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사람들·계엄령 알베르 카뮈 전집 1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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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정의,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

우리는 늘 중요한 부분만 빼먹는다. 우리의 일상에서 통용되는 정의는 “지켜야 할 바른 도리”로서 이를 지키지 않는 사람은 바로 열에서 제외된다. 말장난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분명 중요한 것이 빠졌다. 이쯤되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는 한 만화 주인공의 말을 그냥 넘길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가 무엇이길래 날 용서치 못하겠다는것인가? 과연 이 대단한 “정의”란 무엇인가? 아니, “정의”는 과연 존재하는가?


너의 정의? 나의 정의!
여기 정의를 위해 모인 다섯 사람의 테러리스트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의 정의는 조금씩 다른 듯하다. 각자의 정의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스테빵의 정의는 혁명을 통한 결과 그 자체이다. 그로 인해 희생되는 모든 것은 당연히 감수해야만한다. 그렇지 못한다는 것은 혁명을, 그리고 정의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카리아예브의 정의는 다르다. 그의 정의는 그 실현 과정에 있다. 물론 혁명을 통한 인민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스테빵과 같다. 그러나 그 목적을 위한 수단에는 한계가 있다.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는 중요치 않다. 또 너무 유치하다. 다만 서로의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같은 결과를 꿈꾸면서도 전혀 다른 과정을 생각한다. 과연 정의는, 하나의 진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반복된 절망
어쨌든 결국 태공은 카리아예브의 손에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받지 못한 채 죽는다. 여기서 또 하나의 첨예한 갈등이 시작된다.
"태공은 폭탄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사상에 의해서 살해되었다고...중략... 우리는 사실로 돌아가서 태공의 머리를 날려 보낸 것이 자네라고 생각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러니 자네는 용서를 받아야 해."
경시총감과 태공비는 카리의 정의를 위한 행위를, 개인적이며 구체적인 살인으로 몰아간다. 이에 카리는 상당한 괴로움을 느낀다. 카리와 그들 테러리스트들은 인민을 위한, 즉 휴머니즘의 목적을 테러리즘의 수단으로 가져가야 하는 모순을 숙명적으로 지닌다. 그들의 테러의 기준은 그것이 인민을 위한 행위일 때만 허락된다. 그러한 논리로 그들은 아이들은 죽일 수 없으나, 태공은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면을 들여다보면 심각한 딜레마에 빠진다. 태공비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태공은 더 이상 추악한 압제자가 아니다. 카리는 태공과의 개인 대 개인의 만남, 즉 인간으로서의 만남을 누구보다 괴로워한다.
즉, 이상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 실존의 근본을 짓밟는 방향으로 놓일 때의 무참한 배신감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게 삶이 가진 부조리, 끝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시지프스와 같은 반복된 절망일지 모른다. 정의의 사람들은 압제를 반대하는 역압제, 폭력을 반대하는 반폭력적인 폭력을 사용이라는 반복된 싸이클 속에 존재한다.

사이클을 끊는 방법
니체는 가장 무서운 자들은 권력에 대항하는 자들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를 주변에서 쉽게 경험한다. 저항하는 자들의 재권력화만큼 무서운 것이 있던가. 그래서 진정한 혁명가는 혁명이 이루어지는 날 자살을 감행한다. 카리아예브는도 결국 교수대에 오른다. 그는 죽음으로서 그의 정의를 완성한다.
남은 이야기는 많다. 하나만 까먹지 말자. 빠뜨린 것이 무엇인가? 정의는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이다. 인간이 빠진 정의는 공허한 이념에 불과하다. 반복된 정말의 사이클을 끊는 것은 바로 인간이며,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윤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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