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9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송상기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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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록색을 참 좋아하는데 한 여름의 태양 아래 아주 농익은 초록이 아니라 새순의 연둣빛. 그 봄의 포근한 빛조차도 힘들어서 반사해 내는 여린 연둣빛을 아주 사랑한다. 그런 색의 책이었다. 부끄럽게도 책을 고르면서 표지나 제목에 더 신경을 쓰면서 고르는데 일단 얇았고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에, 제목 역시 마음에 들어 집어왔다.

가끔 리뷰를 남기면서 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을 감추느녀고 그냥 겉만 핥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솔직히 누군가 봐주길 바라면서 올리는 글이기 때문에, 맞춤법은 물론이거니와 혹시나 불편한 내용은 없는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는데, 이 책은 사실 그렇게 적으면 할 말이 사라지는 책이다. 독서에 지친 특히나 다독에 지친 사람들이 있다면 꼭 일독을 권하는 책.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책의 시점에 관한 수업을 들으면서, 선생님께 질문을 했던 적이 있다. 1인칭 작가, 전지적작가, 3인칭 모든 시점들이 있는데 왜 2인칭 시점은 없는지, 왜 안 가르치는지 물었었는데 그땐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젊은 문학샘은 그런 시점은 없다고. 있긴 하겠지만 대표적인 작품이 없다는 짤막한 대답으로 괜한 질문을 했던 사람을 만들었었다. 그 뒤로 사실 2인칭 소설을 찾았었는데, 정말 학교 도서관에서는 찾지 못했고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시간이 흘러 만난 이 짧은 책은 2인칭 시점이다. '너'가 주인공이다.

너는 광고를 읽어. 이런 광고는 날마다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야. 너는 곱씹어 읽어 보지. 바로 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광고야. 이런, 정신이 나가 담뱃재를 찻잔 속에 터네. 아무리 더러운 싸구려 카페라 하더라도 말이야. 또 이 광고를 읽을 거야. 젊은 사학자 구함. 반듯하고 꼼꼼한 사람일 것. 프랑스어로 일상 표현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시작>

시작을 읽으면서, 나는 졸지에 대책 없이 젊은 사학자가 되어버렸다. 젊은 남자 사학자인 나는 어느 순간 그 광고지로 향하고 있었고, 음산한 곳에서 아우라를 만난다. 아우라는 나를 고용한 늙은 여인과 함께 사는 여성이다. 시각적인 즐거움이라고 해야 하나. 초록색의 옷을 입은 깊은 눈을 가진 아우라. 그녀를 사랑하게 된 나는 자신의 죽은 남편의 일대기를 정리해 달라는 늙은 여인의 일자리를 받아들이고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된다.


프랑스어로 된 남편의 일기. 일기 속의 늙은 여인은 너무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그 여성은 아마 지금 백살이 넘는 노인인 듯하다. 이 노인과 아우라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어쨌든 왜 이 늙은 노인과 이 암울한 집에서 아우라는,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녀가 다시 손을 뻗자 곁에서 흥분한 숨소리가 들려왔는데, 그녀와 너 사이에서 또 다른 손이 나타나더니 노파의 손가락을 잡는거야. 네가 옆을 보니 거기에는 어떤 여자애가 있어. 네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 그 아이의 몸전체를 다 볼 수 는 없어. 그 어떤 인기척도 없이 그녀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나타난거야. 적어도 침묵이 동반하는 소리보다는 크다해도 순간적으로 감지되기 때문에 들리지는 않아도 실재한다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소음조차 없어.<P.19>

나를 고용한 여인의 벗이자 조카인 아우라. 그녀는 그렇게 어두운 방 안에서 인기척도 없이 마치 유령처럼 말 그대로, 그녀의 이름처럼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그는 아우라에게 끌렸다.

