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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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날 갑자기 필연적으로 바뀔수 없는 생득적인 부분에 대해 부정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가령 아직 어린 아이가 생물학적 시간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던가, 여자의 몸으로 태어났지만, 남자가 되고 싶다던가하는 주어진 시간 혹은 주어진 육신이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원하게 된다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것에 대해 부정하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가 <채식주의자>의 줄거리 일 것 이다.

안타깝게도 현대 의학으로는 바꿀 수 없는 (어쩌면 그래서 정신병이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그녀가 되고 싶어한 것은 '나무'였다. 아니, 되고싶어 했다기 보다는 어느 시점부터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리뷰에는 줄거리아닌 줄거리들이 포함되어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이 부담없이 함께 생각해 줬으면 하고 적어내는 리뷰이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미묘한 신경전이라고 할까. 사실 채식주의자를 읽어보라 주변에서 권한 사람은 많았지만 읽기까지는 시간이 꽤나 오래 걸렸다. 소설 속 <몽고반점>이야기의 J처럼, 아직 깨야할 것들이 많은 자에게는 너무나도 더러운 소설일 수도있고 혹은 자신이 '깨어졌다고 믿는 자'에게는 하나의 예술 일수도있고. 책의 예술성이라는 것은 시간에 따라 시대에 따라 너무나도 확연히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 이해 못하는 거 아니니까 나한테 옹졸한놈이라고 욕하지 말아요. 내가,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온건한 사람이라는 걸 오늘 알았어요. 호기심때문에 하겠다고 하긴 했지만 감당하기 힘들군요. 그만큼 더 깨져야 할 부분이 있다는 거겠지만...... 일단은 시간이 필요해요<P.130>

그녀는 왜 그토록 갑자기 나무가 되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평범하다고 느껴졌던 그녀가 지독한 꿈을 꾼 뒤부터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로부터 모든 것들이 변해버린 것이다. 아주 어린시절 느꼈던 잔혹함이 어느날 갑자기 살아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내재 되어있다가 터져나온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지않는다. 의식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알수없는 답답함 때문이다. 주변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답답함. 어쩌면 어린시절 자신을 물었다는 이유로 오토바이에 메여 동네를 돌다가 죽은 개 한마리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그 이유역시 그녀의 꿈 만큼이나, 그리고 그녀의 속마음 만큼이나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녀 조차도.

무엇 때문일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내가 뭔가의 뒤편으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손잡이가 없는 문 뒤에 갇힌 것 같아.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여기 있었던 걸 이제야 갑자기 알게 된 걸까. 어두워. 모든 것이 캄캄하게 뭉개어져 있어. <P.37>

평범한 채식주의선언에서 시작했던 작은 일은 결국 그녀와 그를 이혼하게 만들고, 그녀를 정신병원에 가뒀다. 병원에 갇혔던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동료가 사람이 아닌 나무들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유난히 말이없는 영혜는 사실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간의 언어보다는 그들의 동료인 나무들의 언어를 습득했을 것이다. 마지막 단편에서 물구나무를 서 있는 그녀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얼굴이 터질듯한 표정의 30Kg정도 나가는 그녀가 악독하게 물구나무를 서있는 장면이.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처럼 손에서부터 뿌리가나오고 다리에서 잎이 나와 마침내는 온전히 그녀의 동료들과 같아질 것이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현대의 의술은 말한다. 그녀는 정신병이라고. 그녀가 먹지 않으면 수일 내에 죽을 것이며, 이런식의 음식 거부는 처음보았노라고. 그녀는 말한다. 나의 위장이 이제는 퇴화되어 버렸다고 의사가 말하지 않았느냐고. 이대로면 자신은 나무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필요한 것은 몇 모금의 미음이 아니라 햇빛과 빗줄기라고.

죽음은, 삶의 뒷편으로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다. 삶의 뒤에 생물학적으로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는 숨이 멎은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직은 미지한 곳이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삶에 집착한다. 그 삶이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연명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저 단순히 어떤 계기에 의해서 미쳐버린 한 여인의 삶이 그 여인의 입장에서 그려진 그리고 그 주변인들의 관찰에서 그려진 부분들을 읽고 있노라니 문득, 영혜의 정신병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그녀는 그냥 나무가 되고 싶었을 뿐이다. 삶에대한 집착이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 대신, 동물대신 선택한 다른 동료들이 가르쳐준 것일 수도있겠지.

