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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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을 해 봤는데 어쩌면 내가 한국소설을 기피하는 이유는, 단순한 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라 뼈아픈 현실을 도피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 현실과 맞닿아 있는 책은 두렵고, 보기에 추해서 굳이 읽을 필요까지 있는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특히 한국소설중에도 최근에 나온 소설들, 현대가 무대인 것들은 더 그랬다. 나는 너무 쉽게 반문한다. '이 책을 쓴 사람, 어딘가에 잘 살고 있는 것 맞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크기는 얼만할까? 과거 어느 시점보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크기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학교에서 배웠던 용어들, 지구촌 시대라느니 우리나라가 일일생활권에 들어온 지 반세기가 안됐다느니 하는 것들은 전부 흘러간 말에 불과하다. 사실 지금은 몸이 그곳에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시기이다. 나는, 마음만 먹으면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에 전파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 그게 지금의 현실이다. 내가 밟고 있는 지면이아니라 내가 응시하고 있는 화면이 또 하나의 세상인 시대. 사이버시대라는 말은 너무 오래된 구식표현이고, 지면과 화면이라는 두 개의 세상에서 저울질을 하며 각자가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이해하고 때로는 싸우며 지낸다.

댓글부대라는 책을 읽고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여기에 있다. 상대적으로 휘둘리기 쉬운 사이버공간에서 벌어지는 각축전. 이미 많은 사람들이 댓글부대라는 용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고 있고, 일베나 메갈 등 실제로 '지면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문제가 되어 벌어지는 사회적인 사건사고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렇게도 외면하고 싶은 현실들이 자꾸 지면으로 톡 하고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공간에서 마치 자유로운 것 같다. 각자를 비판하고 혹은 옹호하면서 어쩌면 인터넷은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민주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전부 각자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공간.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면 그곳은 '지면'이 아니다. 단순히 화면안의 콘텐츠의 파편들이 모여 있는 하나의 거대한 가상공간이었을 뿐이다. 심지어 그 가상공간의 나는 내가 아닐수도있고, 무수히 많은 인격의 나 즉, '세컨 아이디'였을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지만 '넷카마'라는 단어를 아시는지. 좋은 의미의 단어는 아니지만 Internet+おかま 로 사이버상에서 여성의 행세를 하는 남자들을 말한다. 그 가상의 공간에서 나는 없는 남편을 만들고, 교수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아주 어린 학생이 될 수도있다. , 나를 변형하여 '내가 원하는' 혹은 '내가 필요한' 나로 만들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심각성은 여기에서 온다. 언어는 휘발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혹은 정말 안 좋은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술 한 잔 기울이면서 했던 이야기는 일주일만 지나도 곡해되거나 분위기만이 남는다. '그 선배 나한테 좀 심했지' 혹은 '그래, 그럴 만도 했어'정도의 감정만이 남는 지면상의 문제와는 달리 화면속의 공간은 연소되지 않는다. 내가 쓴 글들은 어딘가에 분명 남아있고,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지웠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오늘의 나는 관심병이 있는 여성이었는데 며칠 뒤의 나는 청소년이 되어있을 때 온다.

책 속의 주인공이 그런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나, 사이버공간은 매우 자유롭다. 철저하게 대중 중심적인 공간이 바로 화면 안 세상이다. 그 곳에서는 각자의 얼굴은 서로가 공개 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심지어 타인으로 위장도 가능한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는 '좋아요''공감' '댓글 수''진실'이 되는 곳이다. 사실 진실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 순간의 즐거움과 그 순간의 이야깃거리면 충분하다. 사실, 사이버공간상의 개개인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쉽게 선동되고 알기 쉬울 수 있다. 각자가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고 각자가 대표가 되는 세계이다. 정당도 정치도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각자를 대표하고 있는데, 정당이 왜 필요할까? 단지 중요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리고 내 글이 묻히지 않는 것이다. 조금 자극적인 방법이라고 할 지라도 말이다. 나 역시도 이렇게 장문의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내가 이 글을써서 내 블로그에 올렸는데 글이 너무 길어서 아무도 안 읽으면 어떻게 해야하지?' 무플, 무공감이 '탈락'이 되는 화면 속 세상이다.

