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잎은 노래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67
도리스 레싱 지음, 이태동 옮김 / 민음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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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어느 마을, 1950년대. 한 여자가 피살되었다. 그 여자를 주인으로 모셨을 흑인 하인이 금품을 노리고 저지른 범행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일부러 관심을 피하는 듯했다. 억압된 원주민들의 지위로 봤을 때 백인의 죽음은 분명 큰 이슈가 되어야 할 것이었지만, 미묘한 냉담함으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의 1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피살자 메리. 그녀의 이야기는 각 장을 통해 공개되는데 책을 읽었다면 필연적으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1장을 다시 펴보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책. 도리스 레싱의 책에 등장하는 그녀는 처절했다.

 
불쌍하고 추하고 정신마저 이상해진 여자. 자신과 이글거리는 태양 사이에는 녹기 일보 직전의 열판이 가로로 있고, 자신과 저주스러운 어둠 사이에는 잠깐 동안의 낮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은 할 수도 없는, 삶 자체를 상실해 버린 여자. <P.332>

 1928. 영국,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소설의 배경인 남아프리카는 2년 뒤인 1930년.
1948년 남아프리카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시작했고, 이는 내 동생이 태어난 뒤 두 살이 되던 해(1993)까지도 지속되었다. 20%도 안 되는 백인이 절대다수의 흑인에게 가할 수 있는 불평등한 법. 자세한 내막은 잘 알지 못하고 단순한 기록이니, 향후 관련된 책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여성이 참정권을 갖게 된 것은 채 100년이 안되는 짧은 역사이다. 여성으로서, 그 짧은 기간 동안 동등해지기 위해 싸워온 시간들과 이 전 역사 속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은 1950년 처음 출간되었다고 했다. 배경은 남아프리카. 오직 백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들 속의 이야기이다.

                            

백인 문명.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P.41>

소설은 진행 내내 한낮 한여름이다. 모든 것들이 죽어있는 한 여름. 남아프리카의 여름을 상상해 본 적 없지만, 이런 타는듯한 여름이라면. 사람은 미칠 것 같다. 10월까지도 한여름인 이곳. 메리에게 겨울은 오지 않는다.
 메리는 어릴 적 학대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오로지 위안 삼을 것은 맞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없는 삶을 벗어나 도시로 왔다. 그녀의 이십 대는 찬란했고,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녀의 서른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상한 여자. 몸은 한껏 늙어가는데 마음은 소녀인 이상한 여자라는 평판을 벗어나기 위해 결혼할 상대도 정하지 않은 채 결혼을 결심했다. 그렇게 그녀는 가난한 남자 리처드를 만났고, 그녀의 서른은 다시 그녀를 어릴 적 아버지 앞으로 데려가는 듯했다. 무능한 한 남자의 가정 속에서 그녀는 잠시 벗어났었던 그 일말의 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가의 위기도 그렇겠지만 한 개인의 위기 또한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위기가 있었음을 깨닫는다. (...) '내년'이라는 말에 과연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또 한 번의 실패? 기껏해야 형편이 조금 괜찮아진다는 의미가 들어있을 뿐이었다. 기적은 기대할 수 없었다. <P.228>

백인이지만 여성이었던 메리. 그녀는 흑인을 잘 다루지 못하는 여성이다. 미개하고 어리숙한 흑인을 너그럽게 봐줄 깜냥도 안 되는 여자. 당시 사회는 흑인을 다룰 수 있는 사람은 백인 남성뿐이라는 의식이 있었고, 그녀는 그 시선의 또 다른 피해자였던 것이다. '모세'(이름 속에 들어있는 아이러니 라니!)라는 흑인을 부리게 되면서 겪게 되는 사항들을 읽다 보면, 시기적인 것들을 감안했을 때, 도리스 레싱은 정말 치열하게 글을 썼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점차 하인이었던 모세에게 의지하며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것을 넘어서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듯한 모습들을 보인다. 그것은 모세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평생의 핍박을 받던 흑인은 생전 처음 자신에게 무너지는 백인을 본 것이다.

