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전쟁 - 숨겨진 모래 자원 쟁탈전
이시 히로유키 지음, 고선윤 옮김 / 페이퍼로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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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지반이 식으면 딱딱한 암반이 산을 이룬다. 지구 형성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이렇게 만들어진 '암산'은 밤과 낮의 온도차이에 따라 팽창과 수축을 반복한다. 팽창과 수축은 암석에 균열을 만든다. 암석의 균열 속으로 물이 들어간다. 들어간 물은 역시 기온의 차이로 팽창과 수축을 한다. 암석 사이의 물이 얼면 암석은 '빠직'하고 깨진다. 깨진 암석 사이로 박테리아가 들어간다. 박테리아는 구멍을 뚫고 나무 뿌리는 균열을 파고 든다. 비, 바람, 기온은 꾸준히 암석을 쪼갠다. 쪼개진 암석이 바람이나 물을 타고 흐른다. 흘러가며 서로를 긁어댄다. 더 미세해지고 더 가늘어진다. 이렇게 '모래'는 만들어진다.

모래는 모든 것에 사용된다. 우리를 둘러싸는 벽, 바닥, 천장 모두에 모래가 있다. 건물을 이루는 콘크리트의 70%가 모래다. 스마트폰, 컴퓨터에도 모래가 들어간다. 반도체의 원료 중 하나가 석영사 즉 모래이기 때문이다. 반도체의 기본 원료인 기판은 유기규소로 만든다. 이는 모래와 암석 속에 산소와 결합된 실리카 상태로 존재한다. 실리카에서 실리콘을 추출한다. 이것으로 웨이퍼라는 앏은 원판을 만든다. 이 위에 회로를 구워 붙인 것이 반도체다. 에어콘, 냉장고, 밥솥, 카메라, 텔레비전 등 어디 하나 모래가 없는 곳이 없다. 첨단 기기며 아름다운 건축이며 할 것 없다. 때로 우리가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모래'는 이렇게 현대 사회에 중요한 자원이다.

전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모래다. 전기는 '석유'로 만든다. 그러나 '석유'는 모래로 만든다. 그것이 무슨 말일가. 텍사스, 루이지애나, 콜로라도, 펜실베니아 등에서 '채굴'되는 미국 셰일오일은 그 원유채굴 비율은 68% 이상이 됐다. 2010년대에는 20%였던 비율이 2019년에는 68%까지 올랐다. 셰일을 추출해내려기 위해서는 수압파쇄법이라는 공법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 대량의 모래가 사용된다. 물과 모래, 화학약품을 섞어 그것으로 셰일오일을 밀어 올리는 기술 혁신이 바로 '셰일혁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모래는 거의 모든 곳에 사용된다.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세계는 매년 약 500억 톤의 모래를 사용한다. 그 숫자는 계속 증가하여 과거 20년 간 모래의 사용은 5배나 늘었다. 이로인해 모래 고갈은 점차 가속화된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아프리카나 중동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모래를 퍼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다. 중동에가면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막'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모래 고갈은 여전히 유효한가.

그러하다.

모래 고갈은 유효하다. 사막의 모래는 너무 가늘다. 모서리가 없어 서로 엉키지 않는다. 시멘트와 섞여도 강도를 낼 수 없다. 모래가 시멘트와 섞여 단단해 지는 이유는 모래의 각진 부분이 직소 퍼즐처럼 얽히고 맞춰지며 단단히 고정되기 때문이다. 다만 사막 모래는 너무 입자가 가늘다. 고로 사용이 불가하다. 또한 바다의 영향으로 염분이 많다. 사막에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 이유는 물이 부족해서만이 아니다. 염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처럼 염도가 많은 모래는 알카리성을 띄기도 한다. 이는 건축물의 강도나 안정성에 위협이 된다. 모래가 많은 중동국가들이 되려 모래를 수입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2018년 무하메드 마하티르는 말레이시아의 수상으로 취임된다. 취임 5개월 후 그는 모든 모래의 수출을 금지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이웃나라인 싱가포르가 자신들의 나래에서 매입한 모래를 가지고 간척매립 사업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자국의 모래가 이웃나라의 국토확장에 쓰였다는 사실은 말레이시아 정부 입장에서 기가 찰 노릇이다. 말레이시아는 비로소 2018년 모래 수출을 전면 금지했다.