촛불 들고 나섰던 애들도 아마 바뀌지 않을 거야. 1985년부터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애들, 특히 여자애들. 난 그 애들을 아주 버렸다고 생각해. 걔들은 평생 정부 탓이나 하면서 살아갈거야. 히피들이 추하게 늙어간 것 좀 봐. 얘들도 꼭 그렇게 될거야. 공부도 하지 않고 남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자기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소통을 안 하네 어쩌네, 80년 광주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네, 그런 어리광을 늘어놓으며 평생을 살거야. 그냥 전라도 인구가 그만큼 늘었다고 보면 돼. 그걸 어쩌겠어. 투표를 못하게 하겠어. 인터넷을 못하게 하겠어? (...) 우린 그다음 세대를 공략해야해. 아직까지는 머리가 그렇게 굳지 않은 애들.<P.152>

<댓글부대>는 이러한 교묘함을 이용한다. 2012년도 대선을 떠들썩하게 했던 국정원 댓글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실제로 있는 공간과 없는 공간을 섞어서 만들어낸 소설이다. 일베도 오유도 나는 모두 알고 있는 공간이며, 사실 이런 커뮤니티들은 무수히 많다. 그런 곳에서 댓글을 조작해 나가는 팀-알렛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하다. 어떻게보면 진부한 마무리일수도있고, 어떻게보면 너무 자극적이라 불편할 수 도있지만 아주 가까이에, 내가 참여하고 있는 사이트 자주 눈팅하는 곳들 그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가까운 이야기이다. 현실보다도 더 현실 같은 가상공간이 이제는 신의 영역이 되어 현실세계를 조작하려 들고있다. 팩트와 픽션 중간 어딘가에서 헤메고 있는 소설속에서 누군가는 현실을 보고 누군가는 소설을 읽는다.

다소 길다고 느껴지는 차례를 천천히 모아서 읽고나면, 사실 <댓글부대>의 시놉을 살펴볼 수 있다. 길게 적어둔 에필로그보다 더 와 닿으면서도 신선하다고 느낀 점이다.

책을 전부 다 읽고 나선, 웅장하고 거대하게 시작했다가 마무리할 시간이 부족했거나 무언의 압박에 의해서 급하게 마무리 해 버려야 했던 뒷내용이 궁금해져 더 찾아보게 만드는 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나 역시 1985년부터 1995년 사이에 태어난 애들, 특히 여자애들이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키보드 대화에 능숙하지만 아날로그세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중간어디에서인가 나를 피력하는 세대.

임상진 그게 다 거짓말이었단 말이죠?
찻탓캇 글쎄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저희가 나름대로 사전조사를 했어요. 저희가 올린 글의 주인공에 해당하는 실존 인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비슷한 사연이 있는 사람은 여러 명 있었어요. 나인쓰레드픽처스가 그전에 영화를 찍고 제대로 임금을 지불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영화스테프들 처우가 열악한 것도 사실이고요. 삼궁은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이라고.<P.37>

사실은 아니지만 진실은 가득한 사이버 공간에서, 나는 나의 생각인 것인 양 재 생산된 재 가공된 '진실'을 찾아 공감을 하고 사이버판 마녀사냥을 나선다. 혹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만을 끊임없이 찾아 나선다. 나는 매우 정의로운 척 한다. 사실 내가 정의롭다고 믿는다.

요즘 정치하는 친구들은 그걸 몰라. 경제가 사회 분위기를 결정하는 게 아니야. 사회분위기가 경제를 결정하는 거야. 집단의 힘, 군중의 마음!(...)그런데 멍청한 놈들이 그런 열광을 불러일으킬 생각은 않고 요즘 젊은이들은 패기가 없다느니, 뭘 포기한 세대라느니 하면서 오히려 기를 꺾어놔. 아주 악질적인 사고방식이야. <P.148>

가공된 현실은 때론 더욱 현실 같고, 더욱 잔인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감정을 읽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피해를 입더라도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기 때문에 당장 발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의식 또한 얇고 적게 가져갈 수 있다.

물론, 작가는 말한다. 이 책은 특정 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가상의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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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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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대로 '브이'의 복수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책을 들고 왔을 때 동생의 반응도 그랬다. 브이는 멋진 놈. 사실 나는 만화는 순정만화 외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잘 읽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는 그림체. 사실 주인공의 얼굴들을 인지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의 브이일지 모르겠지만, 원작 만화에서의 브이의 복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브이는, 과연 영웅일까?

라크힐 캠프에서 5번 방의 남자였던 브이. 그는 벤치 5(신 약물) 실험 때문에 정신이상이 온 듯하지만, 매력적인 성격을 지닌 남자였다. 그는 머스타드 가스와 네이팜으로 자신을 가두던 캠프를 폭파하고 탈출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해 나간다. 그곳에서 실험을 주도했던 델리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고, 실제 성격도 좋았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브이에 의해 살해당하고 남겨진 일기장엔 참혹한 사실들이 적혀있다. 또한 주교 역시 종교자의 이면을 보이고, 사령관이었던 프로테로 역시 라크힐에서 인간을 오븐에 구워냈던 것이다. 이 모든 이면은 브이의 복수가 시작된 뒤, 철저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입에 들어갔을 때 구원자의 살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간에 주의 몸이 되는 것입니까?"

