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배반의 수사학, 들춰내며 가리기

-김훈 소설이 아직 가지 않은 길

1 화두의 전환, 역사 속의 개인 들춰내기 

 

  끝이 나지 않을 이야기를 시작하려한다. 답답함이 밀려온다. 「남한산성」은 꽉 막힌 성의 답답함 그 자체였다. 한동안 나는 그 답답함을 긴장이라 부르는 자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왜 진리가 주는 안도감에 기대서는 안 되는가. 모두가 말해줬지만,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뉘앙스로만 답하였다. 물음이 차올랐다. 그것이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나는 더 진리에 안주하련다. 아니다, 그것은 또 너무나 반시대적이다. 반시대적인 것은 또 지나치게 그의 시대를 닮아있다. 제 3의 길을 찾아야겠다. 시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 할 만큼.

 

  김훈의 시대는 그를 얼마만큼 알아보는가. 「칼의 노래」에서 그는 반시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박하지 않았다. 그는 이순신 동상의 폭파를 부르짖는 미치광이 지식인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저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묘사했을 뿐이었다. 묘사를 통해 드러나는 삶은 개별적이었다. 이순신 그의 삶도 그러했다. 우리는 동상에 가려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항상 먹먹했다. 전환점은 ‘이순신 동상이 실제 이순신인가, 아닌가?’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던진 화두는 ‘동상에 가려진 진실은 과연 무엇인가’였다. 김훈은 폭탄 없이 집요한 묘사만으로 이순신 동상을 허물었다. 언어의 힘이었다.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의 출현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라는 찬사와 함께 ‘개별화의 마성은 공허하다’라는 비판까지, 김훈은 등단하자마자 각별한 문단의 관심 속에서 고속행진을 이어왔다. 그는 한결같이 ‘3인칭 공포증’이라는 희귀한 신경증을 내세우며 세상과 독대하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그려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소설 주인공 대부분은 1인칭 화자이다. 1인칭은 ‘나’라는 구체성을 지닌 개별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나’도 ‘너’도 아닌 ‘그’로써 표현되는 3인칭은 지금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어딘가에 존재하는 실체 없는 그 ‘누군가’이다. 3인칭은 누구나 언제든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갈 수 있는 보편자를 의미한다. ‘3인칭 공포증’이라는 그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지향점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보편자보다는 치욕적인 삶에 대해 무력하게나마 응대하는 개별자를 향해 있다.

 


2 백전백패, 몽당연필을 든 무사의 싸움

 

  그런 그가 3인칭 소설을 들고 우리 앞에 섰다. 언어의 힘으로 영웅 이순신을 무너뜨린 그가 이제 언어의 힘으로 언어의 허무를 말한다. 「남한산성」은 허무 그 자체였다. 그 허무는 압도적 대상을 상대해야하는 약자의 무력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성 안에는 말들이 들끓는다. 그러나 그 말들은 대부분 ‘마찬가지로’ 끝을 맺는다. 그 ‘하나마나한’ 말들 사이에서 묘당은 출렁였으나 나아갈 길을 더듬어낼 수는 없었다. 언어는 극한 상황에서 가장 나약한 자들이 사용하는 무기이다. 그들은 싸움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질 것을 이미 알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지난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안의 싸움이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살고자 했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그 안에서 울면서 곡하기와 웃으며 곡하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허무 안에서도 삶은 계속됐다. 인간의 삶은 사소하고 소소했다. 그러나 그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아니했다. 그 안에서 말은 가장 가벼웠다.


언니의 말은 누구에게도 전달되지 않는 언니 혼자만 알아들을 수 있고 언니 혼자에게만 유효한 말이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은 말이었다. 나는 언니의 말에 뭐라고 개입할 수가 없었다. (「언니의 폐경기」)


  폐경기의 언니는 가끔씩 뜨거운 피를 쏟는 대신 의미 없는 말로 자신을 채웠다. 그것은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만 유효한 말이었다. 누가 언어를 소통의 수단이라고 했는가. 이 순간 언어는 자족적이며 자기지시적이다. 대부분의 언어는 타인을 향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다만 몸짓일 뿐이다.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상헌과 명길의 싸움 각자 자신의 싸움이었다.  


  상헌과 명길의 싸움은 곧 김훈 자신의 싸움이다. 갇힌 성 안에서 ‘의義’를 외치는 언어는 결코 ‘이利’를 이길 수 없다. 명길이 말처럼, 상헌이 말하는 근본은 태평한 세월의 것이었다. 소설도 마찬가지였다. 소설은 삶의 잉여에나 적합한 양식이었다. 소설은 결코 삶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은 못 되었다. 상헌의 말은 나무랄 데 없는 당연한 말이었고, 명길의 말은 필요한 말이었다. 필요 앞에서 당연함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었다. 김훈 안에서 명길의 말이 쩌렁쩌렁 울릴 것이다. 네가 하는 소설은 배부른 자의 여유일 뿐이라고. 네 손에 쥐어 쥔 몽당연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준엄하게 꾸짖는 명길의 모습에 그는 할 말을 잃을 것이다. 뼈아픈 한마디가 떠오른다. 소설이란 무엇인가. 전장에 쓰러져 있는 작은 아이 한 명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소설이란 단지 배부른 자들의 여유이며, 투정인가. 