우리 눈에는 매우 하찮아 보이는 모래의 가치는 점차 높아진다. 30년 전, 잡지나 신문에는 '석유 고갈'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앞으로 30년 안에 석유가 고갈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 석유는 거의 무제한에 가까울 만큼 풍부한 자원 중 하나가 됐다. 최근 우리나라 동해에서도 석유에 대한 이슈가 있었다. 심해나 셰일 등,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원유가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과연 자원의 희소성으로 볼 때, 앞으로 모래는 '석유'보다 훨씬 중요한 입지가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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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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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니체는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로 보는 세계가 다른다. 각자 다른 해석을 한다. 누군가는 달을 보고 쓸쓸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달은 아름다운가, 쓸쓸한가. 알 수 없다. 각자 자신만의 세계를 살 뿐이다. 고로 다른 자신의 세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발악할 필요는 없다.

최근 읽었던 '바나나 산책시키기'는 '스토아학파'의 철학에 대해 이야기 했다. 삶을 간결하게 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연장선으로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당췌 이해 못할 인간들과 현상들을 마주하고 스스로 고통스러워질 뿐이다.

그렇다. '사실이란 없다. 해석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망상증 환자의 세계를 '망상'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들에게 약물을 처방한다. 다만 우리가 살아가는 실재에서 '상'이 존재하지 않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기껏 해봐야 겨우 스무시간만 깨어있는 인간에게 '실재'를 사는 일을 얼마나 되는가. 보통의 인간은 삶의 3할을 꿈을 꾸고 산다. 깨어 있는 나머지 시간도 무의식에 지배되며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 실재라고 믿는 것이 거짓이라는 상황에 마주한다.

'만델라 효과'를 보면 알 수 있다.

1995년 많은 사람들은 조선총독부 청사가 폭바 해체 되는 모습을 TV로 보았다. 이 생중계를 본 많은 이들은 조선총독부 청사가 김영삼 정권에 의해 폭파해체 됐다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총독부청사는 15개월에 걸쳐 조금씩 철거됐지, 폭파로 무너진 것은 아니다. 이전 해인 1994년 남산 외인아파트 건물과 라이프건축개발 사옥 건물 철거 모습이 TV로 생중계 되면서 다수 한국인이 왜곡된 사실을 실제로 알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기억은 완전하지 않다. 기억만 완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인지능력 또한 완전하지 않다. 지금은 관관코스로 유명한 제주도 도깨비 도로는 한때 굉장히 이상한 곳이었다. 그곳에 흘린 빗물이 위를 향해 흘러가기 때문이다.

파타모르가나 현상도 그렇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가 하늘 위에 떠 있는 현상이다. 이 현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사람들은 이 배기 저주에 걸린 유령선이라고 불렀다. 정박하지 못하고 영원히 바다를 표류한다는 전설이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이는 빛의 굴절로 인한 착시일 뿐이다. 이집트 정복을 나섰던 나폴레옹도 사막에서 호수가 난데없이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는데 이 사막은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 일행의 머리 위에 산으로 떠 있었다.

우리가 얼마만큼의 진실을 알고 있는가. 내가 보는 진실도 진실이라고 확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상대가 보는 진실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확신을 할 수 있는가. 고로 우리는 '너'와 '나' 둘 중 누구의 말이 더 맞는지를 따지고 들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그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각각의 세계가 다름을 인정하고 나면 상대의 다름에 대해 인정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세계에 대해 증명하고자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다. 누군가 나의 팔이 '셋'이라고 한다면 필사적으로 나의 팔이 '둘'임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저 사람의 눈에는 '셋'으로 보이는 구나, 하고 넘어가면 된다. 도를 넘고, 선을 넘어서는 경우가 아니라면 불필요한 에너지를 사용하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자 할 필요가 없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 많은 시간적 에너지와 비용을 소모한다. 자신의 사회적 입지와 경제적 지위를 입증하기 위해 값비싼 자동차와 악세서리를 소유하고 자신이 가치있는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끊지 못하고 살아간다. 다만 자신에 대해 자신이 있는 이들에게 그런 불필요한 수식은 거추장스럽다. 그렇게 이미 완전한 이들은 하나씩 자신을 덜어낸다.