...주교는 독살되었다. 받아먹은 빵은 청산가리 범벅이었고, 그의 뱃속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청산가리였어.<P.62>

브이는 주교를 도륙하는 방법보다는 독살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념의 죽음을 진짜 죽음이라고 청하는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인간이 지닐 신념의 마지막에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믿지만 인간의 탐욕을 버리지 못한 주교에게는 독이 가득한 청산가리 빵을, 주변에선 마치 나이팅게일인 양 평판이 좋지만 사실 라크힐의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실험을 행했던 델리아에게는 '알 수 없는'독약을 주입하고, 라크힐에서 인간 오븐을 구워낸 사령관에겐 그 오븐에다가 끔찍이도 모아오던 인형을 구워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타인의 신념의 죽음을 사용한 브이의 방법은 실로 잔인하다. 이는 신체의 죽음보다도 더욱 괴로운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정권을 잡고 있는 영국은 브이를 '테러리스트'라 칭했다. 브이는 자신을 이름은 없고 그저 '브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군중들은 아니 적어도 이비에게 브이는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를 관통해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침반이 되어 준 사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을 영웅이라 칭할 만 하다. 하지만, 읽어내려가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권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정권에 대립하다 실패하면 테러리스트요 쿠데타이지만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혁명과 쿠데타의 역사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 인물이 브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브이가 처음 구했던 그녀 이비는 전형적인 국민의 모습이 아닐까. 그녀에게 최초의 브이는 영웅이 맞았을 것이다. 강간당할 뻔한 자신을. 참혹한 환경에 처해진 자신을 슈퍼맨처럼 구해낸 브이. 그녀는 전적으로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브이의 집은 이비에게 말 그대로 "너무나 아름답고 안전한 곳"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갈망하고 꿈꾸기 마련이다. 최초의 이비가 살았던 영국의 감시사회보다 브이의 하우스가 좀 더 자유롭고 낭만 한 방울이 남아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브이는 좀 더 다른 목적이 이비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깨어나라고 이비를 채찍질하던 브이의 모습. 이비를 가두어 고문하고 신념을 깨우려 하는 그의 모습이 가장 불편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이 만화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 불편했다. 사실 모든 권력은 이동한다. 우습게도 전혀 새롭고 혁명적인 모습을 띈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은 닮아있다. 모든 권력은 닮아있기 마련이다.

이상해요. 난 이제 당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과 발레리의 모든 이야기를 알아요. 그렇지만 너무 설득력이 있어요. 난 그녀를 믿었어요. 그녀를 보지 않고, 난 그녀를 거의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곳에 없었지요.<P.174>

고문실에서 휴지에 쓰여진 편지. 발레리의 편지에서 이비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자신의 신념을, 마음속의 장미를 지키라 말했던 4번 방의 레즈비언 발레리. 그녀는 단순히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것일까. 정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브이는 이비를 고문해야 했을까. 이비를, 그렇게 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우매한 인물로 평가한 것은 누구일까.

발레리의 편지를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로맹가리의 단편이 생각났다.

매일 아침 슈츠부인은 싱그러운 꽃을 한 다발 들고 내려가 미스터 칼의 침대 머리맡에 놓는다. 그녀는 칼의 베개를 다독여 주고, 그를 도와 자세를 바꿔주고, 이제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에게 음식을 먹여준다. 이제 칼은 겨우 일만 할 수 있을 정도다.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어떤 휴머니스트>

유대인이었던 칼은 믿음직한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이 쌓아둔 부의 전부를 맡기고 지하실에 숨는다. 전쟁이 끝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매일 부부가 내려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백날 책으로만 인류애를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책에만 묻혀서 산다. 그렇게 살다가 그의 인생을 끝을 고한다. 사실, 전쟁은 끝났다. 이미 오래전에. 그 사실을 모른 채 '충직하게'자신을 지켜준 부부에게 감사하면서 죽어간 칼은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비록 사육당하고 있다고 하나. 그러나 혹시 그 지하실을 한 번이라도 뛰쳐나와봤다면 이미 평온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런 가혹한 지하실이 아닌 곳에서 자신이 쌓아온 부를 누리면서 살 수 도 있었을 텐데 전쟁이라는 공포가 만들어 놓은 세계의 안에서는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맏이 한 것이다. 부부의 욕심이 만들어놓은 이곳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아가는 그를 누가 불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전지전능한 독자의 입장에서, 미스터 칼을 공포에 질려서 받을 잠깐의 충격을 감안하고라도 더 새로운 세상을. 전쟁은 사실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음을. 당신이 믿고 있던 세상은 사실 가짜였음을. 당신을 지켜주던 부부가 옭아매고 있었음을 알려줘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브이의 입장에서, 사실 현정권 독일의 공포는 당신의 정부가 당신을 감시하고 옭아매고 있는 것임을. 국가는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그것을 자각해야 함을 잠깐의 충격을 주어 알려줘야 했는가?

