품화된 육체와 실체로서의 육체로 소멸화 되어가는 육체의 추악함 사이에서 결핍된 채 괴로워하는 나는 이상적인 육체를 꿈꾼다. 그 이상적인 육체를 지닌 자가 바로 추은주이다. 그 여자의 몸을 쫒는 나의 시선은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이상적인 육체를 쫒는 것이다.

 

추은주는 함께 온 여직원들과 나란히 서서 아내의 영정을 향해 두 번 절했다. 나는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바닥에 엎드린 추은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추은주는 블루진 바지에, 양말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추은주의 머리가 바닥에 닿을 때 머리타래가 흘러내렸고 맨발의 뒤꿈치가 도드라졌다. 뒤꿈치의 각질과 엄지발가락 밑의 둥근 살도 보였다. 엎드린 추은주의 등과 엉덩이는 완연한 몸이었다. 세상속으로 밀치고 나오는 듯한 몸이었다. 그리고 그 몸은 스스로 자족해 보였다.

추은주의 몸은 살아있는 완연한 몸이다. 육체 자체가 살아있음을, 왕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추은주는 치욕적인 삶으로 죽음에 치닫고 있는 아내의 모습과 대조된다. 아내는 치욕적인 삶에 끊임없이 수치심을 느끼지만, 추은주는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스스로 자족하는 존재다. 그녀에게 살아있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스스로 자족하는 삶이다. 그런 그녀의 육체를 나는 계속해서 쫒고 있다. 오줌이 빠지지 않는 나의 몸은 무거웠고, 몸 전체가 설명되지 않는 결핍이었다. 그 결핍 속에서 그녀가 가진 생명력을 욕망한다. 그리고 끊임없는 갈구는 삼인칭의 언어로 확장된다.

 제가 당신을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당신의 이름 속으로 사라지고 저의 부름이 당신의 이름에 닿지 못해서 당신은 마침내 3인칭이었고, 저의 부름과 이름 사이의 아득한 거리를 건너갈 수 없었는데, 저의 부름이 닿지 못하는 자리에서 당신의 몸은 햇빛처럼 완연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몸으로 당신을 떠올릴 때 저의 마음속을 흘러가는 이 경어체의 말들은 말이 아니라, 말로 환생하기를 갈구하는 기갈이나 허기일 것입니다. 아니면 눈보라나 저녁놀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는 말의 환영일 테지요.7) 
 

나는 소멸 되어가고 있는 나의 몸을 왕성한 생명력으로 이끌어주기를 끊임없이 바라지만 실제로는 그의 부름은 그녀에게 닿지 못한다. 추은주는 늘 나에게 3인칭으로 다가온다. 이상적 육체와 직접 맞닿음으로써 생명력을 얻으려고 하는 나의 욕망은 여기에서 좌절된다. 그녀는 여기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는 3인칭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욕망은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고, 그 언어조차 사회적인 억압에 의해 밖으로 표출되지 못한다.

Ⅲ. 결론

「화장」을 통해 드러난 김훈의 문학관은 ‘소설이란 곧 인간이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인간이 개별적으로 살아있다는 것, 즉 이 찰나에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삶의 질감을 재생하고자 함이다. 「화장」은 그러한 삶의 질감을 재생해내는 공간을 역사적 공간에서 현대적 공간으로 옮겨오는 시점에 쓰인 소설이다. 언뜻 보기에 현대인은 이순신보다는 더 자유롭고, 사인화(私人化)된 공간을 향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김훈은 여전히 국가공동체, 혹은 권력의 중력이 개별자의 의지와 욕망에 삼투하며 억압8)하고 있음을 폭로한다. 우리는 그 폭로의 과정을 육체라는 통로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그가 유난히 집착을 보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몸(육체)’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건 결국 그 무엇이든 이 몸이라는 ‘물적 토대’에 의해서만 실현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몸의 감각은 개별자가 세계와 소통하는 통로이다. 세계는 언제나 개별자에게 욕망을 미디어, 책, 관념, 상징, 추상, 언어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보편타당하다고 인정된 매개체들을 통해서만 표현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그런 것들로는 개별자의 욕망을 완전히 배출해낼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타자와의 완전한 소통 또한 가능할리 없다. 사회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 개별자의 몸은 사물과 다를 바 없이 취급되고 대상화된다. 개별자는 무력함을 느낀다. 그러나 김훈은 포기하지 않고 개별자의 몸을 끊임없이 파헤친다. 개별성이 가려진 이미지로서의 육체도, 그것을 벗겨낸 실체로서의 육체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치욕의 삶 속에서 인간을 구원해줄 것만 같은 이상으로서의 육체도 모두 개별자의 결핍을 채워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 결핍은 아이러니하게도 개별자가 끊임없이 세계를 향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개별자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세계와 대면하고자 한다. 그의 싸움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결국 삶이란 그 패배의 치욕을 견뎌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결국 「화장」은 외적 패배를 받아 드리고 ― 살아남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더렵혀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 그 안에서 끊임없이 내적 승리를 ― 결국은 포섭될 수 없는 고유한 개별성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내는 일 ―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에 대한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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