난 몰랐거든. 나무들이 똑바로 서 있다고만 생각했는데......이제야 알게 됐어.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거더라구. 봐, 저거봐, 놀랍지 않아? (...)어떻게 내가 알게 됐는지 알아? 꿈에 말이야, 내가 물구나무 서 있었는데......내 몸에서 잎사기ㅜ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P.180>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심기를 건드린 것은 <몽고반점>이라는 단편이다. 영혜의 형부가 예술을 한답시고 영혜를 탐하게 되는 그 스토리. 나체에 꽃잎을 그리고, 마치 식물이 된 듯한 비쥬얼로 시선을 속이고 벌어지는 그 단편에서는 사실 등장인물들을 이해하기 너무어려웠다. 한참 뒤에야, 나는 책과 합의를 보았다. 영혜는 형부가 그려준 그림처럼 몸에서 꽃이 돋아나고 나무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리고는 잔혹한 꿈을 꾸지 않았고 마침내는 정말 나무가 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그리고 그는 특유의 예술적 감각으로 그녀가 본인이 상상했던 이미지에 가장 잘 맞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나무'라는 것을 본인이 인지했든 아니든 의식에 어디에선가 인정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혜는 나무였더라도 그는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욕망에 사로잡힌. 그래서 이 단편이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약간 멍이 든 듯도 한, 연한 초록빛의, 분명한 몽고반점이었다. 그것이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는 것을, 뜻밖에도 성적이 느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식물적인 무엇으로 느껴진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P.101>

고집스럽게도 나는 책의 해설을 읽는 것을 하지 않는다. 책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아서 가끔은 불쾌할 때도 있다. 꼼꼼히 책을 읽어 소화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책의 다른면을 본 나를 위한 변명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구경하러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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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류재화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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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다 고만고만하죠." 난 대화에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사실 더 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불행한 가족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죠."그 뭐시기씨가 갑자기 나를 묘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순간 나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랐다.<P.186>

이 장면을 상상해보면 지금도 웃음이 든다. 나만 알 것이라는 문장을 들이밀었는데 묘한 공기의 변화와 함께 어 나도 이걸 알아하고 받아치는 한 사람. 아마 나였다면 저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이 책을 쓴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사실 이 책은 블로그 이웃분들이 내가 아주 좋아할 것 같다면서 권한 책이다. 벌써 삼독을 했다. 고슴도치의 우아함. 간극에 서있는 사람들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처럼, 제목의 아이러니에서부터 사실 심상치 않겠다는 생각은 했다.

 

- 고슴도치 그리고 우아함.

모든 아이러니는 어느 고급아파트에서 시작된다. '고슴도치'와 '우아함'의 간극처럼 뚱뚱하고 가방끈 짧은 오십살의 수위 그러나, 그녀는 사실 철학과 특히 미학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그저 평범한, 낮은 수위로 살기를 원한다. 그 부잣집 맨션에서 사는 외교관의 딸인 팔로마는 열한 살이다. 그녀는 아주 똑똑하다. 그래서 세상은 시시하다. 하지만 평범하게 보이는 것이 살기 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의 목표가 없다면 아파트에 불을 지르고 세상을 마감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아파트에는 새로운 사람이 이사를 들어온다.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일본인 부자 오즈씨. 세 사람은 각각의 이유로 고슴도치가 되었고 그 속에는 아주 우아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는 순간, 순간을 지나가면서 문장을 만들어 낸다. 사실 책을 읽어가면서 줄거리가 없어도 읽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책의 내용은 사색이 깊었다.

 

- 미셸

그녀의 가족은, 죽은 자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가난한 그녀의 집안은 부잣집에 이겨지고 무시당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녀의 언니는 아름다웠지만 가난했고, 그녀는 똑똑했지만 아름답지 못하고 가난했다. 모든 것은 시작점부터가 다른 세상이었다. 그녀는 사람보다는 책과 지식을 택했었다.