그의 말투에 대해 가슴속에서 보통 때와 같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깊이 빨려 들고 말았다. 그런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도대체 어떡해야 될지 마음을 결정할 수 없었다. <P.263>

소설은 지지부진하게도 비정상 속으로 나를 끌고 들어간다. 감안해야 할 점은 이 책은 1950년대에 나왔다는 점이고, 그때 흑인의 지위는 지금처럼 의식 속에만 남아있는 편견이 아니라 법으로 보호받는 '정설'이었다는 것. 너무나도 당연하게 신체적 조건만 좋은 흑인은 백인의 발바닥도 쳐다보지 못할 위치였던 것이다. 절대다수의 유색인종을 지배하기로 생각한 백인 문명은, 언제든지 전복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의식 깊이에서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대에 와서 인종 차별은 일종의 포비아 현상일 뿐, 법적으로는 금지되어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회 시스템은 근본적인 차별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이 시대에 도리스 레싱의 <풀잎은 노래한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떤 감정까지를 끌고 가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책의 문맥을 살필 때 흑인과 백인의 사랑은커녕 백인이 흑인을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다는 것 자체가 모독인 사회였음은 분명했다. 그런 사회에서 메리를 '마님'이 아닌 '부인'(조금 더 신사적인 의미? 원서를 보지 않았으니 알 수없지만 조금 더 근대화된 지칭 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으로 부르는 선교사 아래 있었던 모세는 아주 충격적인 인물이다.

"오렌지는 다 떨어졌어요. "
그는 냉담하게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러나 그 말투에는 자기만족과 의식적인 힘이 담겨 있어서 찰리는 일순간 숨이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문자 그대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P.303>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그녀를 죽인 것은 모세이다. 1장에서부터 못을 박고 시작한다. 그녀의 죽음과. 죽음을 둘러싼 내막들을 말이다. 하지만 처음에 읽었을 때는 흘려보냈던 그 모든 것들이. 끝까지 읽고 돌아와 읽히는 충격이란. 자주 가는 블로그 이웃과 나눴던 말처럼. 정말 믿고 보는 도리스 레싱이다.
어느 한순간 가슴 섬뜩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릴 것만 같은 엄청난 공포의 전주곡이 들려오는 듯했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마음이 무로 돌아간 평정 상태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공포의 그림자가 무엇인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P.327>
  이 책은 내가 읽은 그녀의 두 번째 책인데, 처녀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치열하고 치밀한 책이었다. 읽었던 두 권의 책은 성격도 성향도 완전히 반대여서 공통점이라고는 모두 도리스 레싱의 펜에서 나왔다는 것뿐일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연결고리가 존재한다. 바로 "겹겹이 쌓여있는 아픔"이다. 
 가난하고 힘듦을 어찌어찌 피해온 듯한 서른 살의 메리는 또 다른 고난을 만난다. 주변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평판을 피해 남편감을 찾았지만, 결국 그녀의 삶은 가난과 힘듦으로 다시 들어간다. 사랑을 찾지 못한 채, 그녀는 그녀의 삶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로부터 남편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흑인 하인 모세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었다. 흑인이지만 어쩐지 그녀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일 것 같은 두려운 존재. 그녀는 이중의 괴로움 속에서 살았다.
 오랜 기억이지만 좀처럼 처절해서 주인공의 이름이 잊히지 않았던 <다섯째 아이>의 어머니 헤리엇은 눈앞에 나타난 운명의 상대와 이상적인 집을 꾸린 듯했지만 내내 현실과 부딪혀야 했다. 금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남편과 본인의 이상에의 변심. 유복했던 가정에 태어난 악마 같은 문제아 벤 때문에 무너져가는 그녀 역시도 어머니로서의 괴로움과 여자로서의 상실감 속에서 살았다.