 

브이가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5번 방의 사나이였다는 것이다. 캠프에서 인간 실험체로 쓰였던 브이. 그 사나이는 살아남았지만 약물중독에 의해 어딘지 모르게 꼬였을 지도 모른다. 실험체였던 브이는 캠프에서 나와 캠프의 우두머리들을 하나하나 도륙한다. 나아가서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정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다.

브이는 난세의 영웅은 아니지만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던 영국 정권을 뒤흔들만한 능력을 가진 세력으로 자라났음은 분명하다. 또한 매우 똑똑한 방법으로 선동을 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정권을 모두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 대신에 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대를 이어가기를 바라고 또한 훌륭한 방법으로 그 일을 성공해 냈다. 현 정권에 대립하는 하나의 권력으로서의 브이의 모습은 가히 선구자라고 할 만 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으며, '피를 쓰는 방법'은 결코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혁명가이다.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 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고요함은 사라지지.<P.193>

무정부 체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하나는 창조자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파괴자의 얼굴이야. 그렇기 때문에 파괴자는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잔해 위에 깨끗한 캔버스를 만들어 창조자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거야. 한 번 붕괴되고 나면 더 이상의 잔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폭탄과는 안녕이야. 파괴자들과는 안녕이라고! 더 나은 세상에 그들이 있을 자리란 없지.<P.222>

브이는 자신 역시 파괴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엔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이비가 자신의 정신을 이어가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비는 다시 브이가 되어 또 다른 브이가 돼 줄 누군가를 권력과 친하지만 아직은 '자신의 편'에 설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자를 선택해 나가는 것을. 책의 내용은 불편하고 힘들지만 권력의 이동에 대하여. 확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감시사회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책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 더 감동적이고 더 훌륭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내가 이 책에서 읽어 낸 것들은 모든 권력들이 교체되는 곳에서 그 혼란 속에서 대비되어 있는 다른 권력은 결국 기존의 권력과 99%는 닮아있으며 1%의 상황이 새로운 혁명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책이 조금은 마음에 안 들어서 짧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A vacational viewpoint". 만일 창조주의 입장에서 인류를 고용한 직원으로 생각하고 직업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를 위협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P.111>

사실 처음에 읽을때는 인물의 얼굴도 구분이 안가서 계속 흐름을 놓쳤다. 내가 난독증이었다니..ㅠㅠ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책에 빼곡히 챕터명을 써가면서 사람의 이름을 적어가며 봐야했다..ㅠㅠㅠ 책은 재밌는데 누가하는말인지 대사가 너무꼬여...ㅋㅋㅋ

모든 챕터의 제목을 V로 채우고, 브이가 자신을 설명해 나갈 때의 V로 된 단어들의 나열은 너무나 유명하다. 혹시 나중에 이 책이 생각난다면 영문판으로 읽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그렇게 짜 맞춰 나갔을까. 영화 보는 것을 즐기진 않지만, 혹시나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자막 없이 집중해서 봐 보고 싶다. 물론 그럴 정도로 언어능력이 훌륭하진 않아서 많이 힘들겠지만..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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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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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록색을 참 좋아하는데 한 여름의 태양 아래 아주 농익은 초록이 아니라 새순의 연둣빛. 그 봄의 포근한 빛조차도 힘들어서 반사해 내는 여린 연둣빛을 아주 사랑한다. 그런 색의 책이었다. 부끄럽게도 책을 고르면서 표지나 제목에 더 신경을 쓰면서 고르는데 일단 얇았고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에, 제목 역시 마음에 들어 집어왔다.