미셸 부인에겐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있다. 겉은 진짜 철옹성 같은 가시로 뒤덥혀있지만, 안은 부드럽고 섬세하다. 무딘 듯 하나 무디지 않고 몹시도 고독하고 더없이 우아한 작은 짐승, 고슴도치처럼.<P.200>

그녀의 내면의 우아함을 알아본 사람들은 몇 명 있었다. 그것이 쓸모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남겨두도록 하자. 아무튼 그녀는 비범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내면에 자리 잡은 현자는 '미학'을 사랑하는 누군가인듯했다.

절의 이끼 위에 핀 동백, 교토산의 자줏빛, 푸른 도자기 찻잔, 덧없는 정열 한 가운데 순수하게 피는 아름다움. 우리 모두가 바라는게 그런 것 아닐까? 우리는, 서양 문명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는걸까?

생의 움직임 속에 영원을 응시하는 것. <P.137>

글의 모티브중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동백을 택했다는 것 자체가 글쓴이는 동양적인 정신을 흠모하거나, 아주 많이 이해하고 있을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게했다. 그것이 너무 강해서 때로는 읽기가 거북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동백은 본디 외로운 꽃이다. 늦겨울 봄을 부르는 꽃이다. 꽃이 피기는 괴로운 시기 홀로 피어 떨어지고, 그 꽃은 바닥에서부터 핀다. 꽃째 떨어진 동백은 꽃째 죽는다. 사실 소설에서 말하는 일본 영화는 어떤 영화인지 알 수없으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동백의 이미지가 너무 새겨져서 힘들었다.

 

흰 동백. 그녀의 삶은 한없이 떨어지는 동백이었다.

 

- 팔로마

그녀는 윤택함이 정해져있는 소녀다. 사실 문학적 설정이긴 하겠지만, 영악한 이 소녀는 모든 일의 개인 심판관이 되어 세상을 본다. 그녀의 삶이 재미가 없었던 건 미래가 보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주변인들을 보며 그의 미래를 점치고, 혹은 그의 성격을 되씹으면서 참 재미없는 세상임을 느꼈지만, 그녀는 그녀에게 '거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느꼈다. 어린 자신을 어린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은 사람. 그녀보다 더 깊이 있는 무언가가 있는 사람. 놀랍게도 그 우정은 오십살의 나이를 뛰어넘어 발현되었다. 자신의 집 주위에게서.

아빠는 매일 아침 여섯시면 일어나서 아주 진한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는다. 이런식으로 아빠는 매일 자신을 건설해나간다. '자신을 건설해나간다'라고 한 것은 밤 동안 모든게 재로 변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하는데, 그게 일종의 새로운 건설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서 인간의 삶은 이런식이다. 끊임없이 어른으로서의 정체성을 재건해야 한다. 허술하고 덧없고 너무나 허약하며 절망이라는 옷을 입고 있는 정체성을.<P.126>

새로운 것을 건설하면서 죽는 것이 소원이었던 그녀를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게 만든 것 역시 미셸이었다. 어린 나이의 사춘기 소녀에게 멘토를 만난다는 것은, 더구나 아주 강력한 조력자를 만난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의 결말에서 가장 큰 상실감을 안게 된 여인 역시 그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작은 미셸이었다.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미셸. 책을 읽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시각으로 미셸과 팔로마는 삶을 바라본다.

예쁜장미. 그리고 낙화. (...)그것은 시간과 장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스쳐가는 바로 그 순간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들이 아주 찰나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아름다움과 죽음을 동시에 본다.<P.384>

특히나 이 책은 미학에 대하여 아주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아마 대부분의 말에 공감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겠지만 사실 '이 정도는 알고 읽어라'라는 느낌의 책이라서 거부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언가를 꼬집는 책은 불편하다.

문법을 안다는 것은 언어의 껍질을 벗기는 것, 언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보는 것, 그러니까 어떤의미로는 완전히 벗은 언어를 보는 것이다.<P.219>

- 그리고, 오즈

신데렐라콤플렉스. 사실 이 책의 결말이 아니었다면 드라마로 제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같은 영혼의 주파수를 가진 미셸과 오즈는 현대판 신분(수위와 부호라는)을 뛰어넘는 영혼의 교류를 이어갔을 것이다. 너무 닮았던 둘은 너무 늦게 만났다.