세계적인 투자자 워렌버핏이 싸구려 지갑, 자동차, 주택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전혀 자존감에 흠집이 잡히지 않는 것 처럼, 마크 주커버그나 스티브 잡스가 항상 같은 옷을 입고 있더라도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 것처럼, 삼성 이재용 회장이 국산 자동차를 타고 다니더라도 전혀 굴욕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렇다.

고로 본질을 수식하는 거추장스러운 포장물로 본질을 왜곡해서는 안된다. 똥은 황금 포장지에 쌓여 있어도 똥이고, 황금은 똥물이 묻어 이어도 황금이다. 결국 포장에 가려 본질을 보지 못하는 바보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황금'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황금은 자신이 나서지 않아도 가치를 아는 사람에 의해 가치를 인정받는다. 극단적으로 '바보를 설득하기에 인생은 짧다'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바라보는 '나'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나와 비슷한 타인들을 말하는 것이다. 고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본질을 봐야하고, 본질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가치를 설명하기 위해 불필요한 인생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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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열대어 케이스릴러
김나영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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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남편은 연쇄살인범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목격자일 겁니다."

유력한 살인사건의 용의자와 그의 아내가 혼수상태로 잠들어 있다가 깨났다. 기억을 상실한 채로...

깨어난 아내는 위와 같은 말을 들었다. 그 혼란과 공포.

추리물은 초반에 몰입시키지 못하면 매력이 없다. 등장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누가 누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하고 작가가 숨겨놓은 복선도 모두 의미가 상실한다.

그러니 이렇게 강력한 도입의 스릴러를 일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은 '오디오북'으로 듣건데 무척 흥미진진했다. 문체가 간결하고 쉬운 것이 '일본추리'를 닮았다. '일본 추리'라 했지만 '히가시노 게이고'가 떠올랐다. 수요가 있기에 반드시 공급도 있을 법한데 발견하지 못했다는게 못내 아쉬웠었다. 이제야 발견했다. 아마 '김나영 작가'의 도서를 몇 편 더 보게 될 것 같다.

도서는 '윌라 오디오북'에서 추천 목록으로 알게 됐다. 최근 '윌라 오디오북'의 이름이 새롭게 바뀌었다. 윌라 2.0이다.

'스타벅스 커피'가 '스타벅스'로 바뀌면서 '커피' 외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처럼 '윌라'가 '오디오북'을 넘어서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의지를 담은 듯하다. 현재 '밀리의 서재'를 구독 중이다. KT 요금제에 구독료가 포함되어 있어 이용중이다. 개인적으로 '전자책'보다는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어찌됐건 거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전자책 이용 빈도가 높아졌다.

확실히 전자책을 이용하다보니 평소보다 독서량은 늘어난다. 워낙 바쁜 탓에 한 동안 도서리뷰를 올지 못했으나 근래들어 거의 1일 1독 수준으로 도서리뷰를 올릴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습관이 무섭다고 이제는 전자책으로 읽는 비중도 꽤 늘었다. 물론 그렇다고 전자책으로 완전히 갈아 탈 수는 없다.

윌라의 경쟁사는 아마 '밀리의 서재'일 것이다. 밀리의 서재는 꽤 아쉬운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만족하는 편이다. 밀리의 서재가 아쉬운 부분은 나에게 명확하다. 나처럼 '병렬독서'를 하는 사람에게는 꽤 쥐약이다. 물론 내부에 '읽고 있는 책'을 분류 볼 수 있긴 하지만 플로팅 형식으로는 최근에 읽었던 한 권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번갈아가며 도서를 바뀌 읽기는 힘들다. 때로는 오디오북과 전자책을 병렬로 읽을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새로 다운 받게 되는 과정도 복잡하다. 윌라 오디오북은 이런 부분이 보완된다. 또 소설 부분에 대해 성우의 연기력이나 연출도 좋다.

기존 '윌라오디오북'의 포지션은 조금 애매했었다. 밀리의 서재에서도 오디오북이 있고 보유도서량도 밀리의 보다 적어 보였다. 그러나 윌라2.0이 되면서 강력한 차별점이 생겼다.

첫째, Kids다. 매주 아이와 도서관을 가서 수십권의 책을 빌려와 읽었다. 밀리의 서재에는 어린이 관련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하다. 윌라에서 Kids 목록이 생기면서 드디어 아이들 도서도 충분해졌다. 이로써 윌라를 구독해야 할 이유는 이미 충분해졌다.