가끔 리뷰를 남기면서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감추느녀고 그냥 겉만 핥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누군가 봐주길 바라면서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맞춤법은 물론이거니와 혹시나 불편한 내용은 없는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는데, 이 책은 사실 그렇게 적으면 할 말이 사라지는 책이다. 독서에 지친 특히나 다독에 지친 사람들이 있다면 꼭 일독을 권하는 책.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책의 시점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께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1인칭 작가, 전지적작가, 3인칭 모든 시점들이 있는데 왜 2인칭 시점은 없는지, 왜 안 가르치는지 물었었는데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젊은 문학샘은 그런 시점은 없다고. 있긴 하겠지만 대표적인 작품이 없다는 짤막한 대답으로 괜한 질문을 했던 사람을 만들었었다. 그 뒤로 사실 2인칭 소설을 찾았었는데, 정말 학교 도서관에서는 찾지 못했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시간이 흘러 만난 이 짧은 책은 2인칭 시점이다. '너'가 주인공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이런, 정신이 나가 담뱃재를 찻잔 속에 터네. 아무리 더러운 싸구려 카페라 하더라도 말이야. 또 이 광고를 읽을 거야. 젊은 사학자 구함. 반듯하고 꼼꼼한 사람일 것. 프랑스어로 일상 표현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시작>

시작을 읽으면서, 나는 졸지에 대책 없이 젊은 사학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남자 사학자인 나는 어느 순간 그 광고지로 향하고 있었고, 음산한 곳에서 아우라를 만난다. 아우라는 나를 고용한 늙은 여인과 함께 사는 여성이다. 시각적인 즐거움이라고 해야 하나. 초록색의 옷을 입은 깊은 눈을 가진 아우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는 자신의 죽은 남편의 일대기를 정리해 달라는 늙은 여인의 일자리를 받아들이고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프랑스어로 된 남편의 일기. 일기 속의 늙은 여인은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그 여성은 아마 지금 백살이 넘는 노인인 듯하다. 이 노인과 아우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어쨌든 왜 이 늙은 노인과 이 암울한 집에서 아우라는,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녀가 다시 손을 뻗자 곁에서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녀와 너 사이에서 또 다른 손이 나타나더니 노파의 손가락을 잡는거야. 네가 옆을 보니 거기에는 어떤 여자애가 있어. 네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아이의 몸전체를 다 볼 수 는 없어.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난거야. 적어도 침묵이 동반하는 소리보다는 크다해도 순간적으로 감지되기 때문에 들리지는 않아도 실재한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소음조차 없어.<P.19>

나를 고용한 여인의 벗이자 조카인 아우라. 그녀는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인기척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말 그대로, 그녀의 이름처럼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는 아우라에게 끌렸다.

녹색 옷을 입은 아우라가 네게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달빛이 비단 치맛자락 사이로 뽀얀 허벅지를 비추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넌 그녀가 이제는 어제의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고 몇번이나 되새겨. 너는 그녀의 손가락과 허리를 만지면서 어제의 그녀는 스무살을 넘었을 리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풀어헤친 머리칼과 창백한 볼을 어루만지면서 오늘의 그녀는 마흔 살 중년 여인 같다고 생각해.<P.47>

꼭 오페라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한다. 숨쉴 새도 생각할 새도 없이 장면은 바뀌고 음산하고 스산한 기운 속에서 초록빛의 아우라에게 집중하면서,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전개되는 오페라처럼. 웅장하긴 한데 뭔가 뒷 끝이 켕기는.

남편의 읽기를 읽으면서 '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의 부인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현실로 돌아와서는 무덤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녀가 과거의 낭만 때문에 사방의 고층건물 사이에서 알박기하면서 그 어둠에 갇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도 남편의 글에만 파묻혀있고. 심지어 그 집에는 왠지 모를 신비함을 간직한 '너'의 운명적인 사랑 아우라가 있다. 제법 되는 페이를 지급하는 이 직장 아닌 직장에서, 너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쨌든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고, 그 늙은 여자의 일대기도 남편의 일기 속에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 너는 아주 천천히, 마무리하고 싶었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 "오늘 새벽 복도에서 그녀가 혼자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지만 그녀가 내뱉던 단어들은 나를 향했다. '날 잡지 말아요. 난 나의 청춘을 향해 가고, 청춘은 내게 오고 있어요. 벌써 들어왔고, 정원에 있고, 이미 도착했어요.' 콘수엘로, 불쌍한 콘수엘로...콘수엘로, 악마도 천사였지 한때는.<P.57>

2인칭 시점의 소설이 어려운 이유. 이제 알것같았다. 사실 아우라를 읽는데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지 않는다. 8시 뉴스가 시작할 시간에 책을 들어 읽으면 9시 뉴스를 볼 수 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지만, 사실 잠들때 까지도 뭔지 모를 스산함이 감도는 이야기였다. 그래. 악마도 천사였지 한때는. 이름조차도 아우라인 그녀 역시, 너에게 있어 그 스산한 집에서 빛을 발하는 천사였지.