러시아문학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 조금 더 빨리 만날 수 있었더라면 아마도 그녀는 조금 더 빨리 껍질을 벗어던지고 지적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책 속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이 있다면, 작가가 어느 나라사람인지 알지 못한 채, 맹목적인 동양의 정신에 대한 찬양과 이해할 수없는 포인트를 비집고 들어오는 일본 문화들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오즈가 초대한 저녁식사에 온 미셸이 화장실에 들른 그 장면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미쳤거나 하늘나라에 갔다고 믿었다. 지금까지 불명확했던 소리가 점점 더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소리는 모짜르트 같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 <콘푸타티스>. (악인들을 쳐부수어 화염속에 던지시고!) (...) 우린 사슬에서 풀려난 듯 폐에서 터져나오는 푸흐흐흐 소리를 내뿜으며 서로를 쳐다봤다. 좀 진정되면 우리는 다시 서로를 쳐다보았고, 또 한무더기의 푸흐흐를

화장실에서 아주 장엄한 레퀴엠을 들어야 했던 미셸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리고, 그 화장실 문앞에서 당황해하는 미셸보다 더 당황해서 서있을 오즈를 생각하며 나도 함께 미묘한 두 사람의 경계가 무너짐을 느낀 이 순간. 사실 이 장면이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애정이가고 사랑스러운 순간이었다. 레퀴엠을 몰라서 두번째 읽을땐 찾아 들어보았는데, 세상에 이 음악이 나오는 화장실이라니...

책은 잰척하는 사춘기 소녀와 너무 많은 것을 숨긴채 안주하는 수위, 노년을 즐기는 한 남성의 이야기라고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안에서 분명한 것은 적어도 나랑 비슷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 누군가를 만났다는 것이다. 유독 고전읽기를 좋아하는 것도, 고집이 센것도 자기방어안에 가두고 사는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늘어놓는 방식이 비슷한 책. 그래서 친근하면서도 연민이 드는 누군가. 전혀 다른 책인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생각나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튼 오랜만에 유쾌하지만 유쾌하지 못한 책을 만났다.

그래서, 이 책을 추천해주신 분께 감사하다.

나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임무를 찾기 위해 우리는 태어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것ㄹ을 완수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찾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신성한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 것. 그럴때만이 죽음이 우릴 데려가는 순간에도 건설적인 어떤 것을 한다고 느낄 수 있다. 자유, 결정, 의지 이런 것들은 모두 공상이다. 우린 벌들의 운명을 공유하지 않고도 꿀을 만들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우리 역시 임무를 완수한 후 죽을수밖에 없는 불쌍한 꿀벌일 뿐이다. <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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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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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만약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에서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해야 할까?"

형벌을 받을 일도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둘 다 하지 않을 것 같다. 읽기와 쓰기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같이 붙어 다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을 시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둘 다 할 수 없다면, 둘 다 하지 않아야 덜 괴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영하의 <읽다>의 끝맺음에 나와 있는 물음이다.

사람은 왜 읽으려고 하는가.

주변 사람들이 가끔 왜 책을 읽냐는 질문을 하면, 그냥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한다. 딱히 더 덧붙일 설명도 없거니와 그 이외의 대답 거리도 없다. 꽃을 키우는 이유도 이것저것 배우는 이유도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짓이 가장 재밌기 때문"이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입니다. (...)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P.31>

 

김영하의 <읽다>는 말 그대로 읽는 이유에 대해서 여섯 개의 주제로 풀어나가는 책이다. 주변에서 추천을 엄청 했었는데, 이 짧은 책을 고집이 센 난 이제야 구미가 당겨읽었다. 대화체로 된 모든 인문서적들이 그렇듯 직접 강의 현장에서 만나서 듣는 생동감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꽤나 자신의 입지를 가진 현시대의 작가가 건네는 말은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바람 앞에 등불인 나는 내가 없는 책 속에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흔들릴 뿐이다.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P.67>