둘째, 전자책이 생겼다. 윌라 오디오북에서 전자책이 생겼다는 점은 '밀리의 서재'와 더욱 비슷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제안할 부분이 있다면, 오디오북을 듣다가 전자책으로 넘어가고 싶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부분이다. 기술적으로 '목차'에서 큰 단락만이라도 연동할 수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정도만 해도 아주 만족스러울 법하다.

셋째, 개인적으로 '고객센터'가 적극적인 편이다. 사실 '도서관련 플랫폼'에서 '고객센터' 이슈로 이용을 하지 않는 편이 많았다. 다만 '윌라'의 경우는 매우 친절하고 적극적인 편이었다. 일단 지금에서는 윌라와 밀리를 병행하기로 했다.

다시 '붉은 열대어'로 돌아와서, 소설은 우리나라에서 인기 많은 '게이고'의 글을 닮았다. 다만 단순히 '게이고'와 닮았다,가 아니라 문장에 문학적인 표현도 충분히 있어 단순히 추리 소설를 읽는 이상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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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 -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는 아이들의 놀라운 실상
미야구치 코지 지음, 부윤아 옮김, 박찬선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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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권유로 MBTI 검사를 했었다. 유형별로 사람을 나누는 일에 관심이 없었으나 분위기에 편승하여 검사를 했다. 짧게 끝나는 간단한 문답이 이어졌다.

문항을 풀면서 혼잣말은 이랬다.

'원래 다 그렇지 않나'

문항이 묻는 것은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검사를 마쳤다. INFJ라는 결과가 나왔다. INFJ는 매우 희귀한 성격이었다. 이후 옆에 있던 지인이 검사를 했다. 도무지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을 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다 비슷한 것은 아니며 내가 굉장히 소수에 속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나무에서도 다른 모양으로 가지가 자란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모두가 같을 것이라 생각한다. 각자 자신을 기준으로 중심을 잡고 세상을 바라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산'이나 '강', '바다', '식물'이나 '동물'에게 푸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가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그들에게 푸는 이유는 그들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에게는 어떤 '기대치'도 없다. 즉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이유는 '기대치' 때문이다.

아이가 한살 때, 방청소를 깨끗하게 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아이는 누워서 똥오줌을 싸고 배고프면 배고프다고 큰소리로 운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를 나무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걷고, 말하기 시작하면서 거기에 '기대치'가 생긴다. 기대치는 갈등의 원인이 되곤 한다.

정치에서 '평등'의 개념은 '보수', '진보'에 따라 다르다. 보수 진영에서는 '기회의 평등'을 주장한다. 진보 진영에서는 '비례적 평등'을 주장한다.

기회적 평등이란 모든 이들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하는 평등을 말한다. 반대로 비례적 평등이란 결과의 수량을 평등하게 맞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말해서 기회적 평등은 모두가 같은 출발선 위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는 일이고 비례적 평등은 모두가 같은 도착점에 있을 수 있도록 출발점을 조정해 주는 일이다.

'미야구치 코지'의 '케이크를 자르지 못하는 아이들'에는 '알랜드 보통'의 '불안'과 보면 비슷한 인사이트를 준다. 우리가 과연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 아이가 7살 정도에 글씨를 썼는데 글씨에 좌우가 반전되어 있었다. 어떤 부모는 b와 d를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을 나무란다. 'ㅇㅏ를 'ㅓㅇ'라고 적은 아이를 답답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 발달 상태가 성인과 달라 반전된 상태로 보인다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여기에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잣대가 무용이 된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기회의 평등'과 '비례의 평등' 중 어느 하나가 '선'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적정한 균형이 필요하다. 다만 분명 '출발점'이 다른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고로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출발점에 우리는 그들이 '없다'라고 여길 수는 없다.

범죄자의 일부는 인식 방식에 차이가 있다. 일본의 예를 들자면 일본의 재소자 일부는 '인지능력'이 평균에 미치지 못했다. 그것이 유의미한 차이가 있으면 그것을 '장애'라 부른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인지능력장애'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절차가 필요하다. 범죄는 '나쁘다'는 일반적 인식과 다르게 어떤 이들은 단순히 '왜곡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을 수 있다는 의미다.

