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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지난至難한 슬픔들이 모여 책이 된 듯했다. 한동안 너무 먹먹할 정도로.
요즘 단편선을 자주 집어 드는 것 같다. 국내 소설을 많이 안 읽고 살았다는 것에 대한 속죄쯤으로 생각하면서. 블로거의 서평들을 보다가, 미친듯한 눈물을 경험해 보고 싶어 집어 든 책.
어떤 것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났다는 감정이 언제였더라.
아마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와 함께 갔던 영화관에서 청연을 보고였던 것 같다. 십 년은 더 된 이야기. 기억하건대 어떤 것을 읽거나 보면서 흘려본 눈물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강렬한 제목은 아니다. 바깥은 여름. 요즘처럼 제목에서 오는 임팩트가 중요한 시기에 트렌디하지는 않지만 다 읽고 나니 제목이 꽂힌다. 바깥은 여름인데 그렇게나 만물이 타는듯한 더위로 열렬히 살아가는데 문지방을 넘으니 겨울이다. 모든 소설은 헤어짐으로 통한다.
낯선 나라에서 모국어로 된 정보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손에 스마트폰이 아닌 스노볼을 쥔 기분이었다. 유리 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이는 그런. <P.156 / 풍경의 쓸모>
참 트렌드 한 우울함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울함에도 유행이 있구나 하는 것을 곱씹게 되는 책. 첫 번째 단편부터가 눈물을 뽑는다. 사실, 나도 복분자 원액을 터트려본 적이 있는데 그 폭발이 그 선명한 붉은 색감이 그토록 슬플 수 있다는 것에. 벽지를 붙여내는 일이 그토록 힘들 수 있다는 것에 순간적인 괴로움이 전달되어 아직 내가 미혼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다행일 수가 없었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있었다면 첫 번째 소설부터 눈물바람이었을 것이다.
노견과의 헤어짐과 애인과의 헤어짐. 모든 헤어짐을 주제로 한 소설들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침묵의 미래>다. 언어 박물관을 주제로 소설이, 작가가 참 영리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 짧은 소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 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라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 <P. 138 / 침묵의 미래>
물론 소설들은 때론 먹먹하고 때론 아주 슬프지만, 막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감정 풍부한 사람들이 읽으면 어느 곳에서 눈물을 터뜨릴지 예측은 되었다. 모든 소설은 나의 경험과 닿아있을 때 슬픈 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소설은 아주 사회적이지만, 아주 개인적인 것이라는 것을.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은 아이의 '치아'에 대한 표현이다.
첫돌 무렵 약속이라도 한 듯 아이 입안에 새싹처럼 작은 흰 뼈가 돋았다. 인간이 가진 뼈 중 유일하게 바깥으로 드러난 거였다. <P.193 / 가리는 손>
짧은 문장을 보고, 한참을 생각했다. 인간에게 바깥으로 돋아난 뼈가 있었구나. 그 뼈는 무슨 쓸모로 인해 '위험을 무릅쓰고' 밖으로 돌출되어야 했을까.
국내 소설의 트렌드가 단편선이라는 것에 대한 소소한 불만은 있지만 그래도 이거라도, 젊은 작가들의 책을 접할 수 있음이 얼마나 좋은가 하면서 나랑 나이가 닮은 누군가의 생각을 읽으면서. 온 세상에 가득한 헤어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사소한 헤어짐일 수도 있겠고 수 천 년 전부터 예견되어온 당연한 헤어짐도 있을 것이며, 때로는 헤어져서는 안되는데 찰나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참 다정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소설의 주제는 우울하고 무겁지만, 그래도 다정하다 생각되는 이유는 아마도 아주 여성적인 문체 때문일 것이다. 사실 나는 '남성적인 문체'와 '여성적인 문체'를 잘 구분하지 못했었는데, 이제 대표작이 생긴 셈이다. 여성적인 문체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바깥은 여름을 읽어보시라.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P. 213 / 가리는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