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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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목사는 어제 예배에 파수꾼을 세웠다. 그는 내게 파수꾼을 세워 주었어야 했다. 손을 잡아 이끌어주고, 매 정시마다 보이는 것을 공표해주는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것을 의미한다고. 가운뎃 줄을 긋고 한쪽에는 이런 정의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저런 정의가 있다고. 그 차이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해 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나가서 그들에게 그 모든 스물여섯 해는 누가 장난을 치기에는, 그게 얼마나 재미있든 너무 긴 시간이라고 공표해줄 파수꾼이 나는 필요하다. <P.255>

나는 <앵무새 죽이기>를 읽어본 적이 없다. 책 제목은 들어본 듯하지만...

이 책은 온전히 표지와, 번역자를 보고 선택한 책이다. 지난해부터 공진호라는 번역가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아티초크출판 이라는 출판사의 여러 번역본들을 번역한 번역가. 자신의 변역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를 너무나 잘 알고, 망설임 없이 수정할 줄 아는 사람. 이 책의 저자는 올해 2월 18일 그녀는 삶을 마감했다. 혹자들은 말한다. <앵무새 죽이기>의 속편으로 이 책을 출간한 저의에 대해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나는 책을 읽기 전엔 몰랐고, 그렇기에 리뷰 역시 담백하게 <앵무새 죽이기>의 전편도 속편도 아닌 <파수꾼>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글의 주인공은 진 루이즈 핀치. 미스 루이즈이다. 아버지 에티커스 핀치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자, 삶의 멘토 삼아 살아가는 그녀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이 주된 책의 스토리이다.

루이즈는 '존경받을 만한' 가문에서 태어나 말괄량이 아가씨로 자랐다. 인종이나 가문에 대한 편견 없이 자란 그녀가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뉴욕 생활을 하다가, 다시 자신이 나고 자란 마을 메이콤으로 휴가를 보내러 돌아와 그동안에 보지 못했던 자신 주변의 일들에 직면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사실 책은 격정적이지 않다. 조용한 시골마을이 점차 번화하면서 새로운 계층들이 생겨나는 모습들이. 그리고, 루이즈의 고민들에 비해서 책은 조용하고, 우아하다.


>> 편견. 그 안타까움에 대하여


진 루이즈, 각자의 섬은 말이다, 각자의 파수꾼은 각자의 양심이야. 집단의 양심이란 것은 없어.<P.372>

아버지 에티커스 핀치는 그녀에게 있어서 롤모델이었다. 답답한 집의 가풍을 이겨내게 해준 아버지. 그는 그녀에게 있어서 '완벽한' 아버지상이었지만, 그녀는 에티커스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순간에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할 수 없게 된 것일까?

26살의 진취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녀. 미스 루이스. 그녀에게서 시공간을 초월해서 날아오는 물음이 꽂힌다. 과연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문제가, 정말 진리인 것일까? 정말 맞는 것일까?

그녀는 혼란스럽다. 자신의 '법'이었던 아버지가, 메이콤마을의 모든 사람의 '법'이었던 아버지가 어쩌면 처음으로 그녀와 다른 생각을 한다. 그녀는 구역질이 나지만, 한편으로는 생각한다. 아버지가 틀린 게 맞을까?

인종차별. 그녀에게 있어 분명 문제가 되는 일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녀의 혼란은 어쩌면 그녀의 출생에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메이콤에서 그녀는, 바지를 입고 다녀도 말괄량이 짓을 하고 다녀도, 심지어는 나체로 밤에 수영을 했다는 소문이 돌아도 '핀치' 집안이기에 모든 것이 괜찮을 수 있는 특권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가지 잘못을 범했다.

1. 그녀는 그녀의 파수꾼(양심)을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2. 그리고 파수꾼(양심)은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양면성이 있다. 아니 다면성을 가진다. 아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존재하는 한 사람. 그녀는 26년간 바라본 아버지에게서 낯섬을 느낀 것이다.