 단 두 권의 책만으로 도리스 레싱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 그녀의 책을 완독하려 시도할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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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드런 액트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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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사람은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신이 믿는 신념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내려놓는다. 나는 어렸을 때, 공부만 열심히 하면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내 행동의 반경 모두를 부모가 지켜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저 나 혼자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 막연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책은 아동법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고등법원의 판사인 피오나가, 여러 법정의 일들을 겪으며 그리고 불완전했던 그녀의 사생활을 헤쳐나가면서 겪는 이야기들이다. 이언 매큐언의 책은 다섯 번째인데 개인적으로는 속죄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책이다.

그러나 한 생명이 다른 생명보다 더 가치 있다고 추정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 한 것이었다. 쌍둥이를 분리하면 매슈가 죽었다. 쌍둥이를 분리하지 않으면 부작위로 인해 둘 다 죽었다. 법적, 도덕적 운신의 폭은 좁았고 이 문제는 결국 차악의 선택으로 결론지어야 했다.<P.42>

 가끔 어떤 글을 보고 메일을 보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철학과 종교에 대한 텍스트들을 많이 올리니 특정 종교에서 지속적으로 메일을 보내곤 한다. 그냥 읽지 않고 메일을 지우거나, 애매한 제목 덕에 클릭을 해 봤다가 기분이 나빠질 때도 있다. 종교는 믿는 자에겐 어마 무시한 힘을 갖는 신념이겠지만 믿지 않는 자에겐 그저 텍스트에 불과하다.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만약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형벌이 믿지 않는 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온전히 개인이 감당해야 할 일이다. 선한 자가 단지 믿음을 갖지 않아서 생기는 불행은 종교적 형벌이 아니라 그저 불운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종교인들에게도 이 책은 어떻게 비칠지 궁금하다. 일단 나는 무교이다.
종교적 신념에 의해 샴쌍둥이로 태어난 아이를 차마 수술대에 올리지 못하는 부모. 인간의 생사는 인간이 정할 수 없다고 믿는 부모의 아래에서 운이 좋다면 한 아이가 살 수 있고, 당장 수술하지 않는다면 두 아이 모두 죽는 상황. 이 상황에서 과연 법은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가? 부모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까? 사실, 이 사건은 다음 사건의 전초에 불과하지만 종교적인 입장을 빼고 생각한다 해도 부모의 입장에서 온전하지는 않지만 함께 태어난 두 아이를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선택이 옳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이는 기피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기피, 그게 신자들이 쓰는 말이죠? 아버지와 장로들이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기피당할까 봐 두려운 겁니다. 끔찍한 죽음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는 이유로 자신이 아는 유일한 세상이 등을 돌리는 상황인 거죠. 그것이 어린 소년에게 자유로운 선택일까요?<P.112>

                             더 끔찍한? 사건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 가정의 열일곱 살(아마도 영국법의 성인은 열여덟 살인가 보다.)인 아이가 본인의 죽음을 주장하고 있다. 수혈을 받을 수 없다고 버티는 아이는 아동법의 보호를 받고 있지만 성인의 나이에 가깝기에 '치료 거부'를 선언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본 사건을 맡은 피오나의 감정선에서 인간의 근본적인 권리들이 부딪히는 것이다. 생명권, 존엄권, 종교의 자유 기타 여러 인간이 만들어 낸 텍스트에 불과한 때로는 대다수가 동의하고 있기에 평소엔 부딪히지 않던 권리 아닌 권리들이 말이다.

해결이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저는 판결을 내리는 데 있어서 A의 나이와,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신앙과, 치료를 거부할 권리에 내포된 개인의 존엄성에 응분의 비중을 두었습니다. 본 판결에서 A의 존엄성보다 소중한 것은 A의 생명입니다. <P.169>

스포일러를 하자만 그 아동은 피오나의 판결에 의해 살아났고, 한 해를 더 살다가 그 아이의 치료거부권이 발동하는 18세에 재발하여 죽었다. 피오나는 그 아이를 살려냈지만, 살려내기만 하였고 그 아이의 주변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으며 지속적으로 뻗어오는 도와달라는 말들을 그녀는 외면했던 것이다.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사랑이라는 그 애매한 단어 때문에 잠깐의 흔들림 때문에 말이다.

