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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 (정식 한국어판) ㅣ 시공그래픽노블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 / 시공사(만화)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그대로 '브이'의 복수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많은 것 같은데, 책을 들고 왔을 때 동생의 반응도 그랬다. 브이는 멋진 놈. 사실 나는
만화는 순정만화 외에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잘 읽지 않아서 더 힘들었다. 가독성이 많이 떨어지는 그림체. 사실 주인공의 얼굴들을 인지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영화에서는 어떤 모습의 브이일지 모르겠지만, 원작 만화에서의 브이의 복수는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한다.
브이는, 과연 영웅일까?
라크힐 캠프에서 5번 방의 남자였던 브이. 그는 벤치 5(신 약물) 실험 때문에 정신이상이 온 듯하지만, 매력적인 성격을 지닌 남자였다.
그는 머스타드 가스와 네이팜으로 자신을 가두던 캠프를 폭파하고 탈출하여 그곳을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복수를 해 나간다. 그곳에서
실험을 주도했던 델리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판이 좋고, 실제 성격도 좋았을 법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브이에 의해 살해당하고 남겨진 일기장엔
참혹한 사실들이 적혀있다. 또한 주교 역시 종교자의 이면을 보이고, 사령관이었던 프로테로 역시 라크힐에서 인간을 오븐에 구워냈던 것이다. 이
모든 이면은 브이의 복수가 시작된 뒤, 철저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입에 들어갔을 때 구원자의 살이 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든 간에 주의 몸이 되는 것입니까?"
...주교는 독살되었다. 받아먹은 빵은 청산가리 범벅이었고, 그의 뱃속에 들어가서도 여전히
청산가리였어.<P.62>
브이는 주교를 도륙하는 방법보다는 독살하는 방법을 택했다. 신념의 죽음을 진짜 죽음이라고 청하는 그가 선택한 방법은 인간이 지닐 신념의
마지막에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믿지만 인간의 탐욕을 버리지 못한 주교에게는 독이 가득한 청산가리 빵을, 주변에선 마치 나이팅게일인
양 평판이 좋지만 사실 라크힐의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실험을 행했던 델리아에게는 '알 수 없는'독약을 주입하고, 라크힐에서 인간
오븐을 구워낸 사령관에겐 그 오븐에다가 끔찍이도 모아오던 인형을 구워냈다.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타인의 신념의 죽음을 사용한 브이의 방법은 실로
잔인하다. 이는 신체의 죽음보다도 더욱 괴로운 죽음을 선사한 것이다..
정권을 잡고 있는 영국은 브이를 '테러리스트'라 칭했다. 브이는 자신을 이름은 없고 그저 '브이'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군중들은 아니
적어도 이비에게 브이는 영웅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과거에서 깨어나 현재를 관통해 미래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침반이 되어 준 사람.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람을 영웅이라 칭할 만 하다. 하지만, 읽어내려가는 사람의 관점에서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권력'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정권에 대립하다 실패하면 테러리스트요 쿠데타이지만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혁명과 쿠데타의 역사 사이에 가로질러
있는 인물이 브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브이가 처음 구했던 그녀 이비는 전형적인 국민의 모습이 아닐까. 그녀에게 최초의 브이는 영웅이 맞았을 것이다. 강간당할 뻔한 자신을.
참혹한 환경에 처해진 자신을 슈퍼맨처럼 구해낸 브이. 그녀는 전적으로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브이의 집은 이비에게 말 그대로 "너무나
아름답고 안전한 곳"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곳을 갈망하고 꿈꾸기 마련이다. 최초의 이비가 살았던 영국의 감시사회보다 브이의 하우스가 좀
더 자유롭고 낭만 한 방울이 남아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나 브이는 좀 더 다른 목적이 이비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깨어나라고 이비를 채찍질하던 브이의 모습. 이비를 가두어 고문하고
신념을 깨우려 하는 그의 모습이 가장 불편하면서도 적나라하게 이 만화의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는 부분이라 불편했다. 사실 모든 권력은 이동한다.
우습게도 전혀 새롭고 혁명적인 모습을 띈 권력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은 닮아있다. 모든 권력은 닮아있기 마련이다.
이상해요. 난 이제 당신이 이 편지를 썼다는 것과 발레리의 모든 이야기를 알아요. 그렇지만 너무 설득력이 있어요. 난 그녀를 믿었어요.
그녀를 보지 않고, 난 그녀를 거의 사랑했어요....... 그렇지만 그녀는 실제로 그곳에 없었지요.<P.174>
고문실에서 휴지에 쓰여진 편지. 발레리의 편지에서 이비는 자신의 신념을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자신의 신념을, 마음속의 장미를 지키라
말했던 4번 방의 레즈비언 발레리. 그녀는 단순히 시뮬라크르에 불과한 것일까. 정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 자신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해서 브이는 이비를 고문해야 했을까. 이비를, 그렇게 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우매한 인물로 평가한 것은 누구일까.
발레리의 편지를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로맹가리의 단편이 생각났다.
매일 아침 슈츠부인은
싱그러운 꽃을 한 다발 들고 내려가 미스터 칼의 침대 머리맡에 놓는다. 그녀는 칼의 베개를 다독여
주고, 그를 도와 자세를 바꿔주고, 이제 스스로 숟가락질을 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은 그에게 음식을 먹여준다. 이제 칼은 겨우 일만 할 수 있을
정도다. 때때로 그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오르고, 두 부부와 인류 전체에게 품어온 자신의 믿음을 그토록 충실히 지켜준 선량한 이들의 얼굴을
감사에 찬 눈길로 바라본다. 자신의 신념이 옳았다는 만족감 속에서 그는 양손에 충직한 친구들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죽어가리라.