 

 

 

 

 

 

 

<<아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존재의 허무. 그 젊은 여자는 콘수엘로의 과거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책의 중간중간 언급이 된다. 젊어 보였던 너와의 섹스가 어느 순간 중년의 아줌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검은 머리의 뿌리는 흰색이기도 하고...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백 살 넘은 노인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너가 그 콘수엘로 부인의 남편이었던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채 한 시간짜리 연극은 막을 내린다.

제목만 보고, 사진만 보고 골랐던 책에게 된통 당한 기분이다. 사실 평범하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읽었다면 한없이 평범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2인칭 시점을 끌어옴으로써 정말 미친 듯 집중하여 읽게 만든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맥시코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게 하면서도, 그 여자. 아우라일지 콘수엘로일지 모를 그녀가. 그녀의 과거가. 그리고 현재가 알 수없는 환상에 갖혀 책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만약, 우리가 문지방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젊어지고 반대로 늙을 수 있다면?이라는 가벼운 구전 소설 같은 판타지가 짧게 녹아 만들어진 것이라 아우라의 해설 뒤에는 쓰여있다. 민음사의 해설을 안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다 읽고 소름 끼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해설까지 읽어보게 만들더라.

불타오르는 얼음이자 얼어버린 불.

과거에 갇힌 여자 콘수엘로. 그리고 아우라.


aura<oʀa> - 프랑스어 사전.

n.f. 여성명사

  • 1. 심령 영기(靈氣),아우라 (초능력자에게 보인다는 인체의 후광)
  • 2. (사람 주위에 떠도는) 독특한 분위기,영향력,(예술작품 따위에 의한)감동의 여운 (= ambiance, atmosphère)

    Il flottait autour d'elle une aura de mystère. 그 여자 주위에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 3. (히스테리·간질 따위의) 전조(前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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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의 여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5
아베 코보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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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매력적인 책 한 권을 찾아서, 일주일이 지루하지 않았다. 부조리, 실존주의..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책. 쉽게 이야기하면 꼭 모래처럼 바스러져 버릴 거 같아서 할 말들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다. <모래의 여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제일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이 사람의 이름은 실종신고 서로 공개될 뿐. 책 속에서의 주인공은 <손님>이다. 막막한 사막에서 그는 손님이었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 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시작>

 곤충 채집을 하기 위해, 쳇바퀴의 일상에서 휴가를 내고 사막으로 훌쩍 떠난 남자는 사막의 한마을에 민가에서 머물게 된다. 사구가 형성된 곳에 있는 민가. 사람들은 '할머니'의 집이라고 했지만 의외로 삼십 대의 과부가 살고 있었다. 수줍은 여인네는 어쩐지 상기되어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곤충 채집을 하러 갈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사막 한가운데 그 집에 갇혀버린 것이다.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 하는 집. 하루라도 게을러지면 조금씩 파묻히는 모래. 탈출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점차 익숙해져 가는 나. 그 모든 것들이 부조리한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적응해 간다. 일련의 과정들. 삶의 부조리함이 어떤 식으로 잠식해 나가는지, 얼마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해내는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는 부조리함과 합의를 보게 되는 것인지...

 <이방인>의 뫼르소가, <변신>의 그레고리가 그랬듯. 나 역시도 그냥 이 상황에서 할 일을 할 뿐이다. 물론 조금의 저항을 하긴 했지만. 결국 할 일을 한다. 사막의 모래는 더 이상 모래가 아니다. 서 있는 곳에서부터 나락으로 나락으로 몰고 가는 그 모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 모래의 여자는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남자의 목적은 모래땅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래땅에 사는 곤충은 몸집도 작고 색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마니아가 되면 나비나 잠자리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그들 마니아들이 노리는 것은, 자기의 표본 상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도 아니고 분류학적 관심도 아니고 물론 한방 약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곤충 채집에는 훨씬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이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 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노력한 보람도 있는 셈이다<P.15>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까. 쳇바퀴를 굴리듯 천천히 굴려가는 생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제라늄을 키우면서 가장 원하는 것은 나만의 변종이다. 나의 이름을 붙인 꽃 한 송이를 위해서 공부도 하고, 벌이되어 이 꽃 저 꽃을 옮겨 씨앗을 만들어 다시 심고. 그런 노력을 해나간다. 이것저것 모으던 취미에서 점차 나만의 새로운 종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 책의 남자 역시 쳇바퀴 돌던 삶에서 벗어나 작은 만족을 위해서, 작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사막으로 떠났을 것이다. 구덩이에 갇혀서 탈출을 시도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것들이 작은 추억한 조각이 될 것이라고, 작은 추억일 뿐이라고 되뇌곤 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이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 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 <P.153>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던 구덩이에서 모래를 파내는 일. 남자는 그 사막에서의 갈증을 못 이겨서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일을 시작하고 나니 생각보다 덜한 저항감. 왠지 읽는 내내 배경은 사막인데 자판기 앞의 현대인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내가 하는 노동의 강도가 과연 나의 연봉에 맞는 건지, 끊임없이 비견 해보면서도 결국엔 자판 앞을 떠나지 못한다. 마침내 참을 수 없어 폭발하는 순간에도 결국은 다른 회사를 구하기 전까지는 직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자판기 앞에서 모래 퍼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갈증을 못 이겨서 옮겨 갈 생각은 하지만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인간이 기댈 언덕 같은 게 정말 있는 모양이다.


