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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칼 비테 교육법 : 평범한 아버지의 위대한 자녀교육
칼 비테 지음, 김일형 옮김 / 차이정원 / 2017년 8월
평점 :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칼 비테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몰랐고, 몬테소리, 프뢰벨, 가베 등이 정확히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 교육법인지 몰랐다. 책을 읽기 전 칼 비테라는 사람에 대하여 웹 서핑을 통하여 알아보았다. ‘영재 교육법’이라는 키 워드로 수없이 많은 페이지들이 검색되었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몬테소리, 프뢰벨, 가베 등 교구를 통한 학습유도 방식이 칼 비테에게 영감을 얻은 것이라는 글 귀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난 지금도 정확히 어떤 지점이 ‘영재 교육법’이고, 몬테소리, 프뢰벨, 가베 등의 지향점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칼 비테라는 사람에 대하여 검색을 하다 보니, 아들 칼 비테가 13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기네스 북에 가장 어린 나이에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글을 보았다. 그리고 그 기록은 현재까지 유효하다고 한다. (기네스 기록에는 12세로 기록되어 있다고 함). 자식을 둔 부모로서 호기심이 일었다. ‘어떤 교육법에 대한 이야기일까?’, 200년이나 이전에 쓰여진 내용이 여전히 현실에서 유효할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상당부분 동의하기가 어렵다. 물론 200년 전 시각에서는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방법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날에 적용하기에는 고리타분하고 독선적인 면이 많다. 독자는 글의 상당부분을 걸러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책을 펼쳐 들자 마자 들었던 느낌은 ‘이 사람은 굉장한 독선가에 고집불통이고 무언가에 화가 많이 난 사람이구나’였다. 380페이지가 넘는 내용 내내 저자는 주변인들에게 화를 내고, 심한 경우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을 증오한다. 자신의 고집이나 주장이 틀렸을 수 있다거나, 지나치게 성급한 일반화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380페이지를 오로지 자기 변명과 주장들로 가득 채워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책은 아들 칼 비테를 키우며 겪었던 일에 대한 수기 형식을 띤다. 이 아버지에게 아들은 꼭두각시 인형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본인의 주장과 생각을 입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존재로 그려진다. 책을 읽는 내내 과연 ‘이 아이는 행복했을까’ 하는 상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인터넷 페이지에서 ‘칼 비테의 영재 교육’을 칭송하고, 그 아들이 9살에 이미 6개 국어를 할 수 있었네, 13살에 이미 철학 박사학위를 받고 18세에 대학교수가 되었네 하는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페이지에서도 그래서 그렇게 우수한 천재(?)가 어떠한 연구 족적을 남겼는가는 찾을 수가 없었다. 겨우 200년 전에 존재하였던 사람이고, 이렇게 많은 교육법 관련 페이지가 있는 것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 아들이 학계에 어떠한 기여를 하였고,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다. 다만 아들을 어린 나이에 박사와 교수로 만들었다는 것에만 집중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아버지 칼은 친구와 혹은 주변인들과 교육법에 관련한 논쟁을 하다가, 신이 자신에게 육체와 정신이 건강한 아들을 보내준다면 자신의 교육법을 따라 남들보다 뛰어난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입증하겠다고 이야기 하는 부분이 있다. 이는 아들을 자신의 도구로 생각하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화가나 있는 자신이, 스스로가 틀리지 않았음을 아들을 통해 입증하겠다는 오만한 집념이 느껴진다.
다만 이 책에서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적절한 교육을 통하여 아이의 잠재 능력을 키워줄 수 있다는 정도이다. 결과적으로 공교육이 지향하여야 할 지점은 개별 아이의 특수성을 이해한 아이에게 맞는 교육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100년 뒤에는 내가 이제까지 말한 교육법들이 그릇된 것으로 증명될지 모른다. 모든 아이의 다양한 잠재력을 일깨우고 교육할 수단들이 발견되어 보편화될 것이고, 많은 부모와 교육자가 자녀들을 계속 교육할 기회를 양심적으로 활용할 테니까. 그러면 비로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범한 아이의 부모와 평범한 아이의 부모가 똑같이 아이를 가르치게 되므로 평범한 아이가 비범한 아이보다 발전할 기회는 없을 것이라고. 다시 말해 평범한 아이는 비범한 아이보다 뒤쳐져야 한다고.’
개인적으로 지금의 세태는 교육의 과잉이라고 생각한다. ‘조기교육’, ‘선행학습’, ‘사교육’ 등등 다른 아이와의 조그마한 차이점이라도 만들기 위하여 너무 많은 교육을 아이들에게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 교육을 받는 아이들은 행복할까? 다시 아들 칼 비테로 돌아가보자. 앞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그의 뛰어난 연구업적이나 학자로서의 족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그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타인과 비슷한 수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조기교육으로 같은 또래 아이들보다는 빨랐을 수 있지만, 그게 전부인 상황이 되었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들 칼 비테만큼 빠르게 학위나 교수의 위치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가 다다른 수준의 교육을 평범하게 쫓아간 수많은 당대의 학자들과 결과적으로는 차별점이 없어졌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꼭두각시로 혹은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던 아들이 어느 순간 현실 부적응자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칼 비테는 아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자신의 교육관 및 이상을 형상화하는 도구로 활용했다.
'과연 아들 칼 비테는 행복했을까? 이후 사회구성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책의 어떤 페이지보다, 위와 같은 질문의 답을 구하고 싶었다. 아이를 양육하며 계속 의문이 든다. 과연 모든 부모가 ‘조기교육’ 및 ‘교육열’을 포기하고, 아이의 행복을 최우선에 둘 수는 없는 것일까? 이렇게까지 해서 이 아이들의 삶이 과연 부모세대보다 나을 것인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큰 틀에서 이 조류에서 벗어날 자신 마저 없다는 것이 나의 현실이다. 고민만할 뿐 이러한 세태를 역행하지 못하는 나 자신의 소심함이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