아동은 섬이 아니다. 법정을 벗어나면 내 책임도 끝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이는 나를 찾아왔고 그 애가 원했던 건 모든 사람이 다 원하는 것, 초자연적인 힘이 아닌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건 '의미'였어. <P.288>

아마 책이 종교로부터 아이를 구해내고 마무리되었어도 평범하게 읽어낼 수 있는 소설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고,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언 매큐언은 한번 더 들여다 보길 권한다. 과연 아동법으로 그 아이를 구해냈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존엄성이 부여될 수 있을까? 그 아이의 삶이, 신앙의 테두리 안에서 밖으로 꺼내어진다고 해서 그 아이는 삶을 부여받은 것일까?
  마지막 말이 마음이 아픈 건 그것이다. 피오나는 아직 혼란스럽다. 그녀는 그 아이에게 의미를 부여하지 못했다. 그녀 역시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건강한 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남편의 외도와 본인의 사회적 배경에서 줄타기하는 그녀는 법정에서는 제법 훌륭한 선고를 했지만, 결국 그 아이를 구해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피오나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책 안에서는 물론 무거운 주제들도 있지만 그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남편의 늦바람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녀의 감정선이 너무 잘 표현되어있어서, 서럽지만 책 제목이기도 한 아동법에 대한 판결들 때문에 묻히는 것들. 그녀의 남편이 한없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이러면 안 되는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된다. 법과 결혼한 와이프. 그리고 살면서 마지막으로 원하는 불꽃같은? 사랑. 물론 가장 행복한 결말은 다시 두 사람의 사랑이 타오르는 것이겠지만 책에서는 피오나의 감정만큼이나 애매하게 표현된다.

미리 생각해보지도 않고 둔 자충수, 그의 나이트를 룩으로 막은 셈이었다. 완전한 바보짓,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가 머무른다면 모욕, 그가 떠난다면 심연.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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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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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至難한 슬픔들이 모여 책이 된 듯했다. 한동안 너무 먹먹할 정도로.
요즘 단편선을 자주 집어 드는 것 같다. 국내 소설을 많이 안 읽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속죄쯤으로 생각하면서. 블로거의 서평들을 보다가, 미친듯한 눈물을 경험해 보고 싶어 집어 든 책.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났다는 감정이 언제였더라.
 아마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와 함께 갔던 영화관에서 청연을 보고였던 것 같다. 십 년은 더 된 이야기. 기억하건대 어떤 것을 읽거나 보면서 흘려본 눈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강렬한 제목은 아니다. 바깥은 여름. 요즘처럼 제목에서 오는 임팩트가 중요한 시기에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다 읽고 나니 제목이 꽂힌다. 바깥은 여름인데 그렇게나 만물이 타는듯한 더위로 열렬히 살아가는데 문지방을 넘으니 겨울이다. 모든 소설은 헤어짐으로 통한다.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 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이는 그런. <P.156 / 풍경의 쓸모>

 참 트렌드 한 우울함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울함에도 유행이 있구나 하는 것을 곱씹게 되는 책. 첫 번째 단편부터가 눈물을 뽑는다. 사실, 나도 복분자 원액을 터트려본 적이 있는데 그 폭발이 그 선명한 붉은 색감이 그토록 슬플 수 있다는 것에. 벽지를 붙여내는 일이 그토록 힘들 수 있다는 것에 순간적인 괴로움이 전달되어 아직 내가 미혼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첫 번째 소설부터 눈물바람이었을 것이다.
 노견과의 헤어짐과 애인과의 헤어짐. 모든 헤어짐을 주제로 한 소설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침묵의 미래>다. 언어 박물관을 주제로 소설이, 작가가 참 영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 짧은 소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 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라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 <P. 138 / 침묵의 미래>