탈출을 시도했던 남자는 끝내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사구에 파묻혀 이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보란 듯이 살려내어 다시 그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남자는 이름이 없다. 사형수보다 못한 것.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목놓아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갑갑함. 이름조차 남지 않는 사람... 다시 모래 속으로 돌아가자.

 <모래의 여자>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의 삶. 그 삶 역시 찬찬히 살펴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여자는 너무 평온하다. 삶에 보란 듯이 순응해 버린 여인. 저항할 생각조차 없이, 하루하루 모래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밖으로 나가면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나의 삶에서, 작은 삶에서 남자 하나가 더 늘어나 내 노동을 조금 덜고 남자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내어주는 정도의 소일거리가 추가되는 정도. 그런 작은 정도의 삶의 변화만 있으면 된다.

 책은 순식간에 읽혀나갔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감금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남자가 그 부조리를 탈출하기를 바라면서, 여자의 답답함에 치를 떨면서 왜 같이 나가려 하지 않는지 채찍질해가면서 읽어나갔다. 하지만, 페이지가 줄수록 끝으로 치달을수록, 그 특유의 허무함이 묻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럴 줄 알았지.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 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마지막>

혹시 나의 삶도 모래 구덩이 어딘가에 묻혀있는 건 아닐까. 가만히 있는듯하지만 바람의 물결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를 쫓아서, 매일 내일은 또 퍼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의 생도, 모래 구덩이 어딘가에 물관을 간직한 채로 계속 퍼내 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묻는다.

퍼낸 모래는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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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0 14: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세상의 가장 낮은 곳 이야기. 가장 쓰레기 같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고상한 척하기 좋아하는 현대인들에게 불편한 책. 이렇게 포장하지 않더라도 나한테 엄청나게 불편한 책이었다. 이웃분들 중 한 분이 요즘 너무 심각한 책들만 읽어 머리가 아프다는 농을 했더니 기꺼이 추천해 주셨던 책.

정말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그냥 인간의 가장 아랫부분을 긁고 있어서 힘들긴 했지만.

어쩌면 나의 성별이 남자였다면 조금 더 편하게 읽을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지만, 여자여서 그런가. 조금은 화가 나기도 하는 부분이 많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내면을 감추고 살아간다. 참 쉬운말로, '나는 거짓이 없는 사람이야.'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런 사람도 꼭 옷은 입는다. 어쩌면 타인의 불편함을 위해서,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어떤 형식으로든 무엇인지 모를 내면을 감춘 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특히나 금기시 되고있는 '성욕'에 대한 단어들을 적나라하게 풀어내는 곳에서. 알듯 모를듯한 불편함 위로 통쾌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체국>은 그런 책이다.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는 찰스 부코스키의 우체국. 그럴 수밖에. 이 책을 누구에게 바치면 싸우자는 건가? 사실 찰스 부코스키는 실제로도 우체국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작가이다. 경험을 바탕으로 펴 낸 책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믿어주자 <이 작품은 허구이며, 아무에게도 바치지 않는다.>

 책의 내용은 소설의 주인공이 인생의 나락에서 올라오는 드라마틱한 일도 아니고 뭔가 어려운 역경을 헤쳐나갈 생각은 더더욱 없으며 영웅적인 인간도 아니다. 그저 빈민층의 섹스 중독자인 한 사내가 우체국에 취직하게 되면서, 여전히 섹스 중독에 알코올 중독자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일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소설의 전반에 걸쳐서 주인공이 하고 있는 생각은 그것인 것 같다. 그는 뇌의 98% 섹스, 1.9%는 알코올, 그 나머지로 오만가지 잡다한 삶을 해결해 나가는 사람이다. 우체국에 취직을 하게 된 이유도

