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하는 페미니즘 - 여자의 삶 속에서 다시 만난 페미니즘 고전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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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정희진 선생님 강의를 듣고 불만족과 회의감에 빠졌던 때 책장에 하릴없이 꽂혀있는 이 책을 뽑아들었더랬다. 보유하고 있는 페미니즘 관련 책은 많지만 이쪽 관련 책은 내게 긴 호흡이 필요한지라, 독서를 시작하려면 작은 작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작년 12월부터 읽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읽다가 덮고 다른 책 읽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오늘 완독! 들고다니면서 읽었다면 완독이 더 빨랐을텐데 400p 넘어 가는 책은 백팩 드는 날이 아니면 챙기기 힘들다. 나도 얼른 이북리더기를 사야지(는 월급날 이후가 될 것이므로 2월로 미뤄진다 흑흑 ㅠ)

<빨래하는 페미니즘>은 이론서라기엔 뭔가 부족하면서, 에세이라기엔 다소 깊은 거리감을 알 수 없는 매력적인 책이다.

저자 스테퍼니 스탈은 미국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태어나(엄마: 개짱엘리트 연구원, 아빠: 의사) 명문대를 나온 앞길 창창한 저널리스트다. 그녀는 전형적인 ‘알파걸‘이었으나, 예상치 못한 임신->결혼->출산 으로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지각변동을 겪는다. 여성에게 있어 출산과 육아가 가져다 주는 삶의 변화는 가난과 학력의 여부와 큰 상관이 없다.
저자는 조금 더 일(가정과 바깥의 일 모두를 총칭)을 쉽게 하기 위해 직장을 관두고 프리랜서 작가의 길로 나선다. 남편은 아주 ‘진보적‘인 성향을 띠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자신이 ‘가사와 육아에 시달리는 여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은 절망스러웠다. 그녀에겐 갓난쟁이 딸이 있었고, 그건 곧 자리에 앉아 글이라는 걸 조각도 써낼 여력이 없다는 걸 의미한다. 저자는 자신이 수천년동안 고통받아왔던 여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학생때 생각했던 자신의 미래와 현재의 자신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대혼란 속에서 스테퍼니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서점을 찾는다. 학부때 <페미니즘 고전 연구>를 들으며 배웠던 책을 다시 펴면서 그녀는 다시한번 학교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이 책은 그렇게 저자가 자신의 모교로 돌아가 <페미니즘 고전 연구> 수업을 재수강하며 느낀 소회들과, 수업을 통해 배우는 페미니즘 고전을 주욱 정리해 놓은 책이다. 출산과 육아가 먼 일이었을 때 읽는 페미니즘 고전과 그것들이 자신의 삶과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을 때 읽는 고저은 어떻게 다를까.

페미니즘 제1의 물결부터 포스트 모던 페미니즘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페미니즘의 역사를 총망라했기 때문에, 당연히 얕을 수 밖에 없는 수준이지만 맛보기로는 아주 그만이다.
나는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걸 덮고 난 다음 읽고 싶은 책을 무럭무럭 솟아나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100점 만점이다. 베티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부터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까지 이 책에 소개된 책들을 모조리 소화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다만 아쉬운 점은 시각이 지나치게 한정적이라는 것이다.
서구+중산층+엘리트 .. 사실 저자는 여성이라는 요소만 빼고 보면 모든 계층의 상위에 속해 있는 사람이다. 조금 꼬아서 생각하자면 (미안해요 스탈..★) 저자가 ‘고상하게‘ 페미니즘 고전 속으로 돌아가 여성인 자기 삶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위치덕분인거고ㅎㅎ.. 누구보다 절실하게 페미니즘이 필요한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이 곳은 제3세계에 가깝고 나는 명문대 재학중인 엘리트도 아니며 당장 핸드폰 요금 20만원이 밀린 여성이다. 과연 이런 나도 출산과 육아로 자아를 찾아 헤매며 페미니즘 고전을 들춰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암울해지지만,,,
뭐 다르게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이런 책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하고.. 19500원어치 대리경험.. 가성비가 내려와..^^~...

하지만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한 챕터로 짚고, 스피박은 이름만 한줄 언급한 정도로 넘어간 건 좀 많이 실망스럽다. 페미니즘을 총망라하면서 제3세계 페미니즘을 쏙 빼놓는다는게.. (물론 ‘제3세계‘라는 말 자체가 타자화이지만은..ㅜ) 이런 지점들이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서구주의적이라고 평가하게 만든다ㅇㅅㅇ;; (하지만 이건 결국 제3세계 여성의 열등감 내지는 까탈일지도..^^ㅋ..)
어쨌든 서발턴은 여기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다음에 읽을 페미니즘 도서는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이다.

또 불만 늘어놓다가 글을 맺게 됐는데, 그래도 난 이 책을 추천합니다..
문장이 쉬우면서 담긴 내용은 유익하고, 유머가 밴 문체라 책장이 빨리 빨리 넘어간다. 누군가 내게 페미니즘 이론 입문서를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이 책을 건넬 것 같다. 페미니즘에는 아주 많은 얼굴이 있고, 우리는 이 안에서 끊임없이 분열하고 충돌하면서 발전한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옹호>부터 주디스버틀러의 <젠더 트러블>까지 오는 동안 이 판은 수십번 씩 뒤집어 졌다. 그러고 또 언제 뒤집어 질지 모른다. 그러나 변화만이 결국 존재를 증명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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