로맹가리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어떤
휴머니스트>
유대인이었던 칼은 믿음직한 자신의 친구에게 자신이 쌓아둔 부의 전부를 맡기고 지하실에 숨는다. 전쟁이 끝난 뒤의 세계를 상상하면서 매일
부부가 내려주는 음식을 받아먹으면서 백날 책으로만 인류애를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하고 책에만 묻혀서 산다. 그렇게 살다가 그의 인생을 끝을
고한다. 사실, 전쟁은 끝났다. 이미 오래전에. 그 사실을 모른 채 '충직하게'자신을 지켜준 부부에게 감사하면서 죽어간 칼은 아마 행복했을
것이다. 비록 사육당하고 있다고 하나. 그러나 혹시 그 지하실을 한 번이라도 뛰쳐나와봤다면 이미 평온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그런
가혹한 지하실이 아닌 곳에서 자신이 쌓아온 부를 누리면서 살 수 도 있었을 텐데 전쟁이라는 공포가 만들어 놓은 세계의 안에서는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맏이 한 것이다. 부부의 욕심이 만들어놓은 이곳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아가는 그를 누가 불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걸까.
전지전능한 독자의 입장에서, 미스터 칼을 공포에 질려서 받을 잠깐의 충격을 감안하고라도 더 새로운 세상을. 전쟁은 사실 이미 오래전에
끝이 났음을. 당신이 믿고 있던 세상은 사실 가짜였음을. 당신을 지켜주던 부부가 옭아매고 있었음을 알려줘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브이의 입장에서, 사실 현정권 독일의 공포는 당신의 정부가 당신을 감시하고 옭아매고 있는 것임을. 국가는 당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그것을 자각해야 함을 잠깐의 충격을 주어 알려줘야 했는가?
브이가 누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5번 방의 사나이였다는 것이다. 캠프에서 인간 실험체로 쓰였던 브이. 그 사나이는
살아남았지만 약물중독에 의해 어딘지 모르게 꼬였을 지도 모른다. 실험체였던 브이는 캠프에서 나와 캠프의 우두머리들을 하나하나 도륙한다.
나아가서는 자신을 그렇게 만들어버린 정부를 향해 칼날을 세운다.
브이는 난세의 영웅은 아니지만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던 영국 정권을 뒤흔들만한 능력을 가진 세력으로 자라났음은 분명하다. 또한 매우
똑똑한 방법으로 선동을 할 줄 아는 인물이다. 그는 이미 자신이 정권을 모두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있기에, 그 대신에 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대를 이어가기를 바라고 또한 훌륭한 방법으로 그 일을 성공해 냈다. 현 정권에 대립하는 하나의 권력으로서의 브이의 모습은 가히 선구자라고 할 만
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었으며, '피를 쓰는 방법'은 결코 마지막이 아름다울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혁명가이다.
침묵하는 대다수에 의존하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이비 고요함은 부서지기 쉬운 법이니까. 한 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면 고요함은
사라지지.<P.193>
무정부 체제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지. 하나는 창조자의 얼굴이고 또 하나는 파괴자의 얼굴이야. 그렇기 때문에 파괴자는 제국을
붕괴시키고 그 잔해 위에 깨끗한 캔버스를 만들어 창조자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도록 하는 거야. 한 번 붕괴되고 나면 더 이상의 잔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폭탄과는 안녕이야. 파괴자들과는 안녕이라고! 더 나은 세상에 그들이 있을 자리란
없지.<P.222>
브이는 자신 역시 파괴자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엔 자신이 있을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이비가 자신의 정신을 이어가 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비는 다시 브이가 되어 또 다른 브이가 돼 줄 누군가를 권력과 친하지만 아직은 '자신의 편'에 설 수 있는 유연함을 가진
자를 선택해 나가는 것을. 책의 내용은 불편하고 힘들지만 권력의 이동에 대하여. 확실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다.
이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감시사회에서 자유를 찾아가는 책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읽어 내려가는 편이 더 감동적이고 더 훌륭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나, 적어도 내가 이 책에서 읽어 낸 것들은 모든 권력들이 교체되는 곳에서 그 혼란 속에서 대비되어 있는
다른 권력은 결국 기존의 권력과 99%는 닮아있으며 1%의 상황이 새로운 혁명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어쩌면 책이 조금은 마음에 안 들어서
짧게 생각하고 내린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은, "A vacational viewpoint". 만일 창조주의 입장에서 인류를 고용한 직원으로 생각하고 직업적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당신이 이 사악한 무능력자들을 장려했으며, 이들은 당신의 일과 인생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지각없는 주문들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당신의 일터를 위협하고 증명되지 않은 기계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P.111>
사실 처음에 읽을때는 인물의 얼굴도 구분이 안가서 계속 흐름을 놓쳤다. 내가 난독증이었다니..ㅠㅠ 이해력이 부족한 것이었을까. 책에
빼곡히 챕터명을 써가면서 사람의 이름을 적어가며 봐야했다..ㅠㅠㅠ 책은 재밌는데 누가하는말인지 대사가 너무꼬여...ㅋㅋㅋ
모든 챕터의 제목을 V로 채우고, 브이가 자신을 설명해 나갈 때의 V로 된 단어들의 나열은 너무나 유명하다. 혹시 나중에 이 책이
생각난다면 영문판으로 읽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얼마나 많은 단어들을 그렇게 짜 맞춰 나갔을까. 영화 보는 것을 즐기진 않지만, 혹시나 이 영화를
보게 된다면 자막 없이 집중해서 봐 보고 싶다. 물론 그럴 정도로 언어능력이 훌륭하진 않아서 많이 힘들겠지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