참 신기한 일이다. 책 속에는 내가 없지만, 읽고 나면 어느새 일부분이 되어있는 경험. 아마 많은 독자들이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강렬한 느낌으로 남는 책들. 그런 책들의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 나는 글도 쓰고 독서모임도 하고 한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일은 고맙게도 아주 쉽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이유를 본인의 책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책들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야기꾼은 어딜 가도 태가난다고 해야 할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장르의 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화자는 울지 않는데 괜히 눈물이 나고 화자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은 책들이 좋다고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좀 더 멋진 말로 이야기한 문장이 있어 옮겨 적어본다.

내가 볼 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바로 無에 관한 한 권의 책, 외부 세계와 접착점이 없는 한 권의 책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P.95> - 김화영의 말

프랑스 소설 번역의 독재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정도로 유명한 김화영 교수의 말. 저 말에서 한참을 멈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하얀 종이 위의 까만 글씨에서 강렬한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저 책이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제가 아주 흔했거나 혹은 아주 평범한 책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끊임없이 읽는 법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추천해 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김영하의 책들을 유명하다는 책들은 거의 읽었고, 이 책에 나오는 책들의 제목은 다 알고 있지만 놀랍게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주제 사라마구의<눈먼 자들의 도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은 단편만을 기억하거나 제목으로 압축해버린(내용을 전부모르는) 그저 읽고 기억 어딘가에 버려버린 책 들이었다. 책이 소모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안에 남나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P. 105>

멋진 말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산문이 세트 집이라는데 나머지 책들도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우주에 대한 이야기들. 멋지게 포장해서 이야기할 줄은 알지만 내면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길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소설 속 미치광이나 괴물에 대해 열광을 하는가. 혹시 나도 마음 한편에 어떤 괴물이 자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순간에도.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롤리타>를 계속 읽어나가는 독자는 하는 수없이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과 작품에 대한 호감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P.125>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다행히도 이런 작품들은 세계명작 혹은 고전으로 불리고, 아름답고 우아한 장정으로 제책되어, 근엄한 교수님의 해설을 달고 우리 책꽂이에 꽂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P.138>

책과의 대화를 즐기기엔 사실 소설보다는 산문이, 특히나 강의록이나 연설집이 더욱 용이하다. 몇 장을 넘기다 보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한동안 이런 장르의 책은 읽지 않겠지만 그래도 꽤나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책이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사실 제목으로만 기억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읽는가에 대한 물음. 사실은 다들 각자의 이유를 알고 있지만, 애매했던 그 이유들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 추천해줘야지.

참, 책을 읽고 나니 보르헤스가 또 당긴다. 무턱대고 질러두었던 전집. 다시 한번 펼쳐봐야겠다.

고대그리스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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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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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무식하게' 읽고 싶은 날이 있다. 특히나 더운 날이 계속 될 때, 어디 시원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시간 가는지 모르고 읽고싶은 날이 있다. 시원한 만화카페에 배를 깔고 누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책, 다른 사람들과 여행기간이 겹쳐서 끔찍한 교통체증을 느끼면서도 그저 즐겁게 읽었던 책들. 그렇게 숨가쁘게 읽기에는 사실 번역서 보다는 한국작가의 책이 최고다. 특히나 공포심이나 추리처럼 심리의 밑바닥을 긁어 내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산다. 각자의 삶에서 제각각 별짓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우발적으로, 분노로, 혹은 재미로. 그게 인생이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나이고 상대가 어머니라는 상황은 '생각'에 포함시켜보지 않았다.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은 정말 아끼고아껴둔 책이다. 버릇이라고 할 수도있겠지만 이슈가 된 책들은 가급적이면 그 이슈를 피해서 읽는 편이다. 많은 분들의 리뷰도있었고, 꽤나 이슈도 되었던 책. 그러나 너무 더워서 찾아들어간 만화카페에서 무심하게 꽂혀있는 책을 곁눈질로 집어들곤 세시간에 걸쳐 읽고, 리뷰를 남기기까지. 시간의 흐름이 아까울 만큼 재미있었다. 단순한 재미만 남긴 책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혹시 심리소설 추리소설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 생겼다.