물론 소설들은 때론 먹먹하고 때론 아주 슬프지만, 막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감정 풍부한 사람들이 읽으면 어느 곳에서 눈물을 터뜨릴지 예측은 되었다. 모든 소설은 나의 경험과 닿아있을 때 슬픈 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소설은 아주 사회적이지만,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아이의 '치아'에 대한 표현이다.
첫돌 무렵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 입안에 새싹처럼 작은 흰 뼈가 돋았다. 인간이 가진 뼈 중 유일하게 바깥으로 드러난 거였다. <P.193 / 가리는 손>
짧은 문장을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인간에게 바깥으로 돋아난 뼈가 있었구나. 그 뼈는 무슨 쓸모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돌출되어야 했을까.

 국내 소설의 트렌드가 단편선이라는 것에 대한 소소한 불만은 있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젊은 작가들의 책을 접할 수 있음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나랑 나이가 닮은 누군가의 생각을 읽으면서. 온 세상에 가득한 헤어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사소한 헤어짐일 수도 있겠고 수 천 년 전부터 예견되어온 당연한 헤어짐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헤어져서는 안되는데 찰나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참 다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의 주제는 우울하고 무겁지만, 그래도 다정하다 생각되는 이유는 아마도 아주 여성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남성적인 문체'와 '여성적인 문체'를 잘 구분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대표작이 생긴 셈이다. 여성적인 문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바깥은 여름을 읽어보시라.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P. 213 / 가리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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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8
라우라 에스키벨 지음, 권미선 옮김 / 민음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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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통과하는 문학. 공통점이라고 할 순 없지만 적어도 내가 읽은 남미의 문학은 몇 대에 거친 이야기들을 하기 즐기는 것 같다. <영혼의 집>에서 알바까지 계승되는 유전적인 사랑스러움이 그랬고. <빼드로빠라모>가 그랬듯이. 이 책도 한 가문에 얽힌 관습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내놓는다. 요즘 한 물가긴 했지만, 그래도 쿡방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1월부터 시작해 12월에 끝나는 열두 가지의 음식과, 한 가정의 애정사. 오랜만에 제대로 된 연애소설을 한 권 끝낸 느낌이다.
 마마 엘레나를 평생 시중들어야 할, 결혼 못 할 막내딸의 운명을 타고난 티타. 그녀는 부엌에서 자랐고 덕분에 가문의 요리를 계승 받으며 자랄 수 있었으나, 사랑할 자격을 갖지 못한 채 양파를 저미는 눈물 속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를 사랑하는 페드로의 청혼을 받았으나 페드로는 그녀의 운명을 이기지 못했고, 그녀를 곁에서 볼 수 있도록 그녀의 언니와 결혼하는 방법을 택했다.

"진실! 진실! 티타,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진짜 진실이야. 진실은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예를 들어, 네 경우에는 너와 페드로가 진심으로 사랑하는데도 로사우라언니가 아랑곳하지 않고 일부러 페드로와 결혼했다는 게 진실이야. 내 말이 틀렸니?"<P.198>

소설은 관능적인 요리와 환상문학이 버무려져 펼쳐진다. 유혹적인 마음을 담아 만든 요리를 먹은 사람들이 섹스를 하러 사라지는 장면이나 슬픔을 담아 만든 결혼 케이크를 먹은 사람들의 눈물바람은 예사 이야기다. 분명 황당할 정도로 과장된 표현들도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매력이 있는 책이다.
티타는 본인의 운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티타는 그제야 자신의 몸을 통해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가 되는지, 불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P.75>

생은 점점 페드로와 티타를 갈라놓는 듯했다. 마마 엘레나의 방해 아닌 방해 역시 마찬가지였고. 더군다나 티타는 주치의였던 사람에게 다른 사랑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낯선 문학이지만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우리네 역시 이런 공동체의 삶을 택하고 있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마치 못 이뤄봤던 내 생을 다음 세대에게서는 끊어내길 원하는 우리네처럼. 티타는 페드로의 자식이 본인과 다른 삶을 찾길 바라고, 끊임없이 음식을 만든다. 그 모든 장면들이 때론 관능적으로 때론 맛있게 표현되어있다.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다시 말해 불꽃은 영혼의 양식인 것입니다.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칠 수 없게 됩니다. <P.125>