메이콤마을은 특이성을 가진다. 그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 그녀는 그녀 인생의 친구로 그녀의 흑인유모를 꼽는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 멀리 있다. 그런데, 과연 그녀 진 루이스의 기억은 온전한 것일까? 정말, 어린 소녀의 눈에서처럼 메이콤마을은 모든 편견에서 자유로웠던 마을이었던 걸까?

그녀는 결혼을 결심했었다. 그는 그녀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는 한 쌍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고모는 그를 '쓰레기'집안에 '잘 정리된 쓰레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녀의 고모는 옳지 못 했던 것일까?

파수꾼에서 말하고자하는 것은 비단 인종차별에 대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흰색이냐, 검은색이냐를 떠나서 남부 사람이냐, 아니냐, 종교인이냐, 아니냐. 여자인가, 아닌가 심지어는 어떤 부모를 가졌는가까지. 실로 광범위한 곳에서의 차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를 제쳐두고 사실 나는 책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다. 그런데, 리뷰를 보고 나서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다수의 리뷰는 말한다. 이 책은 그리 좋은 책이 아니라고. <앵무새 죽이기>만을 권할 뿐이다. 아마도 나는 아직 그 책을 알지 못해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또 다른 편견을 경험하고 있는 중은 아닐까

한 무리의 뒤떨어진 사람들을 한 종류의 문명에서 진보한 사람들 사이에 살게 할 때, 사회적 이상향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해 본적 있니?

변호사인 그녀의 아버지는 인종차별주의자이다.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의 평등은, '좀 더 문명화 된 집단이 좀 더 문명화 된 번영으로 갈 수 있도록 민주주의를 이용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표심'을 위해서 움직였던 것이다. 그가 신뢰하는 것은 미국의 헌법이었다. 미국의 헌법을 지키기에 아직 흑인들은 교육수준이 떨어져 있으며, 심지어 백인보다 인구가 많다. 읽으면서 지독한 파시즘이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루이즈가 조금 더 현명하게 아버지의 말을 받아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면 소설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 뉴욕과 메이콤.

뉴욕에서는 이런 일이 없었다. 버스 옆자리에 흑인이 타는 것과 백인이 타는 것은 하등의 관계가 없었다. 내가 일하는 직장에 흑인이 있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왜인가? 하지만 메이콤에서는, 흑인/백인이냐도 문제지만 그녀가 어떤 집안이었는지, 그녀의 친구는 누구인지, 모든 것들이 문제가 되는 마을이다. 이것은 정말 나쁠까?

<흑인/백인>차별에 대한 문제가 나쁘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친숙한 그녀의 마을.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미스 루이즈를 말괄량이 소녀로 기억한다. 때론 '오랜 시간 겪어봄'이 낳는 편견에 대해서. 짧은 고민을 해 보게 되는 것이다. 그녀의 마을 사람들은 그녀가 알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변했다. 그녀는 이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뉴욕에 있는 동안 잊고 살았던 마을의 변하는 속도에 대해서. 그녀가 <가깝게 느꼈던>것과, 다수의 사람들이 모르고 살아가는 <도시의 삶>에 대해서. 그녀는 책에서 이야기한다. 언젠가 내가 어느 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면 그곳은 메이콤, 어딘가일 것이라고.

너는 그런 적 없어? 언제고 이 지방은 별개의 나라였다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어? 정치적 결속은 어떻든지 간에, 그 자체의 국민을 가진, 나라 안에 속한 별개의 나라라는 느낌을 받아 본 적 없어? 놀랍도록 부당한 일들이 일어나지만, 한편으론 밤을 밝히는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명예가 공존하는 고도로 모순된 사회라는 느낌은? 수많은 서로 다른 이유들이 한 가지 명백한 이유로 수렴되는 전쟁은 일찍이 없었단다. 그들은 자기들의 독자성을 보존하려고 싸운 거야. 자기들의 정치적 독자성, 자기들의 개인적 독자성.<P. 276>

뉴욕과 메이콤에서 느끼는 루이즈의 감정들이, 개괄적으로 보자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일 것이다. 한없이 가까운 사람들. 그래서 더 상처받고 더 순결하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아이러니하게도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사회는 메이콤이 아니라 뉴욕에 있듯이.


