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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평점 :
가끔 책을 '무식하게' 읽고 싶은 날이 있다. 특히나 더운 날이 계속 될 때, 어디 시원한 곳에서 자리를 잡고 시간 가는지 모르고 읽고싶은 날이 있다. 시원한 만화카페에 배를 깔고 누워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책, 다른 사람들과 여행기간이 겹쳐서 끔찍한 교통체증을 느끼면서도 그저 즐겁게 읽었던 책들. 그렇게 숨가쁘게 읽기에는 사실 번역서 보다는 한국작가의 책이 최고다. 특히나 공포심이나 추리처럼 심리의 밑바닥을 긁어 내는 것들은 더욱 그렇다.
세상에는 별의 별 사람들이 다 모여산다. 각자의 삶에서 제각각 별짓을 다하며 살아간다. 그들 중 누군가는 살인자가 될 것이다 우발적으로, 분노로, 혹은 재미로. 그게 인생이고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가 나이고 상대가 어머니라는 상황은 '생각'에 포함시켜보지 않았다.
정유정 작가의 종의 기원은 정말 아끼고아껴둔 책이다. 버릇이라고 할 수도있겠지만 이슈가 된 책들은 가급적이면 그 이슈를 피해서 읽는 편이다. 많은 분들의 리뷰도있었고, 꽤나 이슈도 되었던 책. 그러나 너무 더워서 찾아들어간 만화카페에서 무심하게 꽂혀있는 책을 곁눈질로 집어들곤 세시간에 걸쳐 읽고, 리뷰를 남기기까지. 시간의 흐름이 아까울 만큼 재미있었다. 단순한 재미만 남긴 책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 책이다. 혹시 심리소설 추리소설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하고 싶은 책이 생겼다.
악惡은 어떻게 존재하고 점화 되는가.
심연에서 건져올린 인간 본성의 '어두운 숲'
이 책의 뒷면의 책소개 카피. 정말 너무너무 마음에 든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있는 어두운 본성. 인간의 본성에 선이 있다면, 악 또한 존재하고 있으리라. 이 책은 그 근원적인 악에 대한 이야기이다. 단순히 존재로서의 악이 아니라, 가시적으로 활동하게 되는 악의 활동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싸우는 상대가 괴물이라면, 아주 조심해야한다. 자기 자신도 괴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심연 역시 그대를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니체/선악을 넘어서)
소설의 플롯은 간결히 정리 될 수 있으나, 혹시나 읽기전에 리뷰를 읽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은 읽어보지 않기를 권한다. 사실 이 책의 묘미는 범인이 누구냐에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곳에서 재미를 찾을 누군가를 위하여.
유진은 사람을 죽였다. 그것도 몇 명이나. 흔한 연쇄살인범.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는 전혀 모르는 여성을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고, 이모를 죽였지만 살아남았다.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가면서, 나는 범인이 유진이 아니기를 바랬다. 그래서 작은 단서 하나까지도 그가 아니길 바라면서 한참을 아주 한참을 찾았다. 간질환자였던 유진이 조작된 기억을 가지고있기를 바랬지만, 책은 아주 잔인하게도 유진을 '사이코패스'중에서도 최고 위에 있는 프레데터급의 '끝판왕'이라고 진단을 내려버리고 만다.
망각은 궁극의 거짓말이다. 나 자산에게 할 수 있는 완벽한 거짓이다. 내 머리가 내놓을 수 있는 마지막 패이기도 하다. 어젯밤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고, 해결책으로 망각을 택했으며, 내 자신에게 속아 바보짓을 하며 하루를 보낸 셈이었다. P. 206
소설의 반전이라면 아마도 반전이 없다는 것이 반전일 것이다. 처음부터 내가 범인이오 하며 범인의 시점에서 쓰여진 책도 재미가 있을 수 있구나. 유진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목격했던 사이코패스의 잠재력을 가졌던 아이였다. 그 잠재력을 진단해 준것은 유진의 이모였고,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유진의 엄마는 그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 자라주기만을 바랐다. 유진은 살아가는 동안 본인이 엄마가 만들어놓은 무대에서 살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았지만, 그 이유는 알지 못했다.
"나는 죽음에 대한 낭만적인 치장을 하는 게 싫어."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해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마 광명역을 막 통과한 후였을 것이다. 나는 껌껌한 차량에 시선을 대고 있다가 멍하니 물었다.
"왜""
"수류탄에 초콜릿을 바르는 일이니까."
(...)
"어떤 책에서 본 얘긴데,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는데는 세가지 방식이 있데. 하나는 억압이야. 죽음이 다가온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양 생동하는거. 우리는 대부분 이렇게 살아. 두번쨰는 항상 죽음을 마음에 새겨놓고 잊지 않는 거야. 오늘을 생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할 때 삶은 가장 축복이라는 거지. 세번째는 수용이래.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P. 331
해진은 유진보다 한 살많은 지혜로운 형이다. 그는 친 형은 아니었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 양아들로 받아들여진 형을 대신한 그늘이다. 소설에서 유진이 악의 캐릭터라면 자수성가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마지막까지도 자수를 권했던 해진은 선의 캐릭터 였을 것이다. 유진은 전직 수영선수였는데, 간질약으로 알고 복용했던 어떤류의 약을 끊으면 생겨나는 해방감으로 인해 연일 신기록을 세우던 유망주 였고 차후 그 일을 알게된 어머니와 이모로 인해 수영선수를 그만두게 되었다. '물'이라는 장치가 유독 이 소설속에서는 많이 쓰이고 있는데 엄청 매력적인 장치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해진(선)과 유진(악)은 함께 바닷가에 빠졌지만 마지막까지 살고자 발버둥치던 해진은 죽고, 유진은 살아 남았다.
"희망을 가진다고 절망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요. 세상은 사칙연산처럼 분명하지 않아요.인간은 연산보다 더 복잡하니까요."
(...)"그래도 한 번쯤 공평해지는 시점이 올거라고 믿어요. 그러니까, 그러려고 애쓰면요."P.67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리뷰를 남기는 것이 모호하다. 마음속에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로 남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보잘 것이 없고, 흔한 이야기이지만 강렬하게 남는 이미지들이 있다. 아마도 우리가 공포영화를 보고 줄거리가 아닌 이미지를 기억에 남기는 것과 같지 않을까.
더운 여름에, 서늘한 마음으로 읽어보기 참 좋은 책.
아마도, 이 책의 리뷰가 올라갈 쯤이면 나는 어딘가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겠지만 더운 여름에 시원한 어딘가에서 멍때릴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있게 추천한다.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단 세 시간이면 읽어 내려온 다음 머릿 속에서 비워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