몸속에 간직 한인 때문에 과학적으로 전부 설명할 순 없지만 혼령이라고 믿게 되는 무언가가 무덤에서 새로 피어나기도 한다. 우리는 마른 몸에서 피어나는 혼령에 대한 두려움은 가지고 있으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본 적 있는가? 몸에 인을 간직했지만 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축축해진 사람. 혹시 나의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티타를 지펴 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

티타는 인형의 섬세한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어렸을 때 소원을 비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었던가 생각했다. 그때는 불가능이라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바랄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금기시되는 것과 죄악시되는 것, 정숙하지 않은 것은 바랄 수 없다. 하지만 대체 정숙하다는 게 뭐란 말인가?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P.184>

소설은 고전문학이라고 하기엔 최근에 씐 책이긴 하나, 시대를 관통하는 질문에 대한 물음표를 품고 있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운명. 그 관습들이. 과연 정조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에 반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더군다나 사랑은 잔인하게도, 그 사랑을 품은 채로 자신을 가까이에 두기 위해 본인의 언니와 결혼을 했고, 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도 결혼을 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에서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은 옳지 않은 것인가?
 아니, 모든 상황을 옳고 옳지 않음으로 판단해야 하는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책을 읽다 보면 나는 가끔 로사우라(티타의언니)의 편이 되곤 했다. 가문의 판단을 받아들인 언니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 있다는 걸까? 티타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혼을 결심한 언니의 마음 역시도 관습을 비켜가려 하는 티타만큼이나 절박한 무언가였을 텐데. 

시간을 할애하여 읽을 만큼의 매력적인 책은 어떤 것일까? 문득 이 책을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나의 입맛에 맞는 책은 책 속에 인물들 중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는 상태일 때 즐겁게 읽어 내려갈 수 있는 것 같다. 이 책 안에 절대악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절대적인 피해자 역시 단 한 명도 없다. 마마 엘레나의 삶 역시도 이해할 수 있는 삶이었으며 비밀을 간직한 여인이었다. 되려 요즘의 시선으로 보자면 가문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한 여인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하인 한 명 한 명, 주변인 한 사람까지도 절대 선은 없으며, 절대 악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에피소드와 죄악이 섞여 만들어진 소설. 한동안 여운이 남을 것 같다. 그리고 특유의 마무리.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는 레시피 한 권. 그 한 권에 얽힌 세대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행복한 가문의 후손의 목소리가 반바퀴를 돌아, 세대를 넘어서 친근함을 전했다.


사람들의 얘기로는 그 잿더미 아래에서 갖가지 인생이 꽃을 피웠기 때문에 그 토양이 일대에서 가장 비옥해진 것이라고 했다.<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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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가지 상품으로 읽는 종횡무진 세계지리
조철기 지음 / 서해문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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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만들어진 모든 단어들 중 최근 내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단어, "개인주의". 각각의 개인이 오로지 홀로 존재할 수 있을까? "노 터치"는 정말 가능한 단어일까? 요즘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자본주의는 심장이 없기도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떨어뜨려 놓는데 아주 탁월하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복지는 효율성이 묻히기 십상일뿐더러 사람들은 물건의 대가를 돈으로 지불하며 "내가 산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옛 현자가 '당신이 과일을 먹을 때마다 누군가 그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한 것처럼 당신이 커피를 마실 때마다 누군가 커피나무를 심어 정성으로 가꾸고 수확했음을 기억해 주길 바랍니다. " - 네팔의 한 농부<P. 243>