아이가 글자를 좌우반전된 상태로 그렸던 것이 단순한 실수나 잘못이 아닌 것처럼 어떤 이들은 특별한 죄의식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이것은 '죄의식 없는 범죄자'를 변호하기 위해 '선량한 피해자'의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 사회가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을 씌울 지언정 그곳에 도덕적 결함이나 '선악'을 투영하기까지는 속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는 기회적 평등의 사회를 살면서 우리는 모두가 그렇지 않는 사회를 살고 있다. 누구는 분명 열심히 하고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누구나 열심히하면 '메시'나 '호날두'가 될 수는 없고, 누구나 열심히 했다고 '모차르츠'나 '베토벤'이 될 수는 없다. 여기에는 분명 남다른 출발점이 존재한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사회적 갈등은 필연적으로 늘어난다.

아무리 열심히 하려고 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학생은 분명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 비만인도 존재한다. 그것은 보통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일 수 있지만 누구나 같은 세상을 보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이해할 법한 범주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케이크를 삼등분 하는 방법을 일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그려내는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는 사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그리고 풀어야 할 숙제 중 하나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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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돈은 몽땅 써라 - 먹고 놀고 마시는 데 목숨 걸어라, 다시 살 수 없는 것들에 투자하라
호리에 다카후미 지음, 윤지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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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인 표현이지만 꽤 일리있다. 가진 돈을 몽땅 써야 한다. 일부 이 말에 공감한다. 예전 '스타크래프트'라는 게임에서 배운 바 있다. 친구에게 스타크래프트를 배운적 있다. 게임은 단순하다. 광물을 캐고 자원으로 유닛을 만들어 상대를 공격하면 된다. 현실 전쟁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있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광물자원'과 같은 경제력이다. 게임은 시작과 동시에 4명의 일꾼을 준다. 일꾼들이 일을 시작하면 '광물자원'의 숫자가 올라간다.

이때 필승의 전략은 이렇다. 쌓이는 광물자원을 최대한 0으로 만들어야 한다. 50원이 모이면 또다른 일꾼을 생산하고 100원이 모이면 건물을 짓고 다시 50원이 모이면 일꾼을 생산한다. 돈이 쌓이도록 놔두는 것은 기회비용을 날리는 행위다. 어리석게도 게임을 처음 시작할 때, 절약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일꾼이 생산하는 50원을 아껴 큰 건물을 생산하려는 시도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게임을 아는 이들은 안다. 가진 돈을 몽땅 쓰다보면 나중에는 잠시 전투를 하는 도중에도 엄청난 돈이 쌓이게 마련이다. 결국은 아껴쓰는 것보다 몽땅 회전 시키는 편이 이득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누구보다 빠르게'다.

게임에서 가장 비싼 건물 중 하나는 '커맨드센터'다. 대략 500원 미네랄 정도 된다. 초기에는 꽤 목돈에 해당된다.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맨드센터를 짓고 확장하지 않으면 한정된 자원은 결국 남에게 빼앗긴다. 한정자원을 나눠 갖는 현실 구조와 똑같다.

저축은 은행의 채권을 사는 투자다. 주식, 채권, 부동산 등 많은 투자 방법 중에서 기대 수익이 가장 보잘 것 없으며 자신의 기회비용을 채권을 구매하여 묵혀두는 일이다. '저축'이 최대 '선'이라면 은행은 어째서 사람들이 저축한 돈을 '저축'하지 않고 '기업'에 대출해주겠는가. 그리고 기업들은 어째서 그것을 대출받고 운용하겠는가. 기업의 목적은 '이윤추구'다. '저축'이 '이윤' 추구의 최대 선이라면 기업은 '대출'이 아니라 '저축'을 해야 한다. 그러나 기업은 적당한 인플레이션에 걸맞는 성장을 하고 규모를 확장한다. 그리고 결국 개인을 고용한다. 빌린자가 빌려준 자를 고용하는 이상한 구조가 형성된다.

돈은 '기회비용'의 다른 말이다.

가령, 욕구가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한 사람은 욕구를 해결할 능력이 있고 다른 사람은 그럴 능력이 없다. 이 욕구를 '교육'에 비교해보자. 어떤 이는 교육에 지출할 경제적 능력이 있고, 어떤 이는 없다. 둘이 같은 능력을 가질 수 없다. 등가교환에 의해 돈을 지불하는 행위는 무언가를 얻는 행위와 같다.