악惡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 되는가.

심연에서 건져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이 책의 뒷면의 책소개 카피. 정말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있는 어두운 본성. 인간의 본성에 선이 있다면, 악 또한 존재하고 있으리라. 이 책은 그 근원적인 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존재로서의 악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악의 활동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싸우는 상대가 괴물이라면, 아주 조심해야한다. 자기 자신도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심연 역시 그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니체/선악을 넘어서)


소설의 플롯은 간결히 정리 될 수 있으나, 혹시나 읽기전에 리뷰를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은 읽어보지 않기를 권한다. 사실 이 책의 묘미는 범인이 누구냐에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 재미를 찾을 누군가를 위하여.


유진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몇 명이나. 흔한 연쇄살인범.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는 전혀 모르는 여성을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이모를 죽였지만 살아남았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면서, 나는 범인이 유진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래서 작은 단서 하나까지도 그가 아니길 바라면서 한참을 아주 한참을 찾았다. 간질환자였던 유진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있기를 바랬지만, 책은 아주 잔인하게도 유진을 '사이코패스'중에서도 최고 위에 있는 프레데터급의 '끝판왕'이라고 진단을 내려버리고 만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산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 206

소설의 반전이라면 아마도 반전이 없다는 것이 반전일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범인이오 하며 범인의 시점에서 쓰여진 책도 재미가 있을 수 있구나. 유진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이코패스의 잠재력을 가졌던 아이였다. 그 잠재력을 진단해 준것은 유진의 이모였고,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유진의 엄마는 그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주기만을 바랐다. 유진은 살아가는 동안 본인이 엄마가 만들어놓은 무대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량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일이니까."

(...)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데는 세가지 방식이 있데.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생동하는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번쨰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축복이라는 거지. 세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P. 331

해진은 유진보다 한 살많은 지혜로운 형이다. 그는 친 형은 아니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양아들로 받아들여진 형을 대신한 그늘이다. 소설에서 유진이 악의 캐릭터라면 자수성가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마지막까지도 자수를 권했던 해진은 선의 캐릭터 였을 것이다. 유진은 전직 수영선수였는데, 간질약으로 알고 복용했던 어떤류의 약을 끊으면 생겨나는 해방감으로 인해 연일 신기록을 세우던 유망주 였고 차후 그 일을 알게된 어머니와 이모로 인해 수영선수를 그만두게 되었다. '물'이라는 장치가 유독 이 소설속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엄청 매력적인 장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진(선)과 유진(악)은 함께 바닷가에 빠졌지만 마지막까지 살고자 발버둥치던 해진은 죽고, 유진은 살아 남았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P.67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리뷰를 남기는 것이 모호하다. 마음속에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남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보잘 것이 없고, 흔한 이야기이지만 강렬하게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고 줄거리가 아닌 이미지를 기억에 남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더운 여름에, 서늘한 마음으로 읽어보기 참 좋은 책.


아마도, 이 책의 리뷰가 올라갈 쯤이면 나는 어딘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겠지만 더운 여름에 시원한 어딘가에서 멍때릴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단 세 시간이면 읽어 내려온 다음 머릿 속에서 비워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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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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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목사는 어제 예배에 파수꾼을 세웠다. 그는 내게 파수꾼을 세워 주었어야 했다. 손을 잡아 이끌어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뎃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나가서 그들에게 그 모든 스물여섯 해는 누가 장난을 치기에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든 너무 긴 시간이라고 공표해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P.255>

나는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책 제목은 들어본 듯하지만...

이 책은 온전히 표지와, 번역자를 보고 선택한 책이다. 지난해부터 공진호라는 번역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아티초크출판 이라는 출판사의 여러 번역본들을 번역한 번역가. 자신의 변역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너무나 잘 알고, 망설임 없이 수정할 줄 아는 사람. 이 책의 저자는 올해 2월 18일 그녀는 삶을 마감했다. 혹자들은 말한다.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으로 이 책을 출간한 저의에 대해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책을 읽기 전엔 몰랐고, 그렇기에 리뷰 역시 담백하게 <앵무새 죽이기>의 전편도 속편도 아닌 <파수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글의 주인공은 진 루이즈 핀치. 미스 루이즈이다. 아버지 에티커스 핀치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삶의 멘토 삼아 살아가는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주된 책의 스토리이다.