사람들은 쉽게 잊는다. "내가 돈을 지불한다"라는 것으로 그 물건의 대가를 치렀다 생각하는 시스템. 나 역시도 이 생각을 갖고 살고 있으며 내가 쓰는 핸드폰의 가격이 비싸다는 생각은 하지만 이 핸드폰을 만든 사람들의 노고가 가격에 포함되어있는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초등교육에서 농부가 쌀 한 알을 빚기 위해 아흔아홉 가지 노고를 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긴 하지만 나는 마트에서 가격을 지불하고 쌀을 구매하며, 나에게 오기까지의 가격이 비싸다/싸다로 가치를 판단할 뿐 그 가격안에 포함된 것들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에서는 청바지와 스마트폰 햄버거와 콜라, 공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커피. 일곱 가지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상징인 물건을 통해 세상 모든 물건의 뒷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사실 전문적인 서적들을 탐독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또 하나의 자본주의 틀 안에서 만들어진 소모품일지도 모르겠으나 최근 공정무역이나 착한 소비에 대한 생각들을 갖게 된 나에게 있어 이 책은 하나의 "실용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굳이 많은 학자들의 이름표를 붙이지 않더라도 실제 어떤 부분이 합리적이지 못한지, 우리는 왜 그렇게 비싼 가격을 들여 물건을 사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기를 포기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 메이드 인 글로벌

청바지의 생산과 소비활동은 지구를 가로질러 상호의존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가 청바지를 소비하는 행위는 다른 국가의 생산자에게 영향을 미친다. 가히 세계여행이라고 불릴 만 한 청바지의 상품 사슬을 통해 우리는 더 촘촘해진, 세계의 상호의존성을 이해할 수 있다. <P.45>

 이제 더 이상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차이나를 외칠 필요는 없다. 로컬푸드를 제외하곤 사실상 거의 모든 제품이 100% 메이드 인 코리아이긴 힘든 세상이다. 엄격하게 말하면 로컬푸드를 포장하는 포장재, 운송하는 운송업체 등을 고려했을 때 순도 100%의 메이드 인 코리아는 없다.
 전 세계가 합심하여 만들어낸 청바지. 청바지의 버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청바지의 나염은 어디서 들이는 것일까? 사실 이런 것들을 생각하기 전에, 이 청바지는 어떤 브랜드인지를 생각하며 입는다. 세상에 모든 귀찮은 공정들을 하나하나 하청을 주고, 마침내 그 물건을 손에 든 업체가 온갖 소매점으로 물건을 납품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소비자에게 당도하기까지. 그 간극이 멀면 멀수록 사람들은 물건의 가치를 계산하기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청바지의 가격에 바지를 염색하는 사람들의 인건비는 얼마나 포함되어 있을까?

물론 중국 노동자의 죽음이 스티브 잡스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세계인을 사로잡고 있는 스마트폰의 이면에 노동자의 피와 땀이 스며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P.75/스마트폰, 손안에 펼쳐진 또 하나의 세상>

 핸드폰 하나를 살 때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단통법에 신경을 쓴다. 그리고 핸드폰의 비용이 너무 비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온갖 것들이 가능한 호모 모빌리언 시대를 외치는 판국에 그 온갖 것들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을 갖지는 않는다. 아마 스티브 잡스가 시작했거나 삼성이나 LG가 했겠지.
  리뷰를 쓰다 보니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물질만능주의에 대해 교과서에서 이야기할 때보다 더 심각한 허무함을 갖게 한다.

>> 더 이상 소비자는 필요 없다

빅맥에 어떤 재료가 들어가는지는 기업 간 거래 B2B' 관계를 통해 알 수 있다. 맥도날드에 따르면, 빅맥에 사용되는 치즈는 매일유업의 상하치즈다. 이처럼 맥도날드는 양상추, 치즈, 우유를 제공받으며 매일유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맥도날드 햄버거에 들어가는 케첩 등 소스는 국내의 대표적 식품기업인 오뚜기가 생산한다. <P.118>