반드시 물품일 필요는 없다. 경험이나 인맥, 능력 때로는 기회일수도 있다. 돈을 지불하면 그에 합당한 댓가가 돌아온다. 물론 아무 의미없는 소비성 지출을 늘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유튜브든 글쓰기든 요리든, 모르는 부분이 있거나 경험한 적 없는 세계가 있다면 과감하게 지불하여 새롭게 배우고 시도하는 것이 좋다.

인류가 저축이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다. 인류는 대략 1만년 전 정착을 시작했는데 '농업혁명' 때문이다. 농업혁명은 인간에게 '잉여생산물'을 선사했다. 그전까지 인간에게 저축은 존재하지 않았다. 쓸만큼 쓰고 필요없으면 버렸다. 농업혁명은 분명 '부'를 만들어낸 혁명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는 계급을 만들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 역사상 농민이 지배계층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농민은 언제나 피지배계층이었다. 이들은 착취 당하거나 세금을 징수 당하는 존재들이었으며 그들을 지배하는 계층은 대개 외부에서 무기를 들고 침략한 '침략자'이거나, 과거 토지를 획득한 '정복자'의 후손이다.

유럽축구리그를 보면 스폰서들을 익숙하게 보게 된다. 놀라운 것은 스포서의 상당수는 '보험회사'라는 점이다. 현재의 보험사들은 '보험업무'만 하지 않는다. 이들은 잉여자금을 공격적으로 투자하는 투자회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경제력있는 회사는 '보험회사'인가. 보험의 기원은 '도박'에서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생명보험회사는 영국의 '런던로이즈'이다. 런던로이즈는 본래 장거리 항해를 하는 선원들이 찾는 카페였다. 그러다 17세기 말 카페를 다니던 손님들 사이에 선박이 무사히 항구로 돌아올지 내기를 시작했다. 카페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농민들이 잉여수확물을 저축한 이유는 그들이 풍요로운 생산능력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들은 미래지향적인 사고를 가졌다. 농사는 꽤 예측가능성이 높은 사업이다. 계절에 따라 반복되는 날씨와 기온이 있고 이에 맞는 수확시기가 정해져 있다. 다만 이 안정적인 패턴 중 예외상황이 발생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잉여 생산물'을 저축해야 한다. 다시말해 미래지향적인 사고는 불필요한 불안을 낳고 행동을 제한한다.

계산된 예측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불안이다. 이 불안은 '소유'를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한 살인 아이는 불안함이 없다. 7살인 아이에게도 불안함은 없다. 불안은 꽤 안정적인 경제력을 가질만한 나이부터 갖게 시작하는데 아이러니하다.

현대인 대부분의 소비는 '필요'보다 '과잉'하다. 다시말해 '소비력' 자체가 사회적 지위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고로 소유는 특히 물건을 살 기회와 이를 뒷받침할 경제력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수단이다. 비록 집은 없지만 '고급승용차'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 실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필요없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눈이 두 개가 있는데, 누군가 눈이 하나 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엇이라 답변하겠는가. 아마 상대할 가치를 못느낄 것이다. 자신의 자존감이 완전하게 형성된 이들에게 지위를 설득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사람에게는 일생간 소득주기와 소비주기가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무지막지하게 소비하고 생후 20년 동안 생산이라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즉 소비력과 생산능력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 소비가 죄라면 인간의 삶에서 '죄'를 짓지 않는 기간은 생각보다 크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을 적절하게 맞추는 것에 몰두하다 보면, 당연히 출산률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삶은 '살아가는 것'이다. 살아가는 것에는 '소비'가 발생한다. 이것을 완전히 절저한다는 것은 '생산'만이 '선'이라는 좋지 못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생산력'을 넘어서는 '무절제한 소비'는 분명 옳지 못하지만 자신의 생산력 내에서 충분히 소비하고 즐기는 것을 모두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돈이 모든 것에 '선'은 아니다. 돈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부분은 생각보다 많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돈'으로나마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해결하고 살아가는 것도 옳다는 것이다. 그 또한 일종의 기회비용이다. 아이들과 함께 외식할 수 있는 기회비용,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다가 얻을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한 비용, 다양한 취미를 가진 이들과 같은 취미를 공유하다가 갖게 될 고급 정보들에 대한 기회비용.

그런 기회비용들이 통장잔고에 쌓여, 연 3%도 안되는 성장률로 잠들어져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그 잠든 잔고를 깨워 더 빠르고 신속하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돈이 돈다는 것이 맞을까. 멈춰져 있는 것이 맞을까,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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