처음엔 실수로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즈음이었는데, 저기 언덕배기에 사는 술주정뱅이가 귀띔을 해왔다. 매년 크리스마스를 잘 넘기는 용한 꾀가 있는 사람이었다. 거기 가면 개나 소나 다 써준다기에 가본 건데 어쩌다 보니 이 가죽 자루를 등에 짊어지고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끝내주는 일이잖아, 나는 생각했다. 만만하잖아! ...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순 없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시작>

이 책의 매력은 그거다. 주인공은 시작부터 끝까지 쓰레기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갱생한다거나 뉘우치지 않는다. 그저 섹스를 하고 근무태만을 하고 술을 마시고 경마를 할 뿐이다. 할 수 있다면 일을 그만두고 싶지만, 그러지는 못한다. 이런 사람이 우체국에서 십여 년을 정규직으로 버텼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아무렴 어때. 아무튼 처음에는 거북했지만 점점 읽을수록 더 아래는 어느 쪽이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묘한 쾌감이 있다.

 마치 내가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경험해 가는 느낌이다. 나는 길을 가던 여자를 바로 침실로 끌어들일 능력이 없으며, 갑자기 일을 하다가 강간을 할 생각도 더더욱 없으며, 이혼과 동거 그리고 여러 명의 여자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취미는 더더 더욱 없다. 일종의 관음증일까 아니면 간접경험일까. 아무튼 무언가 통쾌한 느낌이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G.G는 착한 사람이야.> 하지만 이 착한 아저씨가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마침내 내 앞에 있는 우편물이 G.G.보다 적은 날이 온 것이다. <P.54>

G.G.는 우체국의 성실한 직원이다. 모두에게 착한 사람이었던 G.G.는 마을의 어린 여자아이에게 귀엽다고 먹을 것을 주려고 했다가 성추행으로 고소를 당한다. 그 후 그는 더 이상 착한 사람이 아니었고 반쯤 미친 미치광이일 뿐이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이 부조리함을 눈치챈 사람은 우습게도 인생의 밑바닥을 긁고 있는 주인공뿐이다. 문제는, 이 주인공의 신용 역시 그의 인생만큼이나 밑바닥이기 때문에 아무도 신용하지 못한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정말 경멸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이 사람의 삶을 쫓아갈 뿐이다. 사실 내심 읽으면서 단 한 번만이라도 이 사람이 진정한 사랑을 찾는다거나, 이 사람이 무언가 뉘우치거나 그의 직장에서 인정을 받거나 하는 일이 생겨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계속 웃고 여자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주무르면서 키스를 해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돈이 지속되는 한, 사람도 지속되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를 태워다 주었고 남자는 여자와 함께 떠났다. 문 안으로 들어와 작별 인사를 하고 라디오를 켠 후 위스키를 찾아마셨다. 웃었고, 기분이 좋았고, 마침내 느긋해졌으며 자유로웠다. 짧은 시가 꽁초에 손가락을 뎄고 그런 후에 침대로 갔으며 침대 가장자리에 걸려서 넘어지는 바람에 매트리스에 벌러덩 누워서 잤다. 잤다, 잤다.<마지막>

어느 순간 생각했었지만, 그런 일은 마지막까지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고상한 가면을 쓰고 외면하고 있는 일들. 그저 일을 하지않고, 하고싶은데로 살고싶어! '그러니 날 좀 가만 내버려두시오!' 책 속의 주인공은 강렬하게 외치고 있는 메세지를 우아한척 하는 나는 불편하다는 단 한마디로 치부해 버린건 아닐까?


똥꾸멍이 뭐가 나쁘냐고! 당신한테도 똥꾸멍은 있잖아. 나도 똥구멍이 있다고! 가게에 가서 큼지막한 쇠고기 스테이크를 사봐. 거기도 똥꾸멍은 달렸어! 지구 상에는 똥구멍이 널렸단 말이야! 어떤 면에서는 나무들도 똥구멍이 달렸는데 못 찾는 것뿐이야. 나무들도 이파리를 싸잖아. 당신 똥구멍, 내 똥구멍, 세상에는 수십억 개의 똥구멍들로 가득 찼어. 대통령에게도 똥구멍이 있고, 세차장 직원들도 똥구멍이 있어. 판사들도 살인자들도 똥구멍이 있다고. 심지어 자주색 넥타이핀 남자도 똥구멍은 있어!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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