  언어로 쌓은 성, 소설의 무력함을 증명하듯 남한산성 안에서 말들은 끊임없이 부딪히고 뒤엉키며 솟구쳐 오르다가 가라앉았다. 그들의 말은 부딪쳐서 흩어졌다. 애초에 합쳐질 수 없는 말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성 안의 말은 그 무엇을 위한 말이 아닌 그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말이었다. 임금은 넌지시 말한다.

아니다, 그냥 둬라. 저들은 저래야 저들일 것이니…… (「남한산성」) 

  

  애초에 무엇을 향하지 않았기에 말들은 그저 맴돈다. 허무는 여기서 비롯된다. 말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애초에 자족하기 위해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으면 그저 허무한 것이 아니라 아예 무가 되고 말아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말을 했다. 말들은 끊임없이 맴돈다. 적 앞에서, 현실 앞에서 무너진 언어가 쌓이고 쌓여 무기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말들의 끝에는 최명길을 베어야 한다는 부르짖음이 후렴으로 매달려 있었다. (「남한산성」)

  임금은 이 맹목적 증오와 폭력성 앞에서 고개를 가로 젓는다. 명길을 죽여 성을 지키자는 그 들의 복받친 울음이 임금은 괴이하다.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확인하고 지키려고 하는 나약한 자들의 마지막 안간힘이 임금은 눈물겹다. <칼의 노래>에서 이순신의 언어가 적의 언저리라도 짚었다면, <남한산성>의 언어는 애초에 적을 향하지도 못한다. 두려움에 그들은 이내 자기 안에 새로운 적을 만들어낸다. 명길을 베어야한다는 부르짖음은 세계를 명확히 짚어내지 못하는 언어의 무력함을 폭로하고, 그것이 쌓여 폭발 직전인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가시화한다.



3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렵혀진다는 것

  임금은 무력함 속에서 울었다. 사관은 울지 않았다. 사관은 붓은 그 눈물을 삼켜야 하는 붓이었다. 그러나 김훈은 붓은 그 눈물을 끊임없이 들추어낸다. 그의 붓이 추적해나가는 개개인은 먹고 배설하며 살아간다. 그들의 삶은 흙냄새가 나고, 피가 나며, 다 찢겨진 상처투성이다. 그 안에서 삶은 이순신의 삶처럼 개별적이었으며, 보편적이었다. 그의 지향점은 여전하다.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된 역사는 거짓이다. 인간의 삶이란 지극히 공포스러운 것이며 그로써 비롯되는 치욕을 담아내는 것이다. 명길을 베어야한다는 부르짖음은 결국 그 치욕을 두려워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몸부림이다. 김훈이 볼 때 그 치욕을 수용하는 것만이  생의 엄숙함을 지키는 일이다. 남한산성은 결국 그 치욕의 길을 향해 내딛는다.

칸이 여러 가지를 묻더구나. 나는 살고자 한다. 그것이 나의 뜻이다. (「남한산성」)

  김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주전이냐, 주화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흩뿌려진 피를 덮는 눈처럼 지속되는 삶에 대한 긍정이다.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서 위로할 수 있는 것이다. 땅 위로 뻗은 삶의 길은 이미 나 있었으므로 갇힌 성 안에서는 치욕과 자존이 다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들끓는 언어는 무력감과 허무감만을 더해갈 뿐이다. 


  결국 그는 언어의 허무에 대한 물음에 그 허무로 이루어진 소설을 씀으로써 답한다. 비록 소설 그 자체가 허무일지라도 그는 끊임없이 소설로서 답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애써 그 허무를 지우려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끊임없이 허무를 창조할 것이다. 그는 허무를 지우기 위해 허무를 창조할 것이다. 묘사하기는 그에 적당한 글쓰기이다. 그 안에서 상헌도 명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역설을 버티는 것이 그의 몫이다. 


  그러나 서날쇠 앞에서 그들은 수치감을 느낀다. 대나무 바늘을 만드는 일이나 똥국물을 만드는 일은 하찮고 소소한 일이나, 그 무게감은 한없이 그들을 짓눌렀다.