>> "파수꾼"

조금은 특이하지만 아버지만큼이나 존경스러운 루이즈의 삼촌은 그녀에게 말한다. 파수꾼은 마음속에 있어야 한다고.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소싯적 돈을 벌어 말년을 문학에 바친 우스꽝스러운 노인네. 그녀는 핀치 가문에서 가장 이상하면서도 가장 정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던 핀치 삼촌에게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털어놓고 해답을 얻는 듯하다.

너는 색맹이야 진 루이즈, 그가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고 또 앞으로도 언제나 그럴거야. 네가 보는 사람들 간의 차이는 오직 생김새나 지력, 인격 같은 것들에 있지 너는 한 번도 사람을 인종으로 보도록 부추김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에, 인종 문제가 현재 가장 논란이 많은 시급한 사안인데도 아직까지 인종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있어. <P.380>

많은 리뷰에서 <파수꾼>에 실망한 이유는 에티커스는 인종차별주의자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아직 앵무새죽이기를 읽어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애티커스를 사랑한 이유는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이라 했다.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지향했기 때문에. 물론 이 책에서의 에티커스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는 말 할 수없지만, <평등>에 대한 다른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동일한 느낌을 핀치 박사에게서도 받았고, 루이즈는 그녀의 평등과 아버지의 평등은 결코 같아질 수 없음을 이해한 듯했다.



>> 작가. 그 안타까움에 대하여

소설은 작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 아니에르노는 "작품은 내 손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 독립적인 어떤 것"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독자가 많을수록 책은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우습게도 <파수꾼>은 <앵무새 죽이기>로 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비하인드스토리를 보면, 심지어 <파수꾼>이 초고인데도, 독자들은 <앵무새죽이기>를 먼저 보고, <파수꾼>을 읽기를 권한다. 등장인물과 배경 모두가 합치되는 두 권의 소설이 왜 이렇게 극명하게 나뉘는 걸까? 왜 <파수꾼>은 <파수꾼>으로 바라봐지지 못하고 있는가?


헨리는 차분히 말했다. 「나는 단지 네가 사람의 행동 이면에 있는 동기를 봤으면 하는 것 뿐이야. 표면적으로는 별로 좋지 않은 무언가의 일부로 보일 수 있어도 그 사람의 동기도 모르면서 제멋대로 판단하지 마. 속으로는 피가 끓을지언정 분노를 드러내는 것 보다는 온건한 대응이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아는거지.(....)자기가 속한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고자 할 뿐이더라도,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일정한 요구에 부응해야 한다는 거 생각해 본 적있어?」P.325

책의 저자 하퍼 리는 안타깝게도 올해 2월 별이 되었다. 그녀에게 물을 수 없다는 소리다. 왜 그녀는 <앵무새죽이기>를 내고 오랜 시간 동안 원작인 <파수꾼>을 감춰 두어야만 했는가. 그리고, 그녀의 건강이 쇠약해진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이 책을 꺼내놓아야 했는가. 해답은 아무도 내려줄 수 없다. 다만 두 권의 책으로 가늠해 볼 뿐이다. 이미 책은 그녀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말처럼 오랜 시간 에티커스의 진실을 사람들이 오해했을 수도 있고, 어떤 리뷰어의 말처럼 하퍼 리가 아닌 앵무새 죽이기를 제안한 편집자가 천재일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어디에도 <파수꾼>에 대한 리뷰는 없다는 것이다.


혹시, 나처럼 미처 발견 못했을 당신들을 위하여, 메이콤은 겉표지 뒷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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