자본주의는 사람들 간의 멀어짊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소비에 기초를 두고 성장하겠지만,
나는 나 나름대로 보이콧하는 물건들이 있다. 모 기업의 제품은 공정하지 못하고 모 기업은 윤리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혼자 불매하는 곳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불매운동을 벌인다고 해서 기업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는걸까? 실질적으로 한 기업은 갑질 논란으로 꽤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벌어졌었으나, 브랜드의 다른 계열사 오픈과 B2B라는 시스템으로 위기사항은 맞지 않았다. 되려 불매운동으로 인해 위기사항을 맞았었으니 더 비싼 가격에 물건을 판매하게 되는 당위성만을 갖게 되는 악순환을 갖는다.
 기업 간의 거래. 나는 빵 가게에서 빵을 사 먹으면서 원료가 어느 기업의 것인지를 묻지 않는다.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착한 기업이 될 필요가 있으려면 어떤 연결고리를 끊고, 어떤 연결고리를 공개해야 하는 것일까?

 >> 물건의 뒷면

우리가 분실한 휴대전화를 찾지 않거나, 최신형 휴대전화로 계속해서 교체하는 동안 아프리카 콩고에서는 고릴라가 보금자리를 잃고 멸종되고 있다. 그리고 순박한 원주민은 끝을 모르는 지긋지긋한 내전에 목숨을 위협받고 있다. 그리하여 '블러드 폰'이란 말까지 생겨난 것이다. 우리의 휴대전화에는 콩고민주공화국의 '피 묻은 콜탄'이 들어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P.83>
아이러니하게도 아프리카는 "가진 게 많아서 가난한 땅'으로 모사되기도 한다. 가진 게 많은 데 왜 가난할까?(...)이 들 지역에서 끊이지 않는 내전은 부족, 인종 분쟁을 넘어 다이아몬드라는 '자원'을 둘러싼 분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P.272>

핸드폰의 공임비는 얼마나 들까? 원료값을 제하고 드는 인건비, 그리고 원료값. 한 사람이 하나의 휴대폰을 갖는 세대. 심지어 짧게는 몇 개월, 적어도 몇 년에 한 번은 핸드폰을 갈아치우면서도 그 안에 쓰인 원료는 어떤 것일까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 동안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21세기에 벌어지는 원료 전쟁. 이에 대한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언뜻 관계없어 보이는 고릴라의 생존권은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나는 지금 종교적인 수준의 이야기나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간접적이라는 말에 가려진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건의 구매가 쉬워질수록 사람들은 점차 개인적이라 생각이 들수록 내가 직접 가해하진 않았지만 '간접적인 폭력' 현상은 무궁무진해진다는 것이다.

사실 코카콜라만큼 국경과 인종, 종교를 뛰어넘어 많이 팔린 상품은 없다. 코카콜라는 세계화의 상징임에 틀림없다. 문제는 이런 세계화가 미국화를 의미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도 그랬고, 문화적으로도 그랬다. 우리는 어쩌면 미국의 경제적, 문화적 식민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P.161>

코카콜라를 마시면서, 우리는 미국을 마시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면 어떤 말일까를 먼저 고민해 보게 될 것이다. 책에서는 코카콜라의 시스템을 이야기한다. 세계에 거점을 둔 글로벌기업의 탄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이 시스템은 어떻게 사람들을 잠식했는지 말이다. 물건의 뒷면에는 거대한 불공정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 그렇다면 어떻게?
내가 이 책을 실용서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현상 파악과 문제 제기 그리고 표면적인 대처 방법 대해서는 적혀있으나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기 때문이다. 그도 너무 당연한 것이 당장 물건을 안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지극히 적은 시스템 내에서는 어떤 결론을 내리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인들이 각성할 수 있고 자본주의의 뒷면을 바라볼 수 있는 시민의식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일단은 물건의 뒷면을 한 번쯤 고민해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기계적인 소비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말이다.

야구공은 의외로 짧은 인생을 산다. 야구 경기에서 한 번 사용한 야구공은 재사용 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보거나 야구장에서 화려한 선수의 플레이에 열광하는 사이, 야구공은 짧은 수명을 다하는 것이다.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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