녹색 옷을 입은 아우라가 네게로 발길을 옮기는 동안 달빛이 비단 치맛자락 사이로 뽀얀 허벅지를 비추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넌 그녀가 이제는 어제의 소녀가 아닌 성숙한 여인이 되었다고 몇번이나 되새겨. 너는 그녀의 손가락과 허리를 만지면서 어제의 그녀는 스무살을 넘었을 리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풀어헤친 머리칼과 창백한 볼을 어루만지면서 오늘의 그녀는 마흔 살 중년 여인 같다고 생각해.<P.47>

꼭 오페라를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는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한다. 숨쉴 새도 생각할 새도 없이 장면은 바뀌고 음산하고 스산한 기운 속에서 초록빛의 아우라에게 집중하면서,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전개되는 오페라처럼. 웅장하긴 한데 뭔가 뒷 끝이 켕기는.

남편의 읽기를 읽으면서 '너'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거의 부인의 아름다움에 심취하고, 현실로 돌아와서는 무덤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그녀가 과거의 낭만 때문에 사방의 고층건물 사이에서 알박기하면서 그 어둠에 갇혀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도 남편의 글에만 파묻혀있고. 심지어 그 집에는 왠지 모를 신비함을 간직한 '너'의 운명적인 사랑 아우라가 있다. 제법 되는 페이를 지급하는 이 직장 아닌 직장에서, 너는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어쨌든 시간은 아주 빠르게 흘러갔고, 그 늙은 여자의 일대기도 남편의 일기 속에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아마 너는 아주 천천히, 마무리하고 싶었겠지만.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렇게 적혀 있어. "오늘 새벽 복도에서 그녀가 혼자 맨발로 걸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를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갔지만 그녀가 내뱉던 단어들은 나를 향했다. '날 잡지 말아요. 난 나의 청춘을 향해 가고, 청춘은 내게 오고 있어요. 벌써 들어왔고, 정원에 있고, 이미 도착했어요.' 콘수엘로, 불쌍한 콘수엘로...콘수엘로, 악마도 천사였지 한때는.<P.57>

2인칭 시점의 소설이 어려운 이유. 이제 알것같았다. 사실 아우라를 읽는데는 시간이 오래 소요되지 않는다. 8시 뉴스가 시작할 시간에 책을 들어 읽으면 9시 뉴스를 볼 수 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지만, 사실 잠들때 까지도 뭔지 모를 스산함이 감도는 이야기였다. 그래. 악마도 천사였지 한때는. 이름조차도 아우라인 그녀 역시, 너에게 있어 그 스산한 집에서 빛을 발하는 천사였지.

 

 

 

 

 

 

 

<<아래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 존재의 허무. 그 젊은 여자는 콘수엘로의 과거가 만들어낸 허상이었다. 책의 중간중간 언급이 된다. 젊어 보였던 너와의 섹스가 어느 순간 중년의 아줌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검은 머리의 뿌리는 흰색이기도 하고...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도 백 살 넘은 노인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실은 너가 그 콘수엘로 부인의 남편이었던 것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채 한 시간짜리 연극은 막을 내린다.

제목만 보고, 사진만 보고 골랐던 책에게 된통 당한 기분이다. 사실 평범하게 생각했다면 그리고 읽었다면 한없이 평범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2인칭 시점을 끌어옴으로써 정말 미친 듯 집중하여 읽게 만든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맥시코의 역사를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게 하면서도, 그 여자. 아우라일지 콘수엘로일지 모를 그녀가. 그녀의 과거가. 그리고 현재가 알 수없는 환상에 갖혀 책과 함께 증발해 버렸다.


만약, 우리가 문지방을 건너는 것만으로도 젊어지고 반대로 늙을 수 있다면?이라는 가벼운 구전 소설 같은 판타지가 짧게 녹아 만들어진 것이라 아우라의 해설 뒤에는 쓰여있다. 민음사의 해설을 안 읽는 편인데 이 책은 다 읽고 소름 끼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해설까지 읽어보게 만들더라.

불타오르는 얼음이자 얼어버린 불.

과거에 갇힌 여자 콘수엘로. 그리고 아우라.


aura<oʀa> - 프랑스어 사전.

n.f. 여성명사

  • 1. 심령 영기(靈氣),아우라 (초능력자에게 보인다는 인체의 후광)
  • 2. (사람 주위에 떠도는) 독특한 분위기,영향력,(예술작품 따위에 의한)감동의 여운 (= ambiance, atmosphère)

    Il flottait autour d'elle une aura de mystère. 그 여자 주위에는 신비스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 3. (히스테리·간질 따위의) 전조(前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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