루이즈는 '존경받을 만한' 가문에서 태어나 말괄량이 아가씨로 자랐다. 인종이나 가문에 대한 편견 없이 자란 그녀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뉴욕 생활을 하다가, 다시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 메이콤으로 휴가를 보내러 돌아와 그동안에 보지 못했던 자신 주변의 일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책은 격정적이지 않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점차 번화하면서 새로운 계층들이 생겨나는 모습들이. 그리고, 루이즈의 고민들에 비해서 책은 조용하고, 우아하다.


>> 편견. 그 안타까움에 대하여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P.372>

아버지 에티커스 핀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롤모델이었다. 답답한 집의 가풍을 이겨내게 해준 아버지.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완벽한' 아버지상이었지만, 그녀는 에티커스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순간에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일까?

26살의 진취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녀. 미스 루이스. 그녀에게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날아오는 물음이 꽂힌다. 과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문제가, 정말 진리인 것일까? 정말 맞는 것일까?

그녀는 혼란스럽다. 자신의 '법'이었던 아버지가, 메이콤마을의 모든 사람의 '법'이었던 아버지가 어쩌면 처음으로 그녀와 다른 생각을 한다. 그녀는 구역질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틀린 게 맞을까?

인종차별. 그녀에게 있어 분명 문제가 되는 일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녀의 혼란은 어쩌면 그녀의 출생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이콤에서 그녀는, 바지를 입고 다녀도 말괄량이 짓을 하고 다녀도, 심지어는 나체로 밤에 수영을 했다는 소문이 돌아도 '핀치' 집안이기에 모든 것이 괜찮을 수 있는 특권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1. 그녀는 그녀의 파수꾼(양심)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2. 그리고 파수꾼(양심)은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양면성이 있다. 아니 다면성을 가진다. 아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 그녀는 26년간 바라본 아버지에게서 낯섬을 느낀 것이다.

메이콤마을은 특이성을 가진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그녀는 그녀 인생의 친구로 그녀의 흑인유모를 꼽는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 멀리 있다. 그런데, 과연 그녀 진 루이스의 기억은 온전한 것일까? 정말, 어린 소녀의 눈에서처럼 메이콤마을은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마을이었던 걸까?

그녀는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는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는 한 쌍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고모는 그를 '쓰레기'집안에 '잘 정리된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고모는 옳지 못 했던 것일까?

파수꾼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비단 인종차별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흰색이냐, 검은색이냐를 떠나서 남부 사람이냐, 아니냐, 종교인이냐, 아니냐. 여자인가, 아닌가 심지어는 어떤 부모를 가졌는가까지. 실로 광범위한 곳에서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를 제쳐두고 사실 나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리뷰를 보고 나서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의 리뷰는 말한다. 이 책은 그리 좋은 책이 아니라고. <앵무새 죽이기>만을 권할 뿐이다. 아마도 나는 아직 그 책을 알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또 다른 편견을 경험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한 무리의 뒤떨어진 사람들을 한 종류의 문명에서 진보한 사람들 사이에 살게 할 때, 사회적 이상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적 있니?

변호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의 평등은, '좀 더 문명화 된 집단이 좀 더 문명화 된 번영으로 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표심'을 위해서 움직였던 것이다. 그가 신뢰하는 것은 미국의 헌법이었다. 미국의 헌법을 지키기에 아직 흑인들은 교육수준이 떨어져 있으며, 심지어 백인보다 인구가 많다. 읽으면서 지독한 파시즘이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루이즈가 조금 더 현명하게 아버지의 말을 받아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소설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 뉴욕과 메이콤.

뉴욕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버스 옆자리에 흑인이 타는 것과 백인이 타는 것은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 흑인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인가? 하지만 메이콤에서는, 흑인/백인이냐도 문제지만 그녀가 어떤 집안이었는지, 그녀의 친구는 누구인지,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는 마을이다. 이것은 정말 나쁠까?

<흑인/백인>차별에 대한 문제가 나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친숙한 그녀의 마을.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미스 루이즈를 말괄량이 소녀로 기억한다. 때론 '오랜 시간 겪어봄'이 낳는 편견에 대해서. 짧은 고민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변했다. 그녀는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뉴욕에 있는 동안 잊고 살았던 마을의 변하는 속도에 대해서. 그녀가 <가깝게 느꼈던>것과, 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의 삶>에 대해서. 그녀는 책에서 이야기한다. 언젠가 내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곳은 메이콤, 어딘가일 것이라고.

너는 그런 적 없어? 언제고 이 지방은 별개의 나라였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어? 정치적 결속은 어떻든지 간에, 그 자체의 국민을 가진, 나라 안에 속한 별개의 나라라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어? 놀랍도록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론 밤을 밝히는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명예가 공존하는 고도로 모순된 사회라는 느낌은? 수많은 서로 다른 이유들이 한 가지 명백한 이유로 수렴되는 전쟁은 일찍이 없었단다. 그들은 자기들의 독자성을 보존하려고 싸운 거야. 자기들의 정치적 독자성, 자기들의 개인적 독자성.<P. 276>

뉴욕과 메이콤에서 느끼는 루이즈의 감정들이, 개괄적으로 보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일 것이다. 한없이 가까운 사람들. 그래서 더 상처받고 더 순결하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는 메이콤이 아니라 뉴욕에 있듯이.


>> "파수꾼"

조금은 특이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존경스러운 루이즈의 삼촌은 그녀에게 말한다. 파수꾼은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소싯적 돈을 벌어 말년을 문학에 바친 우스꽝스러운 노인네. 그녀는 핀치 가문에서 가장 이상하면서도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던 핀치 삼촌에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털어놓고 해답을 얻는 듯하다.

너는 색맹이야 진 루이즈, 그가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거야. 네가 보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오직 생김새나 지력, 인격 같은 것들에 있지 너는 한 번도 사람을 인종으로 보도록 부추김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종 문제가 현재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급한 사안인데도 아직까지 인종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어. <P.380>

많은 리뷰에서 <파수꾼>에 실망한 이유는 에티커스는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아직 앵무새죽이기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애티커스를 사랑한 이유는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이라 했다.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에. 물론 이 책에서의 에티커스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는 말 할 수없지만, <평등>에 대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동일한 느낌을 핀치 박사에게서도 받았고, 루이즈는 그녀의 평등과 아버지의 평등은 결코 같아질 수 없음을 이해한 듯했다.



>> 작가. 그 안타까움에 대하여

소설은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아니에르노는 "작품은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독립적인 어떤 것"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독자가 많을수록 책은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우습게도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하인드스토리를 보면, 심지어 <파수꾼>이 초고인데도, 독자들은 <앵무새죽이기>를 먼저 보고, <파수꾼>을 읽기를 권한다. 등장인물과 배경 모두가 합치되는 두 권의 소설이 왜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는 걸까? 왜 <파수꾼>은 <파수꾼>으로 바라봐지지 못하고 있는가?


헨리는 차분히 말했다.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 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 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거지.(....)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할 뿐이더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일정한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거 생각해 본 적있어?」P.325

책의 저자 하퍼 리는 안타깝게도 올해 2월 별이 되었다. 그녀에게 물을 수 없다는 소리다. 왜 그녀는 <앵무새죽이기>를 내고 오랜 시간 동안 원작인 <파수꾼>을 감춰 두어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녀의 건강이 쇠약해진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이 책을 꺼내놓아야 했는가. 해답은 아무도 내려줄 수 없다. 다만 두 권의 책으로 가늠해 볼 뿐이다. 이미 책은 그녀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말처럼 오랜 시간 에티커스의 진실을 사람들이 오해했을 수도 있고, 어떤 리뷰어의 말처럼 하퍼 리가 아닌 앵무새 죽이기를 제안한 편집자가 천재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어디에도 <파수꾼>에 대한 리뷰는 없다는 것이다.


혹시, 나처럼 미처 발견 못했을 당신들을 위하여, 메이콤은 겉표지 뒷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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