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다 (2015년판) - 김영하와 함께하는 여섯 날의 문학 탐사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만약 어떤 형벌을 받게 되어, 읽기와 쓰기 둘 중에서 하나만 해야 한다면 뭘 해야 할까?"

형벌을 받을 일도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는 둘 다 하지 않을 것 같다. 읽기와 쓰기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문제처럼 같이 붙어 다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어느 한쪽을 시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둘 다 할 수 없다면, 둘 다 하지 않아야 덜 괴롭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영하의 <읽다>의 끝맺음에 나와 있는 물음이다.

사람은 왜 읽으려고 하는가.

주변 사람들이 가끔 왜 책을 읽냐는 질문을 하면, 그냥 재미있어서라고 대답한다. 딱히 더 덧붙일 설명도 없거니와 그 이외의 대답 거리도 없다. 꽃을 키우는 이유도 이것저것 배우는 이유도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세상에서 제일 쓸 데 없는 짓이 가장 재밌기 때문"이다.

독서는 왜 하는가? 세상에는 많은 답이 나와 있습니다. 저 역시 여러 이유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독서는 우리 내면에서 자라나는 오만(휴브리스)과의 투쟁일 것입니다. (...) 독서는 우리가 굳건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흔들게 됩니다. 독자라는 존재는 독서라는 위험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 제 믿음을 흔들고자 하는 이들입니다.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교양인의 책 읽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독서는 자아를 분열시킨다. 즉 자아의 상당 부분이 독서와 함께 산산이 흩어진다. 이는 결코 슬퍼할 일이 아니다."<P.31>

 

김영하의 <읽다>는 말 그대로 읽는 이유에 대해서 여섯 개의 주제로 풀어나가는 책이다. 주변에서 추천을 엄청 했었는데, 이 짧은 책을 고집이 센 난 이제야 구미가 당겨읽었다. 대화체로 된 모든 인문서적들이 그렇듯 직접 강의 현장에서 만나서 듣는 생동감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꽤나 자신의 입지를 가진 현시대의 작가가 건네는 말은 매력적일 수 밖에 없다. 현실에서도 바람 앞에 등불인 나는 내가 없는 책 속에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흔들릴 뿐이다.

우리가 읽은 소설은 우리가 읽음으로써 비로소 우리의 일부가 됩니다. 한번 읽어버린 소설은 더 이상 우리 자신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나가사와의 말은 그런 면에서 일리가 있습니다. 같은 책을 읽었다는 것은 두 사람의 자아 안에 공유할 부분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P.67>

참 신기한 일이다. 책 속에는 내가 없지만, 읽고 나면 어느새 일부분이 되어있는 경험. 아마 많은 독자들이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주 강렬한 느낌으로 남는 책들. 그런 책들의 느낌을 공유하고 싶어서 나는 글도 쓰고 독서모임도 하고 한다. 나와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일은 고맙게도 아주 쉽다. 김영하 작가는 이 책에서 책을 읽는 이유를 본인의 책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책들에 빗대어 설명한다. 이야기꾼은 어딜 가도 태가난다고 해야 할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장르의 책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화자는 울지 않는데 괜히 눈물이 나고 화자는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은 책들이 좋다고 대답을 했었다. 그런데, 좀 더 멋진 말로 이야기한 문장이 있어 옮겨 적어본다.

내가 볼 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은 내가 실천에 옮겨보고 싶은 바로 無에 관한 한 권의 책, 외부 세계와 접착점이 없는 한 권의 책이다. 마치 이 지구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고도 공중에 떠 있듯이 오직 스타일의 내적인 힘만으로 저 혼자 지탱되는 한 권의 책, 거의 아무런 주제도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한 권의 책 말이다. <P.95> - 김화영의 말

프랑스 소설 번역의 독재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 정도로 유명한 김화영 교수의 말. 저 말에서 한참을 멈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그저 하얀 종이 위의 까만 글씨에서 강렬한 무언가를 얻기 위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저 책이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주제가 아주 흔했거나 혹은 아주 평범한 책들을 더 사랑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책은 끊임없이 읽는 법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이 왜 이 책을 추천해 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김영하의 책들을 유명하다는 책들은 거의 읽었고, 이 책에 나오는 책들의 제목은 다 알고 있지만 놀랍게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주제 사라마구의<눈먼 자들의 도시>를 제외한 모든 책들은 단편만을 기억하거나 제목으로 압축해버린(내용을 전부모르는) 그저 읽고 기억 어딘가에 버려버린 책 들이었다. 책이 소모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그런 몰개성적 존재로 환원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안에 남나의 작은 우주를 건설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우주가 빛나는 별과 행성, 블랙홀 등으로 구성되어있다면, 크레페케이크를 닮은 우리의 작은 우주는 우리가 읽은 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것들이 조용히 우리 안에서 빛날 때, 우리는 인간을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와 맞설 존엄성과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P. 105>

멋진 말로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산문이 세트 집이라는데 나머지 책들도 읽어볼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어디선가 주워들은 소우주에 대한 이야기들. 멋지게 포장해서 이야기할 줄은 알지만 내면을 담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이길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소설 속 미치광이나 괴물에 대해 열광을 하는가. 혹시 나도 마음 한편에 어떤 괴물이 자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순간에도.

윤리적 판결과 별개로 작품의 매력이라는 다른 차원이 존재합니다. 주인공이 치료가 필요한 변태성욕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롤리타>가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롤리타>를 계속 읽어나가는 독자는 하는 수없이 주인공에 대한 혐오감과 작품에 대한 호감을 조화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P.125>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도덕하거나 사회적 통념과는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의 이야기에 나는 왜 매력을 느끼는가? 나는 괴물인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혹시 나는 너무 어두운 심연을 지나치게 오래 들여다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내가 이런 이야기에 매혹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인가?(...)다행히도 이런 작품들은 세계명작 혹은 고전으로 불리고, 아름답고 우아한 장정으로 제책되어, 근엄한 교수님의 해설을 달고 우리 책꽂이에 꽂혀 우리를 안심시킵니다.<P.138>

책과의 대화를 즐기기엔 사실 소설보다는 산문이, 특히나 강의록이나 연설집이 더욱 용이하다. 몇 장을 넘기다 보면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있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한동안 이런 장르의 책은 읽지 않겠지만 그래도 꽤나 오랫동안 기억할 만한 책이다.

김영하 작가의 소설은 사실 제목으로만 기억되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되면 이 사람의 책을 다시 한번 읽어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왜 읽는가에 대한 물음. 사실은 다들 각자의 이유를 알고 있지만, 애매했던 그 이유들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나도 이제 다른 사람들한테 추천해줘야지.

참, 책을 읽고 나니 보르헤스가 또 당긴다. 무턱대고 질러두었던 전집. 다시 한번 펼쳐봐야겠다.

고대그리스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인간의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 드러나는데, 우리는 아직 충분한 시련을 겪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이 우리 자신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는 유일한 가능성은 아닐겁니다. 그러나 그 중 하나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새로운 괴물을 만나기 위해 책장을 펼칩니다.<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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