굉장히 매력적인 책 한 권을 찾아서, 일주일이 지루하지 않았다. 부조리, 실존주의..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하기 힘든 책. 쉽게 이야기하면 꼭
모래처럼 바스러져 버릴 거 같아서 할 말들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거 같다. <모래의 여자>는 그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나의 이름은 제일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는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이 사람의 이름은 실종신고 서로 공개될 뿐. 책 속에서의 주인공은 <손님>이다. 막막한 사막에서 그는 손님이었다.
8월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 되었다. 휴가를 이용하여 기차를 타면
반나절 정도 걸리는 해안으로 떠난 채 소식이 끊어진 것이다. 수색 신청서도 신문 광고도 모두 헛수고였다.... 이렇게 하여 아무도 그가 실종된
진정한 이유를 모르는 채 7년이 지나, 민법 30조에 의해 끝내 사망으로 인정되고 말았다.
<시작>
곤충 채집을 하기 위해, 쳇바퀴의 일상에서 휴가를 내고 사막으로 훌쩍
떠난 남자는 사막의 한마을에 민가에서 머물게 된다. 사구가 형성된 곳에 있는 민가. 사람들은 '할머니'의 집이라고 했지만 의외로 삼십 대의
과부가 살고 있었다. 수줍은 여인네는 어쩐지 상기되어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곤충 채집을 하러 갈
것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 사막 한가운데 그 집에 갇혀버린 것이다.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야 하는 집. 하루라도 게을러지면 조금씩 파묻히는
모래. 탈출을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점차 익숙해져 가는 나. 그 모든 것들이 부조리한 이곳에서 나는 마침내 적응해 간다. 일련의
과정들. 삶의 부조리함이 어떤 식으로 잠식해 나가는지, 얼마나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적응을 해내는 것인지. 그리고 마침내는 부조리함과 합의를 보게 되는 것인지...
<이방인>의 뫼르소가, <변신>의 그레고리가
그랬듯. 나 역시도 그냥 이 상황에서 할 일을 할 뿐이다. 물론 조금의 저항을 하긴 했지만. 결국 할 일을 한다. 사막의 모래는 더 이상 모래가
아니다. 서 있는 곳에서부터 나락으로 나락으로 몰고 가는 그 모래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 모래의 여자는 만만치 않은
책이었다.
남자의 목적은 모래땅에 사는 곤충을 채집하는 것이었다. 물론 모래땅에
사는 곤충은 몸집도 작고 색도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웬만한 마니아가 되면 나비나 잠자리쯤은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그들 마니아들이
노리는 것은, 자기의 표본 상자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일도 아니고 분류학적 관심도 아니고 물론 한방 약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곤충 채집에는 훨씬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있다. 새로운 종을 발견하는 것이다. 신종 하나만 발견하면, 긴 라틴어 학명과 함께 자기 이름도 곤충도감에 기록되어
거의 반영구적으로 보존된다. 비록 곤충이란 형태를 빌려서 이기는 하나 오래도록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다면, 노력한 보람도 있는
셈이다<P.15>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살아가는 것일까. 쳇바퀴를 굴리듯 천천히 굴려가는
생에서 어떤 것을 발견해야 하는 것일까. 나 역시 제라늄을 키우면서 가장 원하는 것은 나만의 변종이다. 나의 이름을 붙인 꽃 한 송이를 위해서
공부도 하고, 벌이되어 이 꽃 저 꽃을 옮겨 씨앗을 만들어 다시 심고. 그런 노력을 해나간다. 이것저것 모으던 취미에서 점차 나만의 새로운 종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더 소박하고 직접적인 기쁨이 되는 것이다. 아마 이 책의 남자 역시 쳇바퀴 돌던 삶에서 벗어나 작은 만족을 위해서, 작은
기억을 남기기 위해서 사막으로 떠났을 것이다. 구덩이에 갇혀서 탈출을 시도하는 동안에도 남자는 일상으로 돌아가면 이 모든 것들이 작은 추억한
조각이 될 것이라고, 작은 추억일 뿐이라고 되뇌곤 했다.
막상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이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 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
<P.153>
부조리하다고 생각했던 구덩이에서 모래를 파내는 일. 남자는 그 사막에서의
갈증을 못 이겨서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일을 시작하고 나니 생각보다 덜한 저항감. 왠지 읽는 내내 배경은 사막인데 자판기
앞의 현대인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내가 하는 노동의 강도가 과연 나의 연봉에 맞는 건지, 끊임없이 비견 해보면서도 결국엔 자판 앞을 떠나지
못한다. 마침내 참을 수 없어 폭발하는 순간에도 결국은 다른 회사를 구하기 전까지는 직전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자판기 앞에서 모래 퍼내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갈증을 못 이겨서 옮겨 갈 생각은 하지만 저항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인간이 기댈 언덕 같은 게 정말 있는
모양이다.
탈출을 시도했던 남자는 끝내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그 사막 한가운데서
사구에 파묻혀 이름 없이 죽어가는 것을 마을 사람들은 보란 듯이 살려내어 다시 그 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남자는 이름이 없다.
사형수보다 못한 것. 왜 이렇게 불공평한 것일까. 목놓아 울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갑갑함. 이름조차 남지 않는 사람... 다시 모래 속으로
돌아가자.
<모래의 여자>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의 삶. 그 삶 역시
찬찬히 살펴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지만 여자는 너무 평온하다. 삶에 보란 듯이 순응해 버린 여인. 저항할 생각조차 없이, 하루하루 모래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밖으로 나가면 달라질 것은 없다. 그저 나의 삶에서, 작은 삶에서 남자 하나가 더 늘어나 내 노동을 조금 덜고 남자의
몸을 정성스레 닦아내어주는 정도의 소일거리가 추가되는 정도. 그런 작은 정도의 삶의 변화만 있으면 된다.
책은 순식간에 읽혀나갔다. 너무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감금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남자가 그 부조리를 탈출하기를 바라면서, 여자의 답답함에 치를 떨면서 왜 같이 나가려 하지 않는지 채찍질해가면서
읽어나갔다. 하지만, 페이지가 줄수록 끝으로 치달을수록, 그 특유의 허무함이 묻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럴 줄 알았지.
딱히 서둘러 도망칠 필요는 없다. 지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왕복 표는
목적지도 돌아갈 곳도, 본인이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는 공백이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유수 장치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욕망으로
터질듯하다. 털어놓는다면, 이 부락 사람들만큼 좋은 청중은 없다. 오늘이 아니면, 아마 내일, 남자는 누군가를 붙들고 털어놓고 있을
것이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마지막>
혹시 나의 삶도 모래 구덩이 어딘가에 묻혀있는 건 아닐까.
가만히 있는듯하지만 바람의 물결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래를 쫓아서, 매일 내일은 또 퍼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일을 반복하는 나의
생도, 모래 구덩이 어딘가에 물관을 간직한 채로 계속 퍼내 여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묻는다.
퍼낸 모래는 어디로
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