김상헌은 서날쇠에게서 일과 사물이 깃든 살아 있는 몸을 보는 듯했다. 글은 멀고, 몸은 가깝구나……. 몸이 성안에 갇혀 있으니 글로써 성문을 열고 나가야 할진대, 창검이 어찌 글과 다르며, 몸이 어찌 창검과 다르겠느냐……. (「남한산성」)

  그들을 가장 부끄럽게 하는 자는, 생에 가장 가까이 있는 서날쇠이다. 그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 삶에 필요한 것들을 생성할 수 있는 연장을 쥔 자이다. 정치가에게 제일 무서운 자는 생활인이다. 이명박의 적은 다른 대선후보자들이 아니다. ‘대’운하는 다른 대선후보자에게는 반박해야할 의미가 있는 담론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 촌동네 사거리쯤 위치하는 구시장에서 나물과 상추를 파는 그이에게는 가닿을 때 그것은 그야말로 헛것이다. 소설가도 마찬가지이다. 소설을 헛것이라 떠드는 자의 담론은 소설을 위기에 빠뜨리지 못한다. 그러나 생활인은 다르다. 아름다운 소설은 그의 배설 앞에서 쩔쩔맬 것이고, 알만한 소설도 그의 삶의 지혜 앞에서 무너질 것이다. 그들은 소설 없이도 충분히 살아 숨 쉴 것이다. 그들이 몰아쉬는 숨결만으로도 소설가는 무너진다. 


  그러나 청의 말발굽 소리와 함께 사라진 서날쇠의 삶을 추적해낸 것도 소설이다. 그러기에 그는 펜을 놓지 않는다. 삶은 언제나 치욕이며, 허무이다. 그 안에서 그 치욕을 견디기보다 즐기며 허무를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김훈의 추구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는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렵혀지는 인간을 끊임없이 긍정할 것이다.


 

4 그러나, 김훈의 문체가 가리는 것들 - 불 지르는 자, 그 누구인가.

 

- 화친을 배격하고 오로지 대의를 곧게 하니 적들이 깊이 들어온 것 아니냐? 오늘의 일이 대의에 비추어 어떠하냐?

- 지금은 대의가 아니옵고 방편에 따라야 할 때입니다. 불붙은 집안에는 대의와 방편이 다르지 않습니다. (「남한산성」)

  김훈의 수려한 문체는 분명 그의 소설에서 큰 역할을 해내고 있음이 분명하나, 그 문체는 때때로 독자의 눈을 가리기도 한다. 「남한산성」에서 그는 명길과 상헌의 담론에 부정적인 시선을 보이며 서날쇠의 손을 들어준다. 하지만 어느 인터뷰에서도 밝혔듯이 작가가 은근히 명길의 손을 들어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서날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명길이 아니라 항상 상헌이었다. 상헌이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독백하는 마지막 장면은 결국 그도 명길의 담론에 흡입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결국 그도 삶을 살아내야 하는 한 인간임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주전파와 주화파의 주장이 한 덩어리로 엉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도 쉬이 수긍한다. ‘한판 싸우고 화해하자!’, ‘몸 성할 때 화해하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결국 ‘화’를 염두 해두는 것은 같기 때문에 ‘주화’와 ‘주전’이 결국 다르지 않으며 산성 안의 이들은 약자이기 때문에 무엇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훈의 뜻이었다.

  그러나 그 둘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한다. 김상헌은 순결주의자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한판 싸우고, 얻어낼 껄 최대한 얻어내자.’가 아니다. 그는 더렵혀지느니 죽음을 택하겠다는 순결주의자이다. 김훈은 그런 김상헌에게 최명길의 목소리를 빌려 지긋이 말한다. 삶은 결국 치욕이고 더렵혀지는 것인데 그 때마다 죽음을 택하겠느냐고.

  문제는 정말 이 집이 불타고 있는가이다. 불탄 집에서는 물론 몸을 먼저 피신할 수밖에 없다. 이 공간에서 선택이라는 말은 무색해진다. <남한산성>은 이처럼 선택을 물을 수 없는 극한 상황에 인물들을 몰아넣는다. 역사를 배경으로 하였지만 이 또한 엄연한 소설이다. 그처럼 극도로 고립된 극한의 상황은 인간의 선택권을 강탈해간다. 묻고 싶은 것은 단 하나다. 누군가 우리를 항상 그런 극단의 상황으로 몰아놓고 치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보수언론과 수구정당이 외쳐 되는 한반도는 남한산성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연신 핵무기로 위협해오는 북한은 청과 다를 바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대의와 방편이 다를 바 없으니 미국과 치욕적인 협상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한 미군이 철수하면 전쟁이 터질 것이다. 고로 한미 동맹만이 살 길이다.

  물론 김상헌은 과잉이다. 우리는 충분히 합리적인 선택을 해낼 수 있다. 현실에 대한 분석과 그 토대에서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실은 치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김훈의 소설이 그동안 부정당하고 억압당해왔던 수치스럽던 인간의 이면을 들춰내고 그것을 긍정하는 점은 높이살만 하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대안이 그 개인을 들춰내고 거기서 발견된 치욕과 고통을 그대로 수용하는데서 그친다면 그는 또 너무나 쉽게 그가 부정해온 담론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처음에 던진 질문을 다시 꺼내보자. 김훈의 시대는 그를 얼마만큼 알아보는가. 그는 아직 반시대적이며, 그래서 더더욱 시대적이다. 니체는 위대함 시대성, 반시대성이 아니라 비시대성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비시대성만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김훈이 가지 않은 